[무비스트=박은영 기자]
(해당 인터뷰는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요즘 인터뷰가 많아서 피곤하겠다.
작품이 공개된 상태에서 그 작품에 대해 얘기하는 거라 인터뷰는 별로 힘들지 않다. 제일 곤란한 건 제작보고회다. 작품이 공개되지 않은 상태에서 소개한다는 게 힘들다.
영화를 보고 소설을 읽었다. 영화를 먼저 봐서 그런지 소설보다 영화가 더 재밌더라. 캐스팅에 심혈을 기울였을 듯하다. 나이든 수현 역에 김윤석을 캐스팅한 이유는.
감독의 입장에서 너무나 잘하는 배우의 못 보던 모습을 발굴해 내는 게 캐스팅의 시작이다. 익숙한 것에서의 변주나 잘 하는 것에서의 안정성을 찾을 수도 있지만, 나는 항상 잘 하는 거 말고 다른 모습을 찾고 싶었다.
그의 어떤 모습을 끌어내고 싶었나.
이번 영화가 김윤석 선배가 잘하는 스릴러 장르가 아니기에 어떻게 보면 내 장르로 그를 초대하는 거다. 감정을 다루는 멜로장르에서 새로운 느낌의 (김윤석의) 다른 연기를 관객들이 기대하게 만들었으면 했다. 그래서 ‘멜로’라고 하면 딱 떠오르는 배우들을 차선으로 두고 김윤석 선배한테 제의를 했는데 정말 놀랄 정도로 빠른 피드백이 왔다.
얼마나 빨랐는지.
시나리오를 드리고 거의 2시간 만에 답이 온 거 같다. 그때, 그리고 그 후 에 작업을 함께 하면서느낀 점이 ‘그(김윤석)는 모든 걸 차제하고 시나리오를 보는구나’ 였다. 시나리오를 보며 얘기한 결과 우리 영화가 요즘 잘 다뤄지지 않는 감정을 다룬다는 것에 대한 의견의 합치가 있더라. 초반에는 그가 갖고 있는 안정성 속에서 좀 다른 모습을 찾고 싶었다. 그와 대화를 나눌수록 이야기에 공감하고 같은 그림을 그리고 있는 배우와 작업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커지더라.
소설 속 ‘엘리엇’은 나이가 60세다. 나이든 수현은 60세로는 안 보인다.
실제 나이가 60세로 보이는 배우들 중에서는 선택의 폭이 크지 않았다. 그래서 실제 나이 또는 보이는 모습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또 요즘 다 나이보다 젊어 보이지 않나. 중요한 건 인생의 무게를 충분히 드러낼 수 있는 정도냐이다.
2인 1역이고 소설과는 다르게 영화는 눈으로 직접 보는 거기 때문에 외양에서도 비슷해야 한다. 그 점이 상당히 부담이 됐다. 일단 김윤석 선배가 캐스팅 된 상태에서 연기가 되면서 30대 설정이 가능한 배우 중 추려나가기 시작했다. 키 그리고 얼굴의 몇 가지 특징들, 예를 들면 눈, 코, 귀의 생김새, 입매 등. 분장을 했을 때 그래도 조금 일치하게 보여야 하지 않나 했다. 거의 요한이가 1순위였다. 이번 작품에서뿐만 아니라 캐스팅을 할 때는 중심 의견을 내놓고 세부적인 것은 의논해서 끌고 나가는 편이다.
출연 제의를 받은 후 변요한의 반응은.
일단 반응은 좋았다. 그런데 당시 그 친구(변요한)가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를 한창 촬영 중일 때라 매니지먼트에서 시나리오 줄 시기를 잡으려고 힘들어 하더라. 드라마 촬영으로 너무 지친 상태지만 또 우릴 너무 기다리게 할 수 없으니까 현장에서 줬다고 하더라. 아마 요한이는 나이든 수현, 그러니까 상대역에 김윤석 선배가 캐스팅 됐다는 사실이 크게 작용한 거 같다.
변요한에게 영화를 본 느낌을 물어보니 처음 감독님을 만났을 때 느꼈던 신뢰를 영화를 보면서 다시 느꼈다고 하더라. 첫 만남에서 아무 말 없이 30~40분 정말 밥만 먹었다고.(웃음)
시나리오에 대해 직접 얘기도 하지만 실은 밥 먹을 때의 모습이나 일상에서 태도를 보며 그 배우에 대해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정말 30분 동안 한 마디도 안 하더라.(웃음) 내가 분위기를 풀어야 할 거 같아서 요한이 목소리가 듣고 싶다고 했더니 그때서야 ‘픽’ 웃으며 말하기 시작하더라.
이야기를 나눈 후 그에 대한 느낌은.
뭐랄까, 생각은 굉장히 많은데 그걸 표현하는데 부끄러워한다고 할까. 아주 진중하더라. 그 모습을 보면서 이 친구가 어쩌면 김윤석 선배한테 주눅들지 않고 대등하게 연기할 수 있겠다 싶더라. 처음에는 내가 연출적으로 포인트를 줘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촬영 시작하고 나서는 생각을 바꿨다 일단 요한이가 준비해 온 것을 밀어주고 그 다음에 내가 이것저것 브리핑하는 게 좋겠다는 쪽으로. 그는 준비를 아주 잘 해오고 연기의 기본이랄까, 관찰하고 고민하고 또 그걸 감독과 나누는 걸 굉장히 깊게 하더라. 그래서 이 친구는 믿어도 되겠다 싶었다.
소설이 탄탄하고 캐릭터가 잘 구축돼있어서 ‘일리나’ 캐스팅에 고민이 많았다. 실제 소설 속 그녀는 앞부분 헤어질 때 프로포즈하는 부분 말고는 그녀의 공간 속에서만 있다. 이 부분을 2시간이라는 시간 안에 한국을 배경으로 끌어오는 게 무리가 많았다.
어떤 면에서 무리인가.
일단 ‘연아’에 대한 ‘수현’의 깊은 감정을 설명하려면 두 사람의 관계가 보여야 된다. 소설 속에서는 그녀의 감정과 공간 속으로 들어가면 되지만 영화 속에서는 그녀의 공간에 너무 많은 시간을 배분하면 리듬이 깨진다. 이걸 어떻게 풀어낼까 하다가 초반 1985년도의 서 너 장면을 합쳐서 장거리 연애를 하는 연인들의 애틋함을 보여주고자 했다.
여자주인공의 직업도 바꿨다.
1985년도 한국이다. 전문적인 직업 여성이 지금처럼 많지 않던 시절이다. 적당히 중산층의 아버지가 물려준 집에서 살고 있는 의사인 수현이 갖고 있지 않은 어떤 다른 종류의 건강함을 연아가 가지고 있길 원했다. 그래서 수의사로서의 연아가 아니라 돌고래 조련사 연아를 만들었는데 이는 ‘제인 구달’에게 영감을 받은 거다. 그녀는 학위는 없지만 친화적으로 생활하면서 평생 침팬지 연구를 한 대가 아닌가. 그렇듯 연아도 진정한 애정을 가지고 돌고래와 교감하는 여인이고 확장하면 수현을, 그러니까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너그러움을 가진 여성이다. 전문직 여성으로서의 당당함보다는 그녀가 정신적, 육체적 건강함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래서 소설 속 당당한 커리어 우먼이나 우리가 쉽게 연상할 수 있는 첫사랑의 아이콘은 아니라고 결론 지었다. 왜냐면 우리 영화를 보고 아련한 그때를 떠올린다면 각자가 가지고 있는 첫사랑의 이미지가 있을 거기 때문에 이미 구축된 것을 가져와 쉽게 가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앞서 두 남자 주인공이 캐스팅됐기 때문에 새로운 이미지로 가고자 했다. 물론 모험이고 도전일 수 있는데 두 분이 내가 여자 주인공 캐스팅에서 좀 더 자유로울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줬기에 가능했다. 그 후 오디션을 엄청 본 끝에 최종 후보로 채서진을 택하게 됐다.
채서진이 얼마 전 개봉한 <커튼콜>(2016)에서는 완전 다른 모습으로 출연한다.
아직 그 영화는 못 봤다. 채서진을 처음 본 건 <초인>(2015)에서다. 극 중 여고생으로 나와서 처음에는 생각도 못했다. 그러다가 ‘수필름’ 대표가 좀 새로운 얼굴을 찾아보자 하면서 채서진을 추천하시더라. 지정 오디션을 보기로 하고 미팅을 왔는데 그 사이에 완전 여인이 돼있는 거다.(웃음) 아, 가능하겠다 싶더라. 아직 신인이고 자신감도 부족해 보이지만 만들어 볼 수 있겠더라. 그 친구(채서진)도 어리지만 진중하고, 느리지만 아주 곧은 아이다.
채서진의 장점은.
‘연아’가 등장하는 신 외에도 전사와 감정을 설명해주면 그 호흡을 받을 수 있는 아이겠더라. 경험 면에서 신인배우가 기존의 경력 많은 배우를 따라갈 수는 없다. 첫째로 감독을 신뢰하고 믿고 따라갈 수 있을까, 그 다음은 상대배우의 호흡을 받을 수 있는가 그리고 이미지가 영화와 맞느냐 이 세 가지를 봤는데 가능하다 싶었다. 서진이의 외모적 매력은 아주 고전적인 생김새이다.
무슨 의미인지 알겠다. 나이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80년대 미인의 느낌이 있다.
눈의 라인도 그렇고 눈이 커서 비어있는 거 같지만 깊이가 있다. 놀라운 건 요한이나 윤석 선배가 건네는 조언에 대해 아주 꼼꼼히 체크한다. 그 후 스스로 소화해내려 애쓰고, 힘든 점을 내색하지 않는 아주 강한 아이더라. 외모도 건강해 보이고 먹는 것도 좋아한다.(웃음)
아무래도 원작 소설과 영화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개인적으로 영화가 더 긴장감 있더라. 구체적으로 예를 든다면 젊은 수현이 나이든 수현에게 ‘거기도 연아 있는데 왜 연아를 만나러 와요?’ 이 물음이다. 소설 속에서는 너무 싱겁게 나이든 수현이 다 얘기해 버리더라. 각색에 대한 만족도는.
일단 소설이 원체 스테디셀러에 베스트셀러인데 소설을 미리 읽은 분들에게도 실망을 드릴 거 같진 않다. 왜냐면 소설은 소설로, 영화는 영화로 각각의 매력을 갖고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소설의 어떤 점에 끌렸는지.
이 소설을 영화화하면서 취한 소설적 매력은 탄탄한 이야기와 리듬감 그리고 영화적 구성이었다. 그래서 그 ‘틀걸이’는 다 가져왔다. 다만 한국화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사건을 바꾸고 캐릭터를 압축한 건 있다. 단순 멜로가 아닌 그 이상 되는 이야기였으면 하는 바램에 시간여행이라는 장치를 단지 첫사랑을 만날 수 있게 하는 기능적 장치로 다루지 않았다. 이 이야기가 감정을 다루는 이야기인건 맞지만 최소한 요즘 관객들을 후킹할 수 있는 포인트가 있어야 하기에 스릴러적 리듬감을 부여했다. 그래서 원작에선 없는 긴장감을 계속 불어 넣어 관객이 지루하지 않도록 배려했다.
어떤 방식으로 긴장감을 부여했는지.
첫 등장이나 두 번째 등장, 세 번째 등장 등 특히 전반부에서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 굉장히 편집에 신경을 많이 썼다. 초반 40분이 앞으로 벌어질 일, 그리고 시간 여행에 대한 관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하는 게 지루하지 않게 보이게끔 했다. 그래서 ‘관객이 뭐지’ 하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게끔 ‘정확하게 가자, 대신 리드미컬하게 가자’ 했다. 생각해보면 두 수현이 한 연아를 두고 처음에는 정말 애닮아 한다. 그러다가 ‘안돼, 살릴 수 없어, 딸이 있거든’ 이렇게 배반적인 마음을 얘기하는데 그 지점이 충분히 팽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장면이 세 번째 만남이다. 두 번째 만남까지는 ‘전 어떤 의사가 됐나요’ 이렇게 화기애애하게 얘기하다 어느 정도 수현한테 그가 왜 왔는지 알려줘야 할 거 같더라. 그래서 수족관 앞에서 촬영을 했다.
수족관 앞 두 사람 신,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장면이다.
굉장히 파란 빛으로 서늘한 분위기를 연출하려 했다. 가장 그럴듯한 공간을 찾다가 돌고래도 배경으로 있고 하니 수족관 앞이 제격이겠더라. 마침 위에서는 연아가 햇빛 받으며 웃고 있다. 이와 대조적인 서늘한 두 남자의 모습이 꽤 괜찮았던 거 같다.
나 역시 이야기가 다층적이라 좋았다.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 많은 분들이 두 남자와 한 여자의 관계에 집중할 거다. 영화에서는 그 보다 많은 관계의 층을 다뤘다. 일상 생활을 공유하는 아빠와 딸, 마지막 한 개의 알약을 발견하고 앞뒤 안 가리고 달려가는 ‘태호’(김상호 분)의 진한 우정, 또 스스로에 대한 자기애 등 말이다. 처음에는 과거에 실수한 사랑을 잡으려는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그로 인해 파장되는 많은 관계를 영화 안에서는 그나마 다채롭게 다루지 않았나 한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건 나의 한계이기도 하고 영화적 아쉬움이기도 하다. 배경과 풍경에서 시대적 아름다움을 담아내고 싶었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실제 소설 속 샌프란시스코와 플로리다를 부산과 서울로 배경을 옮겼다. 부산과 서울이 소설 속 배경보다 덜 아름답다는 의미가 아니라 1985년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공간을 찾아내는 게 너무 힘들었다. 부산을 선택한 이유도 거제도 일대를 샅샅이 뒤졌지만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더라. 모든 배경을 다 세트로 지울 수는 없으니까 자연스러운 배경이 되는 외부 공간을 찾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찾기 힘들더라.
1985년의 외적인 정서를 충분히 전해지 못해서 아쉬운 건가.
맞다. 감정에 집중한 영화이기 때문에 85년도를 미술적으로 훌륭히 구현하는 게 목적은 아니라고 위안을 하고 있다.(웃음) 그렇게 나를 위로했지만 처음의 목적은 훌륭한 시대극을 보여주는 거였다.
원작이 있는 작품을 많이 각색하는 편이다.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2008)(이하<앤티크>)를 각색한 걸로 알고 있다. 원작이 요시나가 후미의 만화 <서양골동양과자점>이다.
원래는 <키친>(2009)을 준비할 때 구상했던 요리 3부작 중 하나다. <키친> 준비하면서 레퍼런스로 삼고 있었는데 나중에 영화로 만들고 싶어서 판권을 진행하던 중이었다. 내가 직접 연출을 하고 싶었는데 원작 작가가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1999) 를 너무 잘 봐서 계약 조건이 민규동 감독이 연출해야 한다는 거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각색밖에 없더라.(웃음) 감독들이 일부러 3년 만에, 5년 만에 이렇게 오랜만에 새 작품을 하는 건 아니다. 이렇게 더딜 수밖에 없는 이유는 결국 시나리오 문제다.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나리오를 쓰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 과하게 시나리오에 투자하는 시간이 크기 때문에 정작 연출할 에너지를 많이 소진하게 된다. 그래서 그런 누수를 줄이기 위해서 평소에 읽는 책들을 통해 아이디어를 찾을 때가 많다. 소설이나 만화 등등에서 찾곤 한다.
각색할 작품을 고르는 기준이 있다면.
완전히 100% 일치하지 않아도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의 원형을 갖고 있으면 그 부분을 취한다. 기욤 뮈소의 여러 소설 중에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를 선택한 이유 중의 하나가 내가 생각했던 많은 부분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 여행’ 소재가 자주 다뤄지지만 절대로 진부한 소재가 아니다. 그건 다루는 방식이 진부해서다.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를 모티브로 여러 드라마가 나오기도 했다. 대부분의 그런 드라마들은 그 소설을 스릴러적으로 풀었다. 하지만 나는 원작 소설의 포인트는 시간 여행이 갖고 있는 스릴러적 요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 소설이 다른 시간 여행과 차별화되는 점은 거울처럼 두 사람이 타자로 만난다는 거다. 스릴러적 리듬을 가져가되 결국 다뤄야 하는 건 감정의 문제라 생각했다. 자기애든, 우정이든, 후회건 부성애건 이런 것들 말이다. 한국영화에서는 이렇게 감정적인 부분을 다루는 영화들의 시장이 작고 폄하되는 부분도 있다. ‘드라마에서 하는 얘기 영화에서 또 하네’ 이러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그건 굉장히 암묵적인 폭력이다. ‘드라마에서 다 한다고’ 왜 그렇게 얘기하는지 정말 이해가 안 되고 모르겠다. 내가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를 만들면서 중점을 둔 부분은 요즘 관객들이 보기에도 절대 지루하지 않을 리듬감을 가져가되,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결국 감정의 문제이니 그 멜로감을 잃지 않으려 했다. 멜로도 남녀 문제만이 아니라 다층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원작 소설에 대해 소설로 쓴 시나리오 같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그렇기에 각색하는 작업이 쉽지가 않아서 다 해체를 했다.
원작에서 취한 부분과 취하지 않은 부분은.
소설을 취한 이유는 캐릭터나 구성 면에서 매력 있기 때문이었다. 그 부분을 버리면 굳이 소설을 각색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중요한 ‘틀걸이’는 가져왔다. 즉, 열 개의 알약, 열 번의 만남, 만남 별로 이뤄지는 관계와 사건의 내용들은 그대로 하되, 이를 한국화했다. 소설은 인물들이 더 많이 확장 되어있다. 심지어 ‘태호’가 경찰도 아니다. 영화에선 확장돼있는 걸 압축해야 했다. 소설은 소설이지 시나리오가 아니기에 각색이라해도 거의 시나리오를 다시 쓰는 것과 다름이 없다. 배경도 소설은 2000년 대 초반과 70년대를 다루지만 우린 2015년과 1985년이다 보니 사실은 더 어렵더라. 하지만 시간여행과 관계라는 이야기 자체가 굉장히 매력있기에 그걸 처음 생각해내긴 어려우니까 원형은 가져오자 했다. 그 후 막상 시나리오 작업하니 맨땅에서 쓰는 것보다는 쉬울 거라는 생각이 사라지더라.(웃음) 매력은 가져가되 새로이 시나리오를 쓴다고 생각하고 거의 2년 동안 작업했다. 시간이 적게 걸리지도 않더라. 처음에는 소설을 압축하는 방식으로 시나리오를 써봤는데 잘 안되더라.
나는 강릉 출신으로 그 당시 집에 SBS도 안 나왔고 오로지 볼 수 있는 영화는 ‘주말의 명화’가 다였다. 철학을 전공하면서 영화에 늘 관심 있었다. 많이 보진 못했지만 영화의 원형 자체에 관심이 있었던 거 같다. 참 흥미로웠다. 대학을 다니면서 철학공부는 계속하겠지만 영화에 대한 글을 철학적으로 좀 다른 접근방법에서 써봐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렇게 쓰려면 어떻게 써야 할까 고민하며 다른 평론글들을 보니까 대부분의 글이 이야기 혹은 감독의 연출에 초점을 맞췄더라.. 제작과정 그러니까 영화의 메커니즘에 대한 글은 별로 없는 거다. 제대로 된 글을 쓰려면 스스로가 제작이 어떤 공정으로 이루어지는지 알아야겠다 싶더라. 그래서 당시 한겨레신문사에서 운영하는 6개월 과정의 ‘영화제작학교’를 입학하여 단편영화를 만들어봤다.
그 시기가 언제인가.
1995년으로 내가 1기였다. 그때 민규동 감독도 만났다. 단편영화를 만들어 보니 너무 재밌더라.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완성 후 내가 채서진에게 ‘영화 어땠니’ 물어보니까, 서진이가 ‘감독님, 제가 제가 아닌 거 같아요’ 이러더라. 그래서 내가 ‘영화 속에 표현된 네 모습 안에 네가 있어, 아직 모를 뿐이지’ 이랬다. 서진이처럼 그 당시 나도 딱 그런 느낌을 받았다! 20대의 나는 내가 감독 역할을 할 수 있는 혹은 역량이 있는지 잘 몰랐었다. 근데 영화를 배우며 단편영화를 만들고 나니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렇게 시작이 됐다. 그 후 한국영화아카데미에 들어갔고, 그 다음에 연출부를 하다가 장편 시나리오를 써서 늦깎이 데뷔를 했다.
여성 감독 2세대 정도가 아닌가 싶다. 최근 여성 감독들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일단 영화과 자체가 많아졌고, 연출적인 면에서 남성과 차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자기 이야기를 푸는 방식에서 제약이 없어서라고 본다. 여성 감독들이 독립영화계에도 많이 활약하고 있고 상업영화에서도 선전하고 있는 건 멋진 일이다. 나 때만 해도 감독일, 영화일, 만드는 일이라는 게 약간 한 번 더 생각해야되는 혹은 엄두내기 힘든 일이라는 인식이 어느 정도 있었다.
38살 늦깎이 데뷔라고 했는데 그전 준비 기간은.
30대 초반부터 생각했던 시나리오로 38살에 <키친>을 찍을 수 있었다. 그 사이 출산도 했고 첫 아이가 4살 때 데뷔했다. 그 아이들이 지금은 13살, 7살이 됐다. 시간이 참 빨리 간다.(웃음) 투자 받는 게 여의치 않아 끝내 전세 대출을 받아서 제작한 거지. 당시 12억으로, 필름으로 찍었다.
<키친>(2018)의 남, 녀 주인공이 주지훈과 신민아다. 출연료가 비싸지 않았나.(웃음) .
지금 보면 그랬을 거 같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그때 신민아는 나름 침체기였다. 민아가 26살이었는데 어중간한 어린 나이인 데다 다작을 하면서 이미지 소모가 크던 때다. 처음 신민아를 주인공으로 생각하지 못했던 게 유부녀 역할이라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만났더니 역시 흥미롭더라.
신민아는 감독님한테 고마워해야 할 거 같다. <키친>에서 너무 매력적이지 않나!
<키친>의 캐릭터를 민아가 잘 소화해 내기도 했고 또, 민아를 위한 캐릭터처럼 잘 어울린 것도 있었다. 민아가 그 후 영화에 대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고, 서로에게 굉장히 좋은 인연이었다.
주지훈은 어떤가.
비하인드 스토리인데 <앤티크>랑 <키친>이 동시에 제작이 들어갔다. 그 당시 지훈이 자신에게 들어온 시나리오 중에서 두 개를 딱 골랐는데 그게 바로 <앤티크>랑 <키친>이었다. 나는 한번 맺었던 인연이나 관계를 꾸준히 지속하는 편이다. 길던 짧던 한 작품을 함께 한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인연이다. 민아나 지훈과 같이 작품을 할 수 있는 기회가 그 후 없어 못하고 있지만 그냥 같이 밥 먹고 차 마시며 일상적인 시간을 많이 보내는 편이다.
‘영화일’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면 뭐라고 말할까.
가끔 영화를 하고 싶다고 진로에 대해 상담하는 친구들이 있다. 그럼 내가 그런다. ‘정말 좋아? 그럼 해!’ 하고, 그 친구들은 영화를 전공하지 않았다고 혹은 나이가 많다고 걱정을 한다. 그럼 내가 이렇게 말한다. ‘나도 영화를 전공하지 않았고, 38세 아줌마일 때 데뷔했다, 뭐가 문제지?’라고 말이다.
그들에게 해주고 싶은 구체적인 조언은.
하고 싶은 걸 하되 건강하게 버티라고 한다. 그러려면 스스로가 자신감이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영화로 너무 점철된 삶을 살지 말라고 한다. 왜냐면 그렇게 살면 너무 지치셔 오래 버티기 힘들다. 영화는 누군가에 의해 선택되거나 캐스팅되거나 투자되는 거다. 나의 노력은 이만큼인데 왜 안 알아주지 하는 건 볼멘 소리밖에 안 된다. 대신 건강하게 자신의 얘길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딱 잡을 수 있도록 준비를 하라고 한다. 그 건강함이 꼭 영화를 전공해야 한다거나 그럴 필요는 없다. 내가 좋은 예 아닌가. 비전공자에, 38살에, 아이 엄마였다. 그럼에도 지금은 영화 감독을 하고 있지 않나.
배우자와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게 득일 수도 실일 수도 있다.
남편.(민규동 감독)이 나이로는 한 살 차지만 나보다 훨씬 먼저 데뷔했고 많은 작품을 했다. 그럼에도 역시 어려움이 있다. 또, 내가 내 색깔의 연출을 했어도 (남편에게)영향을 받지 않았나 의심하고 짓궂은 질문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유로워지더라. 영화작업은 어느 감독이 다른 감독한테 영향을 미치거나 뭔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예를 들면 촬영 감독과 감독, 혹은 프로듀서와 감독은 역할이 다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감독과 감독일 때는 각자의 영역이 있기에 상대를 전체적으로 봐주고 격려하는 거다. 우리 부부도 물론 각자의 작품에 대해 총평을 하고 중요 부분을 모니터해주지만 이게 이렇게, 저게 저렇게 이런 식의 개입은 하지 않는다. 그게 서로를 존중하는 방식이다. 생활을 함께 영위해야 하기에 영화를 너무 일상 속에 개입시키지 않기로 했다. 그게 우리 부부만의 건강함을 유지하는 방식이다.
상대의 재능이 부럽다고 느껴지는 순간도 있을 듯하다.
음, 그건 자존감의 문제 같다. 이번 작품을 하면서 소설과 많이 비교당할 텐데 괜찮겠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 정말 그런 부분에 대해선 걱정이 없다. 전에 <가족시네마>(2012)라는 옴니버스영화를 했는데, 그때도 다른 감독들이 이야길 어떻게 푸는지 궁금하지, 왜 그 사람들과 비교 할까 생각했었다. 마찬가지로 영화는 영화, 소설은 소설일 뿐 비교할 필요가 있나. 돌아가서 아까 소설과 비교당할 텐데 괜찮겠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소설이 원형이었다고 왜 콤플렉스를 가져야 하나요?’ 이다. 부부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민규동 감독)는 나보다 더 많은 작품을 하고 있고 연출적으로 좀 더 집중적이다. 또, 동료로서 보기에 내용적인 폭발력과 섬세함 등 부러운 면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거나 하진 않는다. 난 나대로의 영화가 있는 거다. 10년 정도 살면서 느낀 게 우린 참 다른 사람이라는 거다. 그럼 현명하게 사는 방법은 그와 내가 다르다는 걸 인정하는 거다. 같다고 느꼈던 게 착각이였음을 인정하는 거지.(웃음) 비슷한 맥락으로 이번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촬영하는 동안 개봉하는 영화들, 특히 <곡성>, <아가씨>를 보면서 ‘내가 못 이룬 저 미술, 원 없이 찍으셨겠다’ 이런 마음이 들더라. 우린 예산에 맞추다보니 하고 싶은 걸 못했는데 하는 부러움이 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스트레스 받진 않는다. 이점이 감독으로서 자긍감을 지키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내가 할 수 있는 연출을 꾸준히 올곧이 할 수 있는 힘인 거 같다.
지금까지 내 작품이 장르는 달라도 그 속에는 항상 멜로가 있었다. 내가 소중히 생각하는 가치다. 그게 없이 상황만으로 펼쳐지는 영화는 나한테는 단순한 킬링타임에 불과하다. 그런데 ‘멜로’를 다루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안다. 나는 개인적으로 영화의 핵심은 배우와 감독한테 있다고 생각한다. 그 배우가 얼마나 밀도 있게 연기를 펼치느냐가 영화를 훨씬 몰입하게 만들고 관객의 마음을 움직인다. 옴니버스로 참여했던 공포영화가 너무 흥미로웠고 정말 영화적 장르라 생각한다. 액션도 하고 싶다. 하지만 무엇보다 서사에 관심이 있다. 내 영화에서 늘 있어온 인물 중심이야기, 그가 겪는 딜레마적 상황이나 판단들에서 내 인물관과 세계관이 나오는 거 같다. 그런 부분을 좀 더 깊이 있고 세밀하게 다루는 감독이고 싶다. 그냥 쉽게 감정을 다루지 않는 게 ‘홍지영’의 장점이라고 관객들이 생각해주면 좋겠다. 이야기에 따라서 장르를 선택하고 그것을 해낼 수 있는 연출력을 스스로 키우려 한다. 지금까지 겨우 3편의 장편영화를 대중에게 선보였다. 그걸 가지고 ‘아 이 사람은 이걸 잘하는구나’ 이렇게 판단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번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는 복합장르라고 생각한다. 그냥 그런 진부한 소재로 치부되지 않도록 스릴러적 리듬감, 판타지 적 이야기의 매력, 다층적 멜로 구조, 휴머니즘을 부여했다. 이 영화 안에서 홍지영의 다양한 가능성을 발견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요리 3부작은 여전히 진행 중인가.
음 <앤티크>는 뺏겼고,(웃음) 요리에 관련해 하고 싶은 얘기가 있긴 하다. 근데 다음 작품이 될 것 같지는 않다. <키친>의 시작은 요리하는 남자가 매력적이라는 거였다. 지금은 요리하는 남자들이 너무 많지만!
영화를 기획할 때 지키는 관점이 있다면.
관객으로서의 ‘나’ 를 잊어버리지 말자다. 내가 어떤 영화를 재밌게 봤는지 항상 생각한다. <키친>의 예를 들면, 요리하는 남자 매력적이다, 주택 한 가운데 자리한 큰 주방의 공간을 여자가 아닌 두 남자가 차지하면 어떨까, 이런 현실을 약간 비트는 생각에서 시작했다. 데뷔할 때는 너무 몰라주는 거 같아 서운해 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많은 분들이 생각보다 그 작품을 기억해 주시더라. 그렇게 하나하나 쌓여가는 거 같다.
관객에게 바람이 있다면.
물론 좋은 평가를 받고 싶지만, 부족함을 지적 받아도 감사하다. 다만 12월에 어려운 경쟁을 하고있는 건 사실이다. 우리 영화가 작지만 그저 그런 영화로 치부되진 않았으면 싶다. 관객의 한 사람으로 봤을 때 조금은 다른 영화가 아닐까 한다. 소중하게 관계를 들여다 보며 휴식과 힐링을 할 수 있는 영화라 생각하기에 영화관에서 관객과 만나는 기간이 너무 짧지 않기를 바란다.
계획하고 있는 작품은.
서사에 관심있다보니 시대극을 해보고 싶었다. 근현대사에 살았던, 고증이 많진 않지만 굉장히 매력적인, 가려진 인물이 있다.
누군가.
아직은 밝히기 힘들다.(웃음) 남자인 것만 말하겠다. 내가 마치 그 시대를 살아낸 것처럼 감정이입해서 그를 표현하고 싶다. 지금도 난세인데 그 당시를 살아낸 사람의 내면은 어떨까. 그걸 내 시각으로 해석해보고 싶다.
최근 기쁜 일이나 인상적인 일은.
큰 아이가 13살이다. 처음으로 아이가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든 게 기쁘다.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가 12세 관람가다.(웃음) 또, 당연히 3년만에 관객들과 만나는 것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2016년 12월 29일 목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young@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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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김재윤 실장(Zstud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