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이지혜 기자]
일정이 빡빡해 보인다.
저녁 늦게까지 일정이 잡혀 있다(웃음).
연기 인생 26년 만에 <대배우>로 첫 원톱주연을 맡았다. 소감이 어떤가?
영화를 보기 전에는 관객들의 반응이 어떨지 걱정이 많았다. 언론 시사회 당일까지도 관객 반응을 걱정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관객들이 보기에 <대배우>가 크게 불편한 영화는 아닐 것 같더라. 어쩌면 편안하게, 오락영화처럼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결말의 페이소스만 잘 전달된다면 작품성에 있어서 나름의 성과를 거둘 수도 있다는 오만한 자신감도 생겼다(웃음). 그래서 이젠 마음이 편하다. 내 마음에 따라 영화가 달라질 것도 아니고(웃음).
그런가.
대낮부터 좀 그렇지만 함께 술을 마시면서 인터뷰 하자(웃음).
사진촬영도 있는데 술을 마시는 걸 보니 얼굴이 빨개지지 않는 타입인가 보다(웃음).
그런 건 아니지만 괜찮다. 분장을 하잖나(웃음).
어느덧 천 만 요정을 넘어서서 ‘억 소리 나는’ 요정이 됐다.
100% 운이다. 열심히 한다고 될 것 같으면 많은 배우들이 천 만 영화를 몇 개나 찍었겠지. 운이 좋아서 천 만 영화를 여러 편 찍을 수 있었던 거다. 운이 좋은 게 가장 어려운 거다. 물론 작품도 좋았지.
실제로 대학로의 연극배우들을 보면 그렇게까지 고생하며 사는 사람들은 드물다. 어쩌면 남루한 게 연극배우의 매력일 수 있다. 생활고를 버티면서 무대 위에 있는 모습들이 아름답지 않나. 극중 연극배우들이 너무 밝아 보이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실제로 연극배우들이 밝다. 물론 한 해 연봉이 천만 원 넘기기도 힘들다. 그래도 꿋꿋하고 신나게 연기한다.
당신은 거의 모든 박찬욱 감독의 작품에 출연할 정도로 박찬욱 감독과의 인연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혹자는 박찬욱 감독 없이는 오달수의 영화를 논할 수 없다고도 한다. ‘깐느 박’은 박찬욱 감독을 패러디한 건데 이 캐릭터를 봤을 때 느낌이 어땠나?
푸근하더라(웃음). <올드보이>를 촬영할 때 박찬욱 감독이 내게 애매모호하게 연기해 달라고 디렉션을 줬다. 어찌 보면 그야말로 굉장히 애매모호한 디렉션일 수 있다. 관념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고. 그런데 난 애매모호하게 연기해달라는 그 디렉션이 지금껏 받아 본 디렉션 중 가장 명쾌하다고 생각한다. ‘철웅’ 역의 캐릭터나 성격에 대해 헤매고 있다가 그 디렉션을 들으니 마음이 뻥 뚫리더라. 박 감독님과 내 호흡이 잘 맞는 것 같다. 항상 박 감독님은 그런 식으로 명쾌한 디렉션을 주신다. 이경영 선배가 박찬욱 감독의 푸근한 느낌을 살려서 참 좋았다.
배우 이경영의 깐느 박 캐릭터가 실제 박찬욱 감독과 닮았다는 건가?
이경영 선배와 박찬욱 감독은 개인적으로도 친하다고 한다. 친한 사이일수록 닮아간다고 하잖나. 이경영 선배는 일산, 박찬욱 감독은 파주에 살아서 예전부터 자주 연락했다더라. 그래서 이경영 선배가 박찬욱 감독 특유의 느낌을 알고 있던 게 아닐까. 싱크로율에 있어서 최고다(웃음).
<대배우>를 연출한 석민우 감독은 박찬욱 감독의 조감독 출신이다. 당신은 박찬욱 감독의 작품에 가장 많이 출연한 배우다. 친분이 있었을 것 같은데.
내가 기억하기로 석민우 감독은 박찬욱 감독의 모든 작품에 참여 했다. 조감독은 감독을 돕는 역할이기도 하지만 배우들을 챙기는 자리이기도 하다. 어떤 배우가 몇 시에 오고 가는지, 어떤 식으로 촬영을 하는지 가장 먼저 체크하는 게 조감독이다. 때문에 배우들의 취향같은 것을 조감독들이 가장 먼저 파악하는 것 같다. 그런 식으로 석민우 감독도 자연스레 나를 많이 알게 된 거겠지(웃음).
나도 엔딩 크레딧을 보고 깜짝 놀랐다. 감동 받았다. 2016년에 개봉할 영화 첫 시사회를 하면서 엔딩 크레딧에 오디션 장면을 삽입할 거란 말만 들은 상태였다. 그런데 엔딩 크레딧에 98년도에 내가 연극하던 영상이 뜰 줄이야! 까마득한 옛 시절로 다시 돌아간 것 같더라. 그 시절에 데려다준 게 무척 감사했다. 헌사까진 잘 모르겠지만(웃음).
<대배우>에 출연하겠다고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뭔가? 시나리오 집필 단계에서부터 석민우 감독이 당신을 주인공으로 생각하고 썼다는 말도 있는데.
글쎄, 나도 기사에서 읽은 거라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석민우 감독이 <대배우> 시나리오를 박찬욱 감독에게 보여줬다더라. 그러자 박찬욱 감독이 “이건 오달수가 하면 좋겠네”해서 내가 캐스팅 됐다는 이야기를 읽었다. 사실 석민우 감독과 개인적으로 약속하기도 했다. <박쥐> 촬영 당시에 석민우 감독이 지나가는 말처럼 “형님, 나중에 제가 영화 만들면 출연해주실 거죠”해서 내가 아무 조건 없이 출연해주기로 했다. 10년도 더 지났네(웃음). 한 달 전에 했던 약속은 취소할 수 있다. 그런데 아주 오래 전에 했던 약속은 그만큼 단단해져서 더 이상 깰 수 없는 약속이 되고 만다. 시간이 쌓이기 때문이다.
극중 설강식처럼 기억이 안 난다고 잡아떼지 그랬나(웃음).
그럴 걸 그랬네(웃음). 잡아뗀다는 생각은 미처 못했다(웃음). 그런데 원래 진지하게 한 말들은 기억 안 나도, 지나가면서 흘리듯이 하는 말들이 기억에 더 남잖나.
그렇다면 석민우 감독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 당신을 캐스팅 했겠다.
그렇지. 나를 목표로 캐스팅 한 거라면 아주 쉬웠을 거다. 심지어 나는 <대배우> 시나리오를 읽어보지도 않았다. 깨지지 않는 약속 때문에 출연한 거니까(웃음).
영화에서 “뒤도 좀 돌아보고 그래라”하는 대사가 나오잖나. 그 말을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진 않다. 개인적으로 “뒤도 좀 돌아보고 그래라”라는 말이 명대사처럼 느껴진다. 아마 그 이유는 내가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거다. 뒤를 돌아보며 사는 사람이 부러워서 그 대사가 마음에 남는 게 아닐까. 그래서 시간이 나면 고향인 부산 영도에 내려가 낚시를 한다. 낚시를 하면 과거를 돌아볼 수 있을 것 같아서다. 그런데 웬걸, 마음만 탁 트이더라(웃음).
나는 가족에 대한 메시지가 가장 크게 와 닿더라. 특히 아내의 핸드폰에 남편의 이름이 ‘대배우’로 뜨는 장면이 정말 뭉클했다. 영화의 주제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거다.
장성필이 깐느 박을 만나는 것이나 연극배우 출신이란 점이 오달수 개인의 삶과 연계된다. 연기하기 편했을 것 같은데.
그렇진 않다. 오히려 좀 곤혹스럽더라. 촬영할 때 자꾸 내 본모습이 튀어나왔다. 캐릭터란 옷을 걸치고 가면을 쓰면서 연기해야 하는데 갑자기 내 본모습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거다. <대배우>가 자기 이야기인데 뭐가 힘이 드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연기는 연기로 해야 한다. 또한 장성필은 즐거워 보이는 캐릭터지만 그 안에 아픔이 많은 사람이다. 그런 모습들에 얼핏, 너무 많이 공감돼서 내게 썩 편안하고 반가운 캐릭터는 아니었다.
대사를 하고 싶다는 후배에게 강의하는 장면이 특히 그런 것 같다. 오달수의 본모습이 불쑥 튀어나온 느낌이다.
그랬다(웃음). 그때 오달수가 튀어 나와서 나도 모르게 시나리오에 없는 말들을 마구 지껄이기 시작했다. 마치 무당이 신내림 받은 것처럼(웃음). 애드립을 너무 길게 한 나머지, 그 장면이 많이 편집됐다.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더라. 나중에 석민우 감독이 손익분기점을 넘기면 그 장면을 공개한다고 했다. 원칙대로 한다면 그 장면에서 끊고, 감독에게 이렇게 저렇게 애드립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 하느냐고 묻는 게 기본적인 예의다. 그런데 그런 예의를 지키지 않고 혼자 지껄인 거다(웃음). 문제는 정작 그 다음부터였다. 내가 뭐라고 했는지, 어떤 동작을 했는지도 모르겠더라. 테이크를 분절해서 촬영하다 보니 내가 내 행동에 맞춰 연기하기 위해 계속해서 모니터링을 해야 했다. “왜 이런 말을 했지, 왜 움직였지, 아 미치겠네” 싶더라. 많이 후회했다(웃음).
앞서 장성필을 연기하는 게 편하지만은 않았다고 했는데, 어떤 상황이 씁쓸했나.
예를 들면 무대 뒤에서 사고 당하는 장면. 연극에서는 배우들이 스텝 노릇도 해야 하기에 배우들이 사고를 당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심지어 내가 극단에서 활동할 때는 전기톱에 손가락이 잘린 친구도 봤다. 응급처치를 서두른 덕에 접합을 하긴 했지만 말이다. 물론 우리 모두의 인생사에 어떤 일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지만 연극은 모든 작업이 수공으로 이루어지기에 조금 더 위험한 측면이 있다. 포스터도 본인이 직접 붙여야 한다. 그러다 보면 서러울 때가 많지. 장성필을 연기하면서 연극단원 시절이 떠오르더라. 그렇지만 어차피 다 지난 일이다. 그동안 잘 겪어왔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삶에 있어 후회되는 부분은 있지만 연극에서만큼은 미련도, 후회도 없다.
물론 나도 그런 지적을 받아봤다. 스무 번 이상 테이크를 반복한 적은 없지만. 영화판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정말 아무 것도 몰랐다. 심지어 뭐가 잘못됐는지도 모를 때였다. 장음을 단음으로 발음하는 건 예사였다. 그럴 땐 감독이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했다. 완전히 바보 취급 받은 거지(웃음). 너무 낯설더라.
처음 카메라 앞에 섰던 기억을 말해 달라(웃음).
욕 먹은 기억밖에 없다. <해적, 디스코왕 되다>에서 처음으로 영화 단역을 맡았다. 당시 감독은 나이가 어려서 상당히 양반이었다. 반면 카메라 감독은 칠순 정도 되신 분이었다. 정말 열정적으로 찍으시더라. 그 분이 “야, 이 새끼야, 너 지금 카메라에 안 잡힌단 말이야”하면서 나를 혼냈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욕을 하시는 분들이 더 따뜻하다. 비록 욕은 하셔도 어디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 거기에 서 있어라, 다시 해 봐, 하면서 끊임없이 가르쳐 주셨다. 그렇게 욕을 얻어 먹으면서 배운 덕분인지 이젠 카메라 앵글에서 안 벗어난다(웃음).
그 모든 고난을 겪고 <대배우>의 주연을 맡았잖나. 주연 맛이 쏠쏠할 것 같은데.
쏠쏠하다기 보단 힘들더라(웃음). <대배우>만큼 열심히 연기한 작품이 있었나 싶다. 내가 원래 열심히 연기하는 스타일이 아니거든(웃음). 그런데 <대배우>는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감독이란 자리가 너무 외로워 보였다. 감독은 촬영 내내 현장을 혼자 이끌어 가야 한다. 그에게 힘을 보태며 밀어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주연배우뿐이다. 배우가 감독에게 기대듯 감독도 주연배우에게 기댈 때가 많거든.
많은 감독들이 배우 오달수를 사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글쎄(웃음). 사실 감독들은 모든 것을 통제하고 소품에서부터 시작해서 온갖 것을 검토해야 한다. 신경 쓸 것도, 스트레스도 많은 게 감독이다. 그나마 유일하게 같이 상의할 수 있는 건 주연배우 뿐이다.
박찬욱 감독이 “영화를 찍어놓고 허전해서 보니, 오달수가 없더라”고 말했다던데(웃음).
류승완 감독에게 전해 들었다. 박찬욱 감독이 그런 말을 했다더라(웃음).
김명민은 내 친분으로 섭외했다. “어, 그래, 형. 언제 가면 돼?”하면서 두 번 생각하지도 않더라. 원래 김명민은 낯을 많이 가려서 카메오 출연이나 우정 출연을 잘 하지 않는다. 정말 고맙더라. 이준익 감독과 유지태에게도 정말 감사하다. 원래 박찬욱 감독도 출연하기로 했었다. 나왔으면 대박이었을 것 같은데(웃음). 영화 첫 장면에서 어린애와 엄마가 연극을 보러 왔다 잠깐 화장실 가는 장면이었다. 그 장면에서 객석에 앉아 있는 남자로 출연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박찬욱 감독이 어른 혼자 들어와서 아동극을 본다는 설정이 작위적이라고 지적했다. 상황이 잘 맞지 않는다는 거다. 석민우 감독도 일리 있는 말이라고 생각해서 결국 박찬욱 감독의 출연은 불발되고 말았다. 역시 박찬욱 감독이지 않나(웃음). <아가씨> 촬영 일정 때문에 바쁘기도 했고.
성공한 배우로서 연극계 후배에게 한 마디 한다면?
영화나 드라마에 출연하는 게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라면 꾸준하게 버티는 수밖에 없다. 배우로서 자기가 이루고 싶은 게 있을 것 아닌가. 그 꿈을 위해 열심히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영화나 드라마도 하게 되고 입에 풀칠 정도는 하면서 살게 될 거다. 나는 지금껏 단 한 명의 배우도 배우 생활을 허투루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연극을 시작한지 10년, 20년이 되신 4, 50대 배우들도 하다못해 연기 아르바이트라도 하면서 연기를 지속하시더라. 20대, 30대 초반의 젊은 배우라면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연기를 했으면 좋겠다. 다른 것을 고민하기 시작하면 배우가 될 수 없다.
최근에 가장 행복했던 일은?
우리 딸이 드디어 중학교를 졸업한 것(웃음). 빨리 빨리 커준 게 정말 고맙다.
2016년 3월 30일 수요일 | 글_이지혜 기자 (wisdom@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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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이종훈 실장(ULTRA stud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