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마지막 인터뷰다. 가장 피곤할 때다(웃음).
드라마 ‘신사의 품격’ 이후로 공백기가 길었다. 무엇을 하며 지냈나?
영화 출연 결정은 빨리 했는데 촬영에 들어가기까지의 기간이 길었다. <나를 잊지 말아요>를 염두에 두면서 생각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빨리 촬영에 들어가길 기다렸다. 워낙 여행을 좋아해서 여행을 많이 다녔고 체력관리를 위해 운동도 열심히 했다.
어디로 여행을 다녀왔나?
하도 많이 다녀서(웃음). 사실 가까운 장소로 한 두 시간 떠나는 것도 나에겐 여행이다. 짧은 여행을 틈만 나면 다녔다.
<나를 잊지 말아요> 출연을 결정하고 촬영 기간까지 얼마나 걸렸던 건가?
1년을 꽉 채운 건 아니지만 해를 넘겼다.
아주 오랜만에 스크린에 복귀했다. 촬영 소감은?
마지막 영화가 <너는 펫>이었다. 아주 오랜만의 영화 촬영이라서 빨리 촬영하고 싶었다. 사실 공백기 없이 바로 다음 영화를 작업할 때와 오래 쉬다 작업할 때의 차이가 크다. 같은 영화 안에서조차 일주일 이상 대기하면 연기의 느낌이 달라진다. 그런데 공백기가 길어져서 촬영할 때 긴장되더라.
나도 놀랐다. 멜로영화에 많이 출연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오랜만이더라. 사실 20, 30대 초반의 여배우가 돋보일 수 있는 장르가 멜로영화다. 그런데 멜로영화 자체가 너무 적다. 그에 비해 로맨틱 코미디 장르는 시나리오가 많다. 그래서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 출연할 기회가 더 많았다. 더불어 드라마는 채널이 많다 보니 멜로 연기를 훨씬 많이 할 수 있었다.
정우성 씨가 김하늘 씨에게 대본만 주고 기다리던 중 김하늘 씨가 먼저 만나자고 연락했다던데.
<나를 잊지 말아요>에 출연하겠다고 얘기가 다 끝난 상황이었다. 당시에 정우성 씨는 <신의 한 수> 촬영 중이었다. 그러다 보니 촬영에 들어가기까지 오래 걸렸다. 난 빨리 만나 대본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었기에 먼저 연락했다.
‘진영’ 캐릭터의 어떤 점에 매료됐나?
‘진영’은 한 마디로 정의내리기 어려운 캐릭터다. 연약해 보이지만 상처를 품어줄 수 있을 만큼 강한 여자다. 외유내강한 성격이 매력적이었다. 너무 보호받지도, 너무 강하지도 않으면서 모든 것이 섞여 있는 느낌이다.
모성애 연기는 처음이다.
모성애 연기가 그렇게 어렵진 않았다. 그냥 여자들에게서는 모성애가 자연스럽게 배어나는 것 같다. 다만 연기자로서 이 감정을 표현력 있게 전달하는 게 관건이었다. 다행히 나는 한 동네에서 친척들과 같이 산다. 그러다 보니 이 친구가 크면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커서 또 아이를 낳는 식으로 계속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실생활에서 아이들과 살을 부비며 살아왔기에 아이들을 대하는 느낌이 자연스러웠다. 다만 엄마라고 불리는 건 당황스러워서 촬영하지 않을 때면 아역배우에게 ‘누나라고 해’ 하기도 했다(웃음)
결혼할 때가 돼서 자연스러웠던 건 아닐까?
그렇게 보는 분들도 계셨지만 난 워낙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환경에서 오래 살아서(웃음).
깊은 연기는 부담스럽다. 하지만 깊은 연기를 해냈을 때의 카타르시스가 크다. 내가 어디까지 표현할 수 있는지 나를 돌아보며 내 안의 감정을 끄집어내며 연기하는 게 좋다. 시나리오를 읽고 ‘진영’을 봤을 때 내가 잘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현장에서는 내가 잘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 때도 있었지만 감독님과 상의하면서 완성시켰다. 그런 과정들이 쌓이고 쌓인 완성본을 봤을 때는 영화 속 ‘진영’이가 좋았다.
극중 ‘진영’은 극으로 치닫는다. 한없이 사랑스럽고 애절하다가도 ‘석원’과 크게 다툰다. 감정의 분배가 필요했을 것 같다.
사실 싸우는 장면을 촬영하는 게 제일 어려웠다. 싸우는 연기를 둘 다 너무 못하더라. 싸우는 장면은 과거 회상신으로 잠깐잠깐 삽입되는 장면이다. 연기도 이유가 있고 감정이 쌓여야 편하다. 시종일관 자연스럽고 사랑하는 연기를 하다가 갑자기 싸우는 연기를 하려니까 연기 톤이 너무 세고 영화와 어울리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촬영 전 날까지도 정우성 씨와 만나 싸우는 연기도 해보고 대사도 많이 고쳤다. 그런데도 막상 촬영 현장에 가면 대본 리딩 할 때와 달라서 대사를 고쳐야 했다. 짤막한 신들을 촬영할 때가 더 오래 걸리고 우여곡절도 많았다.
정우성 씨는 오랜 연애를 한 경험이 있어서 사랑 끝의 쓴 맛을 알아 연기할 수 있었다던데.
(싸우는 연기를) 되게 못하던데(웃음). 나도 참 웃긴 게 ‘진영’에 너무 몰입해 있다 보니 이전까진 날 예뻐해 주고 사랑해주던 ‘석원’이 돌변하니까 너무 싫더라. 정말 싸울 때가 되니 ‘석원’의 나쁜 눈빛이 적응되지 않았다. 싸울 때의 모습이 너무 튀어 ‘석원’같지 않기도 했다. 그래서 정우성 씨에게 감정을 좀더 누르고 너무 세지 않게 연기했으면 좋겠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여러 가지 감정으로 연기했던 것 같다.
<나를 잊지 말아요>에서 정우성 씨는 배우 겸 제작자를 맡았다. 정우성 씨가 너무 바빠서 대화가 부족하진 않았나?
오히려 정우성 씨와 대화는 더 많이 했던 것 같다. 내가 표현을 많이 하기도 했다. 확실히 정우성 씨가 제작자 겸 배우이다 보니 신경 쓸 게 정말 많아 보이더라. 난 배우와 감독만 보면 되지만 정우성 씨는 배우 뿐만 아니라 스탭들과 시민들까지 챙겨야 했다. 촬영 현장의 쓰레기까지 걱정하시더라. 정우성 씨의 입장이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으론 온전히 연기만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난 그런 생각을 마음에 담아두기만 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래서 촬영 현장 분위기를 좀더 재밌게 해달라 말하기도 했다. 그러면 다음 날 바로 달라지더라. 배우가 제작자에게 투정부릴 일도 있지 않나. 여러 가지로 얘기할 일들이 많다 보니 금방 친해질 수 있었고 정우성 씨에 대해 더 많은 부분을 느낄 수 있었다.
정우성 씨의 멜로 영화들을 인상 깊게 봤다. 정우성만의 멜로 주인공 특유의 분위기, 색깔이 있어서 멜로 영화를 지루하지 않게 만든다. 그런데 막상 호흡을 맞춰보니 처음엔 나와 잘 맞지 않는 것 같았다. 정우성 씨는 선이 굵고 진하며 느낌이 강하다. 본인이 표현하는 느낌이 강해서 작은 신들조차 진한 이미지로 남긴다. 반면 나는 흐리지만 예민하고 세밀하다. 그러다 보니 강하고 진한 느낌이 나한텐 부담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끊임없이 소통하고 호흡을 맞추다 보니 지금은 호흡이 잘 맞다고 생각한다.
정우성 씨 눈빛은 정말 좋다.
처음에는 그 눈빛을 받을 수가 없었다. 가뜩이나 깊은 눈빛에 사랑까지 담아서 날 보니까(웃음). 또한 날 편하게 해 주시려고 노력했다. 금방 적응되더라.
기자 간담회에서도, 인터뷰에서도 상의를 많이 했다고 말했다.
출연을 결정하고 촬영 들어가기까지 오래 걸렸다 했잖나. 그러다 보니 감독님과 자주 만나고 자주 통화했다. 원래 내가 그런 스타일이 아니지만 이번 영화는 그래야 하는 영화였다. 열려 있는 시나리오였다. 그래서 신들의 상황이나 대사를 바꾸는 경우도 많았다. 욕조신 같은 경우는 정우성 씨와 감독님이 생각해서 새로 만든 신이다. 난 되게 많이 거부했었지만(웃음).
가장 많이 상의한 부분은?
원래 대본 상에서는 ‘진영’이가 너무 많이 울었다. 자동차로 곰돌이를 치는 신에서도 그렇고. 이 장면은 관객들이 이해할 수 없는 ‘진영’이만의 장면이다. 관객들이 이해하고 나도 이해하는 장면에서 오랫동안 우는 거라면 공감할 수 있지만 너무 울어버리면 캐릭터가 이상해 보일 것 같았다. 그래서 우는 대사나 상황들의 길이를 많이 줄이고 대사도 자연스럽게 다듬었다. 자연스럽게 상황을 바꾸려는 노력을 많이 했다. 사실 감독님은 ‘진영’이에 대해 좀더 캐릭터적으로 다가가신 것 같았다. 난 ‘진영’이를 연기하는 입장으로서 ‘진영’이가 좀더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노력해야 했다. 다행히 중, 후반에서는 모든 것들이 이해될 수 있게 편집이 잘 돼서 전체적으로 좋아 보였다.
‘진영’이가 되게 불쌍했다. 하지만 ‘진영’이한테는 선택권이 없었던 느낌이다. ‘석원’이 밉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하고 그에게 배신감도 느끼지만 결국은 사랑이다. 우리 영화가 너무 사랑이다(웃음). 가끔은 이렇게도 생각해 봤다. 만약에 ‘진영’이가 기억을 잃었다면 ‘석원’이는 어떻게 했을까 라는. ‘석원’이도 ‘진영’이를 보듬었을 거란 결론을 내렸다. 그런 믿음 안에서 연기를 했다. 또 ‘진영’이와 ‘석원’의 관계에서 희망을 봤다. 기억을 잃고 다시 만나는 과정들이 둘에게 상처가 아무는 과정일 거라고 생각도 했다. 만일 기억을 잃는 상황들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됐다면 진영이도 미쳤겠지. ‘진영’이를 연기함과 동시에 보듬어준다는 느낌으로 접근했다. 여자 관객 분들도 ‘진영’이를 보듬어 주는 마음으로 영화를 봐주셨으면 좋겠다.
결국 운명적인 사랑을 말한 건가?
그냥 남녀, 단 둘만의 문제였다면 ‘진영’이와 ‘석원’이 돌아 설 수도 있었을 거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는 아이가 있다. 아이가 생기는 순간 남녀관계는 달라진다. 둘에게 아이가 생겼고 그 아이로 인한 상처를 위로할 사람은 오직 상대방밖에 없다. 서로의 감정을 서로가 책임져야 한다. 연기하면서 ‘석원’이 미웠다(웃음). ‘석원’ 뿐만 아니라 정우성 씨가 미웠다. 정우성 씨는 그냥 계속 멍하게 편안히 있으면 되니까(웃음). 나 혼자 정말 많은 생각을 하면서 어려운 연기를 하려니까 힘들더라.
<이터널 선샤인>과도 비슷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 이런 느낌이랄까.
딱 그런 느낌으로 연기했다.
‘김하늘만이 빛낼 수 있는 배역’이란 칭찬을 들었을 때 희열을 느낀다 했다. 멜로 영화에서 김하늘만이 낼 수 있는 빛깔은 무엇일까?
비단 멜로 뿐 아니라 어떤 캐릭터든 자연스러운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반 댓글, 영화 후기 댓글, 주변 분들의 얘기 중 ‘김하늘이 눈물 흘릴 때 진심으로 슬펐다’는 말이 제일 좋다. 나도 연기를 할 때 내가 감정이입이 안 되거나 캐릭터의 감정이 이해되지 않으면 눈물을 흘릴 수가 없다. 대본에는 눈물 흘린다고 나와 있다 할지라도 그냥 눈물을 살짝 비치고 말던가 다른 식으로 해석해서 연기한다. 내가 눈물 흘릴 때는 정말 그 배역에 몰입해서, 캐릭터의 감정 안에서 눈물을 흘리는 거다. 내 나름대로 내가 진심으로 감정에 빠져서 눈물 흘리니까 관객들도 공감해 주시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멜로가 내게는 정말 어려운 영화다.
기자 간담회에서 정우성 씨가 ‘이건 김하늘의 영화다’라고 말했다. 극찬 아닌가(웃음)?
그래서 약간 부담스러운 느낌도 있다. ‘흥행 안 되면 나 때문이라 하려고 그러죠?’했더니 흥행이 잘 되지 않으면 자기 때문이라고 할 거라더라(웃음).
당연한 것 같다. 당장 한 신을 어제 찍었을 때와 오늘 찍었을 때가 미묘하게 다르다. 실내에서 찍는지 야외에서 찍는지, 더울 때 찍었는지 추울 때 찍었는지도 다 다르다. 그런데 시간이 이렇게 흘렀으면 얼마나 큰 차이가 있겠나. 배우들은 정말 많은 환경들을 계속 경험하며 시간을 보낸다. 환경 변화 안에서의 많은 것들이 내 안에 담기게 되고 그러다 보니 연기에 있어서도 많은 게 달라진 것 같다.
어떤 부분이 가장 많이 달라졌나.
깊이라고 말하기엔 좀 그렇고. 예를 들어 ‘만일 내가 5년 전에 이 작품을 만났더라면 선뜻 할 수 있었을까? 그때 내가 이 역을 자신 있게 할 수 있다 말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연기의 스펙트럼이 넓어졌다는 말인 것 같다.
내가 연기하면서 경험한 것들이나 캐릭터를 만나면서 바뀐 것들이 쌓여서 다른 역을 손에 잡을 수 있게 됐다는 느낌이 든다. 난 도전, 파격, 변신 같은 단어들을 부담스러워 하고 무서워하는 편이다. 그런데 내 안에 여러 가지가 쌓이고, 이것들이 펼쳐지고 넓어지면서 욕심도 더 많이 생겼다. 표현 방법도 더 많이 배우는 것 같고. 많은 배우들이 그러지 않나.
평소 과거를 잘 기억하는 편인가?
정말 잘 기억하고 싶은데 기억력이 좋지 않다. 친구들과 얘기할 때도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을 친구들이 말해주곤 한다. 난 현재에 집중하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과거 작품에 대해 물으면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웃음).
가장 최근에 있었던 즐거운 일은 뭔가?
즐거운 일(웃음)? 고된 노동으로 인해 약간 멘붕이다. 어제 뭐가 있었더라. 예매율이 자꾸 올라간다는 즐거움(웃음)?
2016년 1월 14일 목요일 | 글_이지혜 기자 (wisdom@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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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김재윤 실장(ULTRA stud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