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이 넘어서는 일을 순서대로 하겠다고 생각했어요. 작품이 나를 찾아오는 순서대로요. 열정이 많은 편은 아니에요. 하지만 나에게 주어지는 작품은 순서대로 책임감을 가지고 하겠다고 생각했어요. 나이가 많이 들어서 한 번에 두 작품을 하지는 못하거든요. <장수상회>는 나를 찾아온 다음 순서의 작품이에요.
그래도 작품에 매력을 느끼지 않았다면 출연하지 않았을 텐데요.
전작들과 비슷한 역할이었다면 출연하지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금님은 달랐기 때문에 해보고 싶었어요.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으려면 자꾸 다른 걸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배우가 변신했다고 하면 어렵게 생각하고 ‘안경을 쓴다’ ‘점을 찍는다’처럼 여러 가지 변화를 읽으려 하는데,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에요. 나는 나잖아요. 똑같은 목소리에 똑같은 얼굴로 식상하지 않은 연기를 하려면 가장 빠르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전에 하지 않았던 역할을 하는 거예요. 내가 굉장히 실용주의적인 사람이에요(웃음).
<장수상회>는 상업영화에서 쉽게 다뤄지지 않는 노년층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에요. 주연배우로서 영화를 보는 시선이 남다를 것 같아요.
고령화시대가 됐는데 방년 69세인 내 친구들이 영화를 보기 시작하더라고요. 나보다 더 많이 보는 것 같아요. 갑자기 왜 그렇게 영화를 보기 시작했냐고 물었더니 할 일도 없고 손주도 이제는 다 컸다고 그러더라고요. 영화관에 가는 것이 가장 돈이 적게 들고, 남의 인생을 보는 것이 재밌어서 영화 보는 것을 즐긴대요. 그래서 우리나라에도 노년층을 위한 영화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장수상회>를 만나게 된 거예요. 그런데 영화가 공감이 잘 돼야 흥행할 수 있을 것 아니에요. <장수상회>가 사람들에게 많은 공감을 불러 일으켜서 다른 세대까지 아우를 수 있는 영화가 됐으면 좋겠어요. ‘아우른다’는 단어를 참 싫어하는데 이럴 때는 쓰게 되는군요(웃음).
주연인 만큼 책임감도 클 것 같아요.
영화에 돈을 투자 한 사람, 노동을 투자한 사람, 영화를 위해 노력한 모든 사람을 위해서 손익분기점만 넘겼으면 좋겠어요. 매번 영화를 할 때마다 손익분기점을 넘겨서 참여한 모든 사람이 다음번에도 일을 할 수 있으면 그걸로 된다고 생각해요. 굉장히 실용적인 사람이에요. 우습게 들리지도 모르지만, 사람들이 다음 일을 할 수 있다는 건 굉장히 좋은 일이에요. 나를 찾는 사람이 또 있다는 건 영광이고 기쁨이잖아요. 저 여자는 아니야, 이러면서 나를 찾는 사람이 없다면 기분이 어떻겠어요. 사회에서 살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하는데 찾는 회사가 없을 때 느끼는 감정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래서 매번 손익분기점만 넘기길 바라지 그 이상의 헛된 꿈을 꾸지는 않아요.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영화가 개봉할 때 5백만, 천만을 기대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런 흥행은 어쩌다가 로또 당첨되는 것 같은 일이지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손익분기점만 넘겨서 다른 사람이 또 <장수상회>같은 영화를 만들 수 있다면 좋은 일이죠.
내 또래 친구들은 아직 영화를 안 봐서 못 물어봤어요. 단지 69세인 내가 아는 설렘이란 잘 모르는 관계에서 서로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할 때 생기는 거라는 거예요. 누군가를 만날 때 처음 만난 사람, 두 번째 만난 사람에게 느끼는 감정이 또 다르잖아요. 그래서 시나리오를 읽으면서도 성칠과 금님의 관계를 남녀관계라고 분석하지 않았어요. 성칠은 앞집에 이사 온 처음 보는 여자가 만나자고 하니 당연히 예의를 갖춰 잘 만나고 싶은 설렘이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20대의 설렘이나 70대의 설렘이나 그 모습은 똑같겠죠. 처음 만난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마음가짐과 태도는 나이와 상관없을 것 같아요. 금님을 연기할 때는 금님이 성칠과 살면서 평생 그런 연애를 못해봤을 테고 사느라고 바빴을 거라 생각했어요. 아이를 낳고 장수상회에서 시작해서 한창 장수마트를 일구어 나갈 무렵에 영화 속 일이 벌어졌을 테니까요. 그래서 시나리오를 읽으면서는 금님이 성칠과 이런 것을 해 봤으면 좋겠다, 저런 것을 해 봤으면 좋겠다, 판타지를 가졌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금님과 성칠의 10대 시절 풋풋했던 이야기가 영화 앞뒤로 제시되어 있어 노년의 사랑이 더 잘 표현된 것 같아요.
그 장면이 가장 예뻤어요. 강제규 감독이 시나리오를 고친 부분 중에서 금님과 성칠의 10대 시절 모습에 가장 감동 받았어요. 처음에는 그런 장면이 없었거든요. 박근형 선생님 역할을 연기한 배우는 정말 잘생기고 예쁘더라고요(웃음).
성칠이 금님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 어색한 행동들을 할 때 금님이 성칠을 바라보는 눈빛에서 윤여정만의 색이 묻어났어요. 지고지순한 듯 보이지만 여전히 자기 목소리를 가진 강한 여성이요. 캐릭터도 훨씬 입체적으로 느껴졌고요.
금님은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입장이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어요. 성칠은 금님을 모르지만 금님은 성칠이 누구인지 알기 때문에 그 사람이 평소에는 안하던 행동을 하고 있다는 걸 알잖아요. 그래서 금님은 성격적인 면을 떠나서 그런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었어요. 금님이 성칠을 지켜볼 때 얼마나 많은 감정이 교차했겠어요. 사실 그런 부분이 시사를 하고 나서 속이 뒤집어진 부분이에요. 금님이 영화 속 상황을 모두 안다는 설정을 염두에 두고 금님을 연기했는데 영화를 볼 때는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보여서 놀랐어요.
촬영할 때 금님은 알고 있는 상황을 관객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연기하는 것이 힘들었을 것 같아요.
그 부분을 알아주다니 고마워요(웃음). 영화 속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금님의 모습을 많이 연기했거든요. 그런데 제작진이 작전 때문인지는 몰라도 편집에서 그런 장면을 많이 잘라냈더라고요. 그래서 근 며칠 사이에 강제규 감독의 목을 조르고 있어요(웃음).
금님이 성칠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애잔함이 묻어나 둘의 관계가 어색해 보이지 않았어요.
그런 감정이 느껴졌다면 다행이에요. 그 장면을 촬영할 때 금님이 느끼는 많은 감정을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런 복잡한 감정을 표현한 부분이 많이 편집됐어요.
시사가 끝난 후 강제규 감독과 타협점을 찾았나요?
만들어냈어요. 왜냐하면 금님이 상황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영화 속에서 1, 2초라도 암시를 해줘야지 이대로라면 내가 연기를 하다만 것이 되잖아요. 강제규 감독은 너무 유능한 사람이라 박근형 선생님의 연기가 빛난 건 윤여정의 연기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긴 문자로 나를 설득시키더라고요. <장수상회>는 박근형 선생님이 주인공인 영화이기 때문에 박근형 선생님이 더 돋보이는 건 괜찮지만 나도 면피는 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대답했어요(웃음). 강제규 감독은 관객이 성칠의 사정을 눈치챌까봐 지금처럼 편집했다고 하는데 그건 관객 입장이고 나는 내 입장이 또 있는 거잖아요(웃음). 1초라도 어떻게 상황을 암시해 달라고 말해서 강제규 감독이 지금 많이 애쓰고 있나 봐요.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지고지순한 역할이 훨씬 편해요. 가만히 있으면 되니까요. 그런데 사람마다 숨겨진 많은 모습이 있잖아요. 나에게도 여러 가지 면이 있겠죠. 배우는 감독이 역할을 통해 뽑아내는 자신의 다양한 모습을 쫓아가 몰입할 수 있어서 재밌는 일인 것 같아요. 그래서 힘든 작업인 것 같기도 하고요. 누구나 어느 시기가 지나면 일에 회의를 느낄 때가 있잖아요. 철이 들면 들수록 대사만 외워서 NG 안내면 연기를 잘하는 거라고 생각한 멋모르던 시절이 그립고 좋아요. 지금은 고민되는 지점들이 생겼거든요. 많은 역할을 연기했고 이미지가 굳어진 부분도 있기 때문에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으려면 기존의 이미지를 깨고 달라질 수 있는 연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고민하게 된 것이 기특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해요. 철없이 멋모르고 연기했을 때가 좋았죠.
<장수상회>에서 본인의 모습은 만족스러운가요?
스스로 만족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박근형 선생님을 보면서는 만족스러웠어요. 칭찬을 아름답게 못하는 편인데 영화를 보고나서 박근형 선생님에게 남우주연상을 노려봐도 되겠다고 말했어요. <장수상회>에서 강제규 감독이 박근형 선생님의 모든 정수를 뽑아낸 것 같아요.
그럼 본인의 정수를 뽑아낸 작품은 무엇인가요?
<화녀>인 것 같아요. 당시는 철이 없어서 잘 몰랐기 때문에 김기영 감독님에게 감사하다는 표현을 잘 못했어요. 너무 어렸고 감독님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요(웃음). 돌아가시기 전에 감사하다고 이야기했어야 하는데 너무 미안해요. 김기영 감독님은 내가 만난 남자 중에 가장 머리가 좋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너무 고생시키면서 골리니까 당시에는 많이 싫어했어요. 김기영 감독님은 굉장한 기인이면서 천재였어요.
자신만의 색깔을 가진 감독들과 많은 작업을 했어요.
김기영 감독님은 정말 우연히 만나서 스카우트된 거였어요. 지금도 이상한 것이 그때의 나는 TV에서 요즘 배우로 말하면 김희선 같이 굉장히 재기발랄한 존재였거든요. 그래서 김기영 감독에게 왜 나를 <화녀>에 캐스팅했냐고 물었더니 첫 마디가 청승맞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그 말이 지금도 너무 이상해요. 그런데 요즘은 가끔 TV에 나온 내 모습을 보면 청승맞은 부분을 발견할 때가 있어요(웃음). 그럴 때면 김기영 감독님이 그 옛날에 이미 나의 이런 모습을 봤나, 싶어서 신기해요.
다시 작업하고 싶은 감독이 있나요?
특별히 염두에 둔 감독은 없어요.
함께 작업했던 감독들과 호흡이 좋은 편이잖아요.
알겠지만 내가 까칠하지가 않답니다(웃음). 함께 일할 감독이 정해지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려고 애를 써요. 그래서 특별히 더 선호하는 감독이 따로 있는 건 아니에요. 글쎄요. 임상수 감독은 나를 너무 잘 알아서 나를 어떻게 다뤄야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같이 작업하는 것이 편하죠. 내가 몇 번째 테이크에서 가장 좋은 테이크가 나온다는 것까지 알고 있으니까요. 그런 감독하고 일하면 좋아요.
전에는 홍상수 감독 영화를 별로 안 좋아했어요.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의 영화가 건강해져서 좋았어요. 홍상수 감독에게 찌질한 남자가 여자 꾀는 이야기도 한 두 번이지 그만하라고, 조금 나이든 이야기를 해보면 어떻겠냐고 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싫다고 그러더라고요(웃음). 본인이 싫다고 그러는데 뭐라 그러겠어요. 홍상수 감독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어요. 이 세상의 어떤 감독이 대중과 소통하고 싶지 않겠어요. 대중과 소통한다는 건 흥행한다는 이야기잖아요. <해변의 여인>에서 고현정을 캐스팅해 흥행에 도전해보려고 했겠죠. 그런데 실패하면서 홍상수 감독은 자기 길을 확실히 정한 것 같아요. 그런데 그 포기라는 것이 굉장히 훌륭한 거예요. 뭐든 끝까지 해보려고 하지 쉽게 포기를 못하잖아요. 그런데 홍상수 감독은 흥행 욕심을 버리고 저예산영화를 목표로 우리 같은 배우들을 100만원에 데려다 쓰고 그러잖아요. 배우들도 홍상수 감독이 하자 그러면 또 연기하고요. 그건 홍상수 감독의 힘이에요. 그런 감독이 있어야죠.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나 같은 배우도 있어야 되고, 또 다른 배우도 있어야 되듯, 홍상수 감독은 자기만의 길을 가는 거예요. 그런 점에서 홍상수 감독에게 정말 박수를 보내고 싶어요.
전에는 김수현 작가의 작품에 많이 출연했어요.
그분은 아무도 나를 써주지 않던 시절부터 나를 인정해줬던 분이에요. 그 당시 이혼한 여자는 TV에 쉽게 나올 수 없었어요. 그래서 막강한 힘을 가진 누군가가 이 배우 아니면 안 된다고 힘을 쓰기 전까지는 아무데도 나올 수가 없었어요. 김수현 작가는 그런 날 캐스팅해 준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정말 보은해야 하는 사람이죠. 그래서 많은 작품을 함께 했죠.
박근형 선생님이 칭찬을 많이 했어요.
또 무슨 칭찬까지 하셨대요(웃음).
어린 시절부터 명석하고 총명했다고요. 윤여정 같은 배우가 서너 명만 있으면 한국 중년 배우의 판도가 바뀔 거라고 말했어요.
심하셨네요(웃음). 막걸리를 마셨나? (웃음) 처음 박근형 선생님을 만났을 때 연극계에서 정말 유명한 배우였어요. 그때는 TV가 활성화되지 않았던 시절이에요. 박근형 선생님은 키도 큰 미남 배우인 데다가 연기도 잘하는 매우 출중한 배우였어요. ‘추적자’같은 연기는 일도 아니게 잘했던 사람이에요. 감성이 풍부하고 배우다운 면이 많았던 사람이었어요. 사실 박근형 선생님은 실력에 비해 누린 것이 많이 없는 사람이에요. 세상에는 박근형 선생님보다 대중적으로 더 잘 알려진 사람이 많잖아요. 50살이 넘어서 언젠가 박근형 선생님에게 훨씬 더 많은 인기를 누리지 못한 게 분하지 않느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자존심은 있는지 분한 건 없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어렸을 때는 박근형 선생님을 안 좋아했어요. 왜냐하면 ‘장희빈’에서 내가 장희빈을 연기하고 박근형 선생님이 숙종을 연기했는데 자꾸 지적을 했어요. 박근형 선생님은 선배인데다가 연기도 굉장히 잘 하는 배우였으니까요. 그런데 박근형 선생님이 지적을 하고 나면 신경이 쓰여서 촬영할 때 꼭 그 부분에서 NG가 나는 거예요. 그래서 드라마 ‘꼭지’를 촬영할 때는 나는 박근형 선생님처럼 빼어난 연기자가 아니니 지적하는 대신 내 눈을 보면서 연기해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렇게밖에 몰입할 길이 없다고 좀 도와달라고 한 거죠. 그랬더니 알았다고 말해놓고 내가 세트장에 등장할 때 ‘여기 정식으로 연기하시는 분 들어오신다’며 놀리더라고요(웃음). 그런데 배우라는 직업은 정말 좋은 직업인 것 같아요. 반세기 가까운 시간동안 서로를 봐왔으니 서로의 장단점을 얼마나 많이 알겠어요.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어느 시점에 부딪혀서 헤어지는 경우도 생기잖아요. 그런데 배우는 오랫동안 함께한 역사가 쌓이니 상대방을 이해하고 인정해 줄 수 있는 부분이 생기는 것 같아요. <장수상회>를 촬영하면서 다시 만날 때까지 같은 분야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이 굉장히 감사한 일이라고 또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배우라는 직업이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 같나요?
이제 인생을 돌이켜 볼 나이가 됐잖아요. 박근형 선생님 같은 분들은 연극영화과 출신인데다 배우가 되기로 작정한 사람들이지만, 저는 그런 목적이 없었어요. 요즘도 TV에서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배우가 되고 싶었다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놀라요. 나는 중학교 졸업하면 고등학교 붙겠다는 것이 목적이었지 무엇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우연히 아르바이트처럼 시작한 일이 계속돼서 배우가 됐기 때문에 열등의식 같은 것이 있었어요. 하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배우를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인생이라는 건 정말 놀라움의 연속이죠. 지금은 배우라는 직업이 인생에 영향을 끼친다기보다 그냥 윤여정이라고 하면 배우라는 것이 떠오르잖아요. 계획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됐어요. 불만은 없어요. 정말 영광이에요. 전에는 배우가 영광스러운 직업이 아니었거든요. 오히려 딴따라라고 불리면서 무시당했죠. 그런데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배우를 하고 싶어 하고 존경하고 부러워하는 것까지 보고 죽게 돼서 영광이에요(웃음).
그런 것도 있어요. ‘뉴스룸’에서는 손석희가 김태희 같은 미녀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오래 연기할 수 있었냐고 질문했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한 거예요. 정말 어떻게 묻느냐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지니 법정에 서면 난리 나겠어요(웃음). 그런데 분명 다른 사람의 생각을 뒤집고 싶었던 마음은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 이 나이까지 배우를 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내가 굉장히 많은 것을 누렸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아요. 세상에 아프지 않고 아쉽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겠어요. 정말 아픈 세월을 많이 겪었어요. 세 번째, 네 번째로 캐스팅됐다는 걸 알면서 연기했어요. 그런 제안이 들어왔을 때 들었던 생각은 감독이 첫 번째로 캐스팅하려고 했던 배우보다 연기를 더 잘해서 처음부터 나를 선택하지 않았던 걸 후회하게 해주겠다는 거였어요. 그런데 미모나 목소리로는 승부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남들과 달라져야 했어요. 다르다는 것이 중요했어요. 모두 똑같으면 왜 내가 필요하겠어요. 어떻게 해서든 감독이 윤여정을 캐스팅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만들고 싶었어요. 감독도 자신이 캐스팅하고 싶었던 배우가 있을 텐데 밀리고 밀려서 다른 배우를 캐스팅했을 때는 기존에 생각했던 배우의 잔상이 남아 있을 거란 말이에요. 첫 번째 선택이 아닌 여배우는 연기를 못한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70%일 거예요. 그런 생각을 엎으려면 많은 노력을 해야 돼요. 그 싸움의 연속이었던 것 같아요. 많은 배우들이 두 번째, 세 번째 캐스팅됐다는 사실을 꺼려하는데 난 그런 것이 하나도 두렵지 않았어요. 인생은 복불복이잖아요. 해낸 사람이 장땡이에요(웃음). <바람난 가족>에서도 세 번째 캐스팅이었지만 상관없었어요. 결과가 중요하죠. 그렇게 또 임상수 감독을 만났고요. 임상수 감독은 두 번째 캐스팅이라고 날 속였지만요(웃음). 인생이라는 게 그만큼 상식적인 거예요. 인생에서는 몇 번째라는 순서가 아무 상관없어요. 내가 훨씬 더 연기를 잘해서 상대방의 사고방식을 엎을 수 있으면 되잖아요. 또 못 엎으면 어때요. 시도한다고 손해는 아니잖아요. 안하고 나서 후회하면 뭐해요.
타인의 편견을 깨보고 싶었던 거군요.
정확히는 타인의 시선을 깨보고 싶었다기보다 일에 대한 책임감이었던 것 같아요. 감독이 가장 캐스팅하고 싶었던 배우 대신 나를 캐스팅했을 때, 감독의 머릿속에서 어쩔 수 없이 나에게 역할을 맡긴 거라는 느낌을 지워버리고 싶었어요. 감독의 생각을 이겨보고 싶었고, 다른 배우가 아닌 윤여정을 써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고 싶었어요. 타인의 시선을 중요하게 생각한 건 아니에요. 타인의 시선은 두렵지 않거든요. 하지만 연기는 내가 맡은 일이고, 내가 해내야 하는 역할 만큼은 확실하게 해내고 싶었어요.
오랜 연기 생활만큼 매너리즘에 빠진 경험도 있을 것 같아요. 언제 매너리즘에 빠졌고 어떻게 극복했나요?스스로 매너리즘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본인은 본인을 잘 모르잖아요. 오죽하면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말했겠어요. 자신을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가장 힘들었던 건 오랜만에 현장에 다시 나가서 연기를 했을 때에요. 연기할 때 내 목소리가 직접 들리더라고요. 이렇게 연기하면 안 된다는 건 알았지만 어떻게 해야 좋을지 방법을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무조건 많이 연습했어요. 수학 공식처럼 대사를 단순하게 외울 수도 있겠죠. 하지만 대사를 모두 외운 다음에도 대본을 계속해서 들여다보면 그 속에 다른 많은 것들이 있더라고요. 대사를 여기서 띄어 읽어도 되고, 저기서 띄어 읽어도 되고, 아니면 여기서는 붙여 읽어도 되고요. 그러면서 대사를 다양하게 전달하는 방법을 알게 되는 거죠. 그리고 블로킹 연습을 많이 했어요. 예를 들어 다림질하는 장면이 있으면 집에서 다림질을 하면서 대사 연습을 했어요. 브로드웨이에 관련된 명언이 있는데 ‘브로드웨이에 어떻게 갑니까?’라는 질문의 대답은 ‘연습’이라는 거예요. 내 경우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실제로 그렇더라고요. 배우가 빛날 때가 있어요. 예뻐서 빛나고, 트렌드가 맞아서 빛나고, 누구에게나 가장 빛나는 시절이 있어요. 하지만 그런 시기를 유지하는 건 연습인 것 같아요. 빼어난 감성도, 빼어난 아름다움도 언젠가는 모두 빛을 다하잖아요. 인생은 해가 떠오르고 지는 석양처럼 지나가요. 인생이 저물어갈 때 각자 해야 하는 부분이 다르겠지만, 내가 해야 하는 부분은 연습이라고 생각했어요. 한번은 수도 없이 연습하는 걸 누가 보고 이화여고 나온 아이가 무슨 대본을 또 보냐며 놀리더라고요. 그런데 대본은 볼수록 되새김이 되더라고요. 많은 사람들이 대사를 열 번만 읽어서 똑같은 곳에서 호흡을 끊어 전달을 해요. 그런데 나도 그렇게 연기하면 남들과 똑같은 배우가 될 뿐이잖아요. 하지만 다른 사람이 대본을 열 번 볼 때 대본을 백 번 보면서 연습하면 문장을 아무데서나 띄어 읽어도 의미가 전달이 되거든요. 연기에 룰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니니까요. 만일 연습을 통해 그렇게 연기할 수 있다면 그건 다른 배우가 하는 연기와는 다른 연기가 되잖아요. 그런 연기를 하려고 했어요.
잘하는 애들만 부럽지 아무나 부럽지는 않아요(웃음). 김수현 같은 배우를 보고는 정말 놀랐죠. 김수현은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에서 아역으로 나왔을 때 처음 봤어요. 그때는 김수현이 누군지 모르고 봤는데 연기를 참 잘하더라고요. 사람마다 잘한다는 기준이 다를 수 있는데 내 기준에는 좋아보였어요. ‘드림하이’는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김수현은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그래서 이재용 감독에게 그 아이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눈은 있다면서 요즘 떠오르는 블루칩이라고 하더라고요. 하여튼 이재용 감독처럼 나에게 면박 주는 사람이 없어요(웃음). ‘해를 품은 달’은 김수현이 연기를 너무 잘해서 그 아이 때문에 봤어요. 김수현 같이 탁월하게 연기 잘하는 배우를 보면 참 경이롭고 부럽죠. 그래서 김수현이 잘 풀려서 인기를 누릴 때 큰 박수를 보내줬어요. 그래도 세상은 참 공평하지 않으면서도 공평한데가 있구나 싶더라고요. 그래서 김수현을 본 적은 없지만 응원하고 싶더라고요.
김수현 연기의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었나요?
연기라는 게 글로 쓰인 것도 아니고 특정 공식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김수현 연기를 보고 놀라서 그 아이가 몇 살인지 알아봤더니 아직 군대도 안 갔다 온 이십대더라고요. 그 나이에 그렇게 많은 디테일한 부분을 챙겨서 표현한다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에요. 그리고 사극 같은 경우는 늙은이에게는 쉬울 수 있지만 젊은 친구들이 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부분이 있어요. 사극의 고루한 부분을 표현해야하니까요. 그런데 김수현은 그런 부분을 적당하게 조절해서 잘 표현하더라고요. 그냥 내 맘에 들었다고요(웃음). 대중 예술이라는 것이 내 맘에 들면 좋고 내 맘에 안 들면 싫은 거잖아요. 정답이 있는 거면 얼마나 좋겠어요(웃음).
윤여정을 롤모델로 삼는 현역 여배우들도 많아요. 좋은 배우로 살아남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몰라요. 각자 노력해야하는 부분이 다르겠죠. 롤모델이라는 것이 싫어요. 롤모델이라는 것은 내가 그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이야기인데 세상은 똑같은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아요. 비슷한 사람보다는 다른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단순히 어떤 사람이 부럽다, 저 사람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은 할 수 있겠지만 그 사람의 연기를 닮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건 별로인 것 같아요. 전도연이 언젠가 ‘선생님, 나는 롤 모델이 없어’라고 이야기했는데 그 부분이 마음에 들어 박수를 보냈어요. 전도연은 아마 롤모델이 없기 때문에 연기를 잘 할 수 있을 거예요. 도덕 시간도 아닌데 유관순 누나를 좋아한다고 해서 유관순 누나처럼 살 수는 없잖아요. 롤모델이라는 건 인터뷰에서 이야기한 내용이 극화되는 것뿐인 것 같아요. 나도 롤모델이 없어요. 아, 있어요! 부잣집 사모님이면 좋겠어요(웃음).
2015년 4월 8일 수요일 | 글_최정인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