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모습과 목소리가 나오면 창피하고 쑥스러워서 영화를 잘 못 봐요. 시사회 전날 새벽에 이해준 감독님한테 문자가 왔어요. 몸은 천근만근인데 잠이 안온다고 그러더라고요. 잘 자고 있었는데 감독님 문자를 보니까 긴장이 확 됐어요(웃음). 시사회 끝나고는 어딘가 허전했어요. 대기실에서 나, 해일이, 이해준 감독님 모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따로 앉아 대화도 없이 조용히 있었어요. 기분이 다들 비슷했나 봐요. 무슨 기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공허했어요.
언론시사 전에 긴장을 많이 하는 편인가요?
긴장을 많이 해요. 특히 <나의 독재자>는 기술시사를 안했기 때문에 영화를 미리 본 사람이 없었거든요. 평소에는 제가 영화를 못 보더라도 기술시사를 본 사람에게 영화가 어땠는지 물어볼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영화를 본 사람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더 궁금하기도 하고 긴장됐죠. 언론시사로 <나의 독재자>를 처음 봤는데 보고 나니까 피곤이 몰려오더라고요. 너무 힘주고 봤나 봐요(웃음). 어휴, 진짜 그날은 조금 힘들었어요.
<나의 독재자>는 어떤 면이 좋아서 선택했나요?
아버지와 아들을 다룬 이야기는 많지만 <나의 독재자>는 1970년부터 1994년까지 한국 근대사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방식이 재밌었어요. 개인적으로 김성근을 배우라고 인정하지 않아서 배우로 접근하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나의 독재자>가 배우론과 부정에 관한 이야기라면 저에게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가 배우의 이야기보다 더 가깝게 와 닿았어요. 배우도 사람이고 아버지잖아요. 김일성 역을 누가 또 시나리오로 쓰지도 않을 거고요(웃음). 촬영하면서는 김성근이 살았던 시대의 아버지들 생각도 굉장히 많이 했어요. 그 시대의 아버지들은 자기 존재도 없이 짓눌리고 쪼들려서 살았던 것 같아요. 자식 위에 군림한 것 같지만 자식한테 먹히면서 산 세대에요.
촬영하면서 이해준 감독과 많이 다퉜다면서요.
(웃음) 다툰 게 아니라 엔딩 장면을 어떻게 연기해야할지 잘 몰라서 부담스러웠어요. 4~5일 정도 촬영한 정상회담 리허설 장면은 김성근이 22년을 살아온 이유이기도 하고 <나의 독재자>에서 중요한 장면이기도 하거든요. 그전까지는 김성근이 일상 속에서 연극을 하며 살았던 거라면, 정상회담 리허설 장면은 김성근이 대통령 앞에서 김일성을 제대로 연기해야 되는 장면이잖아요. 그 장면을 4~5일 정도 촬영했는데 감독님과 싸웠다기보다는 제가 계속 짜증이 나 있었어요. 스트레스였나봐요(웃음). 마지막 장면을 잘 마무리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어서 신경이 날카로워졌죠. 말과 톤을 조절 못하고 툭툭 뱉었어요. 감독님께 상처주면서 4~5일을 버텼던 것 같아요(웃음).
정상회담 리허설은 김성근이 멍석이 제대로 깔린 상태에서 김일성을 연기하는 장면이잖아요. 첫 대사를 어떻게 쳐야 될지 몰라서 많이 힘들었어요. 톤도 잘 몰랐고요. ‘리어왕’ 독백도 어려웠어요. ‘리어왕’ 독백은 크랭크인 전부터 고민이 많았던 대사에요. 대통령과 리허설을 하다가 갑자기 ‘리어왕’의 독백을 한다는 것이 사실 느닷없잖아요. ‘리어왕’ 독백 대신 김성근이 전에 대타로 맡았던 광대 역의 독백만 있었는데 조금 억지처럼 느껴져서 이해준 감독님이 ‘리어왕’의 대사를 추가했어요. 감독님도 크랭크인 직전까지 그 부분을 많이 고민했어요. 이해준 감독님이 ‘리어왕’ 독백 장면과 과거 김성근이 연극 무대에서 바보가 됐던 장면은 오버랩 될 거라고 촬영 전에 말해줬어요. 그런데 김일성 연기에서 ‘리어왕’ 독백으로 어떻게 넘어가야 될지를 모르겠더라고요.
부담이 많았을 것 같아요.
정상회담 장면은 김일성 역도 연기해야 되고, 과거 김성근이 자신과 아들 모두에게 망신을 줬던 과오도 해결해야 되는 장면이에요. 사실 두 부분이 전혀 다른 이야기라서 붙는 대사는 아니거든요. 그런데 그 대사를 붙여서 연기해야하니 부담됐어요. 김성근이 망쳤던 연극을 떠올리면서 연기했는데 마른 눈물이 뚝뚝 떨어지더라고요. 그런데 감독님이 눈물을 (시나리오 상) 대사 두 줄 위의 타이밍에서 흘려달라고 하더라고요. 내가 기계야? (웃음) 그 때는 정말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뭐?’ 신경질적으로 반응할 정도로 감정 조절이 안됐어요. 계산해서 눈물이 난 것도 아니고 ‘눈물을 흘리며’라는 지문도 없었으니까요.
결국 그 장면을 어떻게 해결했나요?
그때 대통령을 연기한 전국환 선배가 김성근을 보면서 측은하게 ‘애썼어요’라고 즉흥대사 하나를 하셨어요. 그 대사가 굉장히 고맙더라고요(웃음). 그 대사 덕분에 ‘리어왕’ 대사로 넘어가기가 조금 수월해졌어요. ‘난 누구인가’ 라는 대사가 김성근이 자신한테 묻는 질문 같기도 했고요.
‘리어왕’ 독백이 인상적이었어요.
김성근이 김성근에게 하는 이야기 같았어요. 김성근이 하는 대사 중에 ‘거짓말을 하는 방법을 배우고 싶다’는 대사가 있는데 본인에게 간절했던 말인 것 같아요. 김성근이 연극할 때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연기하기도 했지만 저를 김성근에 대입시켰기 때문에 더 와 닿고 눈물이 났던 것 같아요.
연기가 풀려서 이해준 감독과의 갈등도 잘 풀렸겠어요(웃음)
마지막 촬영을 통영에서 했는데 간단한 신이기는 했지만 그때 일부러 감독님 말을 조금 안 들었어요. 감독님이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달라고 하면 싫다면서 왼쪽으로 돌렸어요(웃음). 이해준 감독님이 나한테 왜 그러냐고 하더라고요(웃음). 촬영 끝나고 횟집에서 미안하다고 했죠. 내 상태를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으니까 날카로워졌다, 중요한 장면인데 상대 배우를 괴롭힐 수도 없고 감독 너밖에 더 있냐, 그러면서 사과했죠(웃음).
김성근은 배우로서는 너무 위험하게 갔다고 생각해요. 설정이 영화적이기도 하고요. 촬영하면서 김성근이 역에서 안 빠져 나온 건지, 못 빠져 나온 건지를 계속 고민했어요. 감독님한테도 김성근이 일상에서도 김일성을 연기하는 거냐고 많이 물어봤어요. 아직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김성근이 역에서 안 빠져 나왔다는 것에 더 비중을 뒀어요. 지금은 편집됐지만 김성근이 김일성 역을 맡고 난 뒤 극단 사람들을 우연히 만나서 술자리를 뒤집어 놓는 장면이 있었거든요. 김성근은 연극의 탈을 벗는 순간, 아들한테도 돌아갈 수 없는 아버지였기 때문에 연극 속에서 계속 살았던 것 같아요. 그만큼 절실했고요. 감자국수를 만들어 먹어야겠다며 김일성처럼 사투리로 말하는 건 연극적인 톤이에요. 영화를 보면 김성근이 아들에 대한 아픈 미안함 때문에 아들 눈을 못 봐요. 쓰러지고 나서야 아들에게 ‘연극 준비 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 때 니가 나한테 딱지 줬잖아, 잊어버렸어?’라며 몇 마디 툭툭 건네죠.
정상회담 장면에서 김성근이 연기하는 김일성은 정말 실감났어요. 하지만 그런 김성근이 무섭거나 밉지는 않게 느껴졌어요.
불쌍하지 않아요? 아버지로 봐서 그래요. 저도 그 장면에서 김성근을 아버지로 연기했지 김일성으로 연기한 건 아니에요. 김성근은 아들한테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정상회담 장면에서 김성근이 식은땀을 흘려요. 김성근한테는 상상 할 수도 없을 정도로 무서운 자리인거죠. 경험은 안 해봤지만 저에게도 실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정말 지릴 것 같아요(웃음). 하지만 김성근은 아버지로서 아들 앞에서 대통령과의 기싸움에서 안 지려고 했던 거예요. 그래서 더 불쌍한 거죠. 김일성을 흉내 냈다면 아마 마음에 와 닿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김일성 연기는 어떻게 준비했나요?
요즘은 김일성 관련 동영상이 종편에 많이 나오잖아요. 집에서 학습 자료로 영상들을 봤는데 음악이 나오니까 갑자기 소름이 확 올라왔어요. 요즘은 그런 영상을 보는 것이 잘못이 아닌데도 저도 모르게 커튼을 확 닫았어요. 그 다음부터는 영화사 사무실에서 영상을 봤죠(웃음).
김성근은 집을 철거하려는 인부들에게 화염병을 던지고 나서야 처음으로 태식의 이름을 불러요. 자신의 연극을 일단락 지었다고 생각해서 그런 건가요?
화염병을 던지는 건 퍼포먼스가 아니라 아들과 함께 추억을 공유했던 집을 지키려는 순수한 행동이에요. 집을 지키기 위한 분노인거죠. 물론 아들은 인감을 위해서 아버지를 집으로 데려왔지만 저는 왠지 김성근이 모든 상황을 다 알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들과 아버지가 유일하게 추억을 공유하는 집이 22년 동안 그대로 있었던 거잖아요. 아버지는 마룻바닥 밑에 있는 보물창고에 고스란히 추억을 숨겨왔던 거죠. 그런 점을 볼 때도 김성근이 김일성 역에서 못 빠져 나온 것이 아니라 안 빠져 나온 거라고 생각해요.
슈퍼마켓 신은 연기 톤이 조금 코믹하게 바뀌었다고 느껴져 이질감이 들었어요.
슈퍼마켓에서도 김성근은 연극을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톤은 솔직히 생각을 안했어요. 어설프게 통조림을 가지고 마임 하는 건 연극이거든요. 아들 앞에서의 눈빛을 보면 연극을 하는 거예요. 슈퍼마켓에서까지 연기할 필요가 있냐는 생각도 들지만, 이 장면에서는 김성근의 상태는 이렇고 저 장면에서는 저렇다고 명확하게 구분지어 말하기는 힘들어요. 아직도 상근의 상태를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대학로에서 처음 공연을 했을 때 같이 작업했던 선배가 제게 연기가 안 된다며 연출 스탭을 하라고 한 적이 있어요. 당시 이정섭 선배와 동성애자 역에 더블 캐스팅이었어요. 후배들은 역할 하나를 도맡아서 하는데 나는 더블 캐스팅이니 설움이 있었나봐요. 가판에서 표를 팔거나 사진을 찍으면 그날 일이 끝났어요. 일을 마치고 극장에 들어가면 이미 공연은 시작하고 있을 때도 있었고요. 겨울에 포스터 붙이고, 표 팔고 극장에 들어갔는데 손이 얼어서 사진을 찍는데 플래시가 안 터진 적이 있어요. 배우하려고 대학로로 나온 거였거든요. 그래서 선배 이야기를 듣고는 졸업과 동시에 극단 한양레퍼토리를 나왔어요. 대학로에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았던 낯선 사람들도 많잖아요. 대학로까지 와서 한양대 5학년처럼 살아야하는 게 싫어서 프리 선언을 했어요. 하지만 갈 데가 있어야죠(웃음). 저를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써 주는 곳이 없었어요. 집에 손 벌리기 싫어서 극단 학전에서 기획실장으로 있던 선배에게 연락해 포스터라도 붙이게 해달라고 했어요. 그렇게 장당 얼마씩 받으면서 포스터를 붙이다가 김민기 선생님의 ‘지하선 1호선’에 캐스팅됐죠. 처음에는 이 양반이 왜 이러나 했어요(웃음). 지금도 포스터 붙이다가 캐스팅됐다고 농담처럼 이야기해요. 당시는 나윤선씨가 선녀를 했고 방은진 누나가 걸레를 했어요. 제가 안경을 연기했고요.
프리 선언을 할 정도로 확고한 목표가 있었던 건가요?
선생님한테는 무작정 공무원 시험을 볼 거라고 이야기하고 나왔지만 사실 갈 데가 없었어요. 그저 출퇴근하듯 대학로에 가서 막연하게 있었죠. 극단이 있으면 포스터를 붙이거나 극장 청소라도 했을 텐데 말이에요(웃음).
그런데도 연기를 그만두고 싶지는 않았나봐요.
그럴 생각은 없었나봐요. 그냥 대학로에서 버텨보자고 생각했어요.
연기를 그만둘까 흔들린 적은 없나요?
요새 계속 흔들려요(웃음). 스크린 연기 경험이 20년 가까이 되요. 연극까지 하면 20년이 넘었고요. 어머니가 저를 가장 기특하게 생각하는 부분도 연기만큼은 오래한다는 거예요(웃음). 하지만 기술자들은 시간이 지나면 장인이 되지만 연기는 해가 갈수록 더 나아지고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꺼낼 카드가 없어져요. 이렇게 하나씩 꺼내다보면 언젠가는 더 이상 꺼낼 카드가 없어질 거라는 생각과 고민을 하면서 살고 있죠.
다른 일을 생각해 본 적도 있나요?
할 게 없어요(웃음). 할 줄 아는 것도 없고요. 세상을 몰라요. 졸업하자마자 대학로에 들어선 것을 시작으로 계속 연기 생활을 했기 때문에 제 앞에 책상이 있었던 적이 없어요. 극단도 6개월 생활했던 것이 전부여서 조직 생활도 잘 몰라요.
영화 속에서 설경구만 돋보인다는 평도 있을 것 같아요.
감독님과도 이야기했지만 <나의 독재자>는 박해일이 아니면 시작도 못했고 끝도 못 냈을 거예요. 박해일이 안 버텨줬으면 영화가 다 무너졌을 거예요. 아버지 역을 맡았지만 재밌게도 영화를 볼 때는 아들 입장에서 감정이 터지더라고요. 해일이가 아기처럼 굴 때 어린 태식의 모습과 오버랩되면서 마음 아프더라고요. (눈물이 맺히며) 어휴, 올라오네요. 역에서 아직 못 빠져 나왔나봐(웃음).
행복한 일이죠. 그런데 그게 결국 짐도 되요. 부산영화제 개막작 무대인사를 문소리, 김여진, 이창동 감독님과 함께 했는데 상영이 끝나니까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어요. 특히 내 쪽으로 막 몰려드는데 2시간 10분 만에 인생이 확 바뀐 거죠. 횟집에 뒤풀이를 갔는데 제 주위에 당대의 유명한 감독님들이 쫙 앉아있으니 신기했죠(웃음). 하지만 그 이후부터 사람들이 제가 출연한 모든 영화를 <박하사탕>과 비교하니까 정말 미치겠더라고요. <박하사탕>이 굴레가 된 거죠. 그 해 1월 1일에 <박하사탕>이 개봉하고 11월 11일에 <단적비연수>가 개봉했는데, 배장수 기자가 2000년 한해를 평가해보라고 해서 천당과 지옥을 왔다갔다고 말했어요(웃음). <단적비연수> 때 욕을 너무 많이 먹었거든요. 배우가 한 번 흥행했다고 해서 안정되게 자리 잡을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살다보니까 맷집도 생겨서 울화가 있는 것도 재밌는 것 같아요.
전작들이 대부분 흥행에 성공한 편이라 흥행 부담이 남다를 것 같아요.
부담이라기보다 10원만 벌었으면 좋겠어요. 10원만 벌면 다음 기회가 생기잖아요. 또 남들에게 손해도 안 주니까 상징적으로 10원만 벌자는 농담을 많이 해요. 천만 관객도 솔직히 안 부러워요. 지금도 그런 마음이죠.
천만 관객을 동원했을 때는 어떤 기분이 들었나요?
정말 희한하게 아무 생각이 안 들어요. <실미도>는 정말 기계가 찍어내듯이 일주일마다 200만씩 동원되는데 7~800만까지 관객 감소율 없이 올라가니까 천만이 모이더라고요. <해운대>는 첫 주에 200만이 안 들 거라고 생각했어요. <명량>에 비하면 새 발의 피지만(웃음), 첫 주에 200만이 든다는 게 쉽지 않거든요. 그런데 <해운대>가 첫 주에 200만을 끊더라고요. 그리고 개봉 3주차 월요일에 39만을 동원했어요. 당시 평일 관객 39만은 어마어마한 숫자거든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는데 결국 <해운대>가 천만 관객을 넘더라고요. 천만은 평범하지 않은 희한한 숫자인 것 같아요(웃음).
<군도> <명량> <해적> 등 사극이 열풍인데 사극에는 관심이 없나요?
제안이 들어온 사극도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한 번도 안 해봤어요.
차기작 <서부전선>에서 맡은 역은 어떤 캐릭터인가요?
여진구와 함께 출연하는데 둘 다 군복을 입고 총만 들었지 전쟁과 전혀 무관한, 어리바리한 캐릭터죠. 쉽게 말해서 총을 들고도 주먹으로 때리는 캐릭터에요(웃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모든 걸 다 빼앗기고 전쟁에 끌려온 사람들 이야기에요.
배우로서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요.
계획이요? 없어요(웃음). 하루하루 해결하면서 살아요.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살자는 <올드보이> 오대수의 대사처럼요(웃음).
2014년 10월 28일 화요일 | 글_최정인 기자(무비스트)
사진_김재윤 실장(studio ZI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