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를 받을 당시 ‘결혼의 여신’의 손지혜라는 캐릭터에 흠뻑 빠져서 괴로워하고 있었어요. 그때가 최고조였어요. 손지혜가 수면제 먹고 잠에서 못 깨고 사네 마네 할 때여서 힘든 상황이었어요. 그러다보니 상대적으로 저도 지쳤어요. 많이 힘든 상태였죠. 그래서 작품 끝나고 여행을 가서 쉴까, 어떻게 위로할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슬로우 비디오>가 딱! (웃음) 시나리오를 읽어봤다니 너무 괜찮은 거예요. 쉬면서 충전을 할 수도 있겠지만, 수미라는 긍정적인 아이를 연기하고 그 상황에 빠져 몰입하면서 내 자신도 좀 위로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선택을 하게 됐어요.
수미 캐릭터 자체에서는 어떤 매력을 느꼈나요?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는 당당함이었어요. 사면초가에 놓인 상황에서도 뮤지컬 배우의 꿈을 잃지 않더라고요. 주인공이 될 수 있을지, 성공을 할 수 있을지, 결과는 불투명하잖아요. 그런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그 꿈을 잃지 않고 가는 모습들이 제 눈에는 예뻐 보이고 좋았던 것 같아요.
최근 인터뷰 기사들을 찾아보니 남상미라는 배우의 이미지가 전작들로 인해 좀 갇혀 있는 것 같다는 인식을 대중들도, 본인 스스로도 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슬로우 비디오>가 새로운 이미지 변신으로 다가오진 않았어요. 전부터 보여줬던 남상미의 이미지에 가장 가까운 역할 아닌가요?
맞아요. 쉽게 잊혀서 그래요. 기자님은 저를 어렸을 때부터 보셨고 그 모습들을 기억해주시잖아요. 그런데 대중들은 제가 연기한 많은 캐릭터들을 다 기억하지 않고 가장 최근작, 최근에 본 이미지로 기억하는 거죠. 한편으로는 그만큼 제가 연기를 잘했다는 칭찬으로 듣기도 하고 그래요(웃음).
오랜만에 이런 역을 맡았다기보다는 남상미가 잘 할 수 있는 역할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어찌 보면 그냥 남상미의 모습이에요. 서른 살의 남상미의 모습. 대중들이 알고 있는 공식적으로 보이는 남상미가 아니라 인간 남상미의 어떤 모습들이 많이 투영됐던 것 같아요. 연기할 때 나를 많이 비우고 캐릭터에 좀 다가가려고 하는 스타일이거든요. 왜냐하면 변하지 않는 제 몸과 목소리와 눈빛이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그 텍스트가 주는 대로 표현을 하고 싶어서요. 그래야 변화가 있더라고요. 솔직히 여자 주인공 역할이 폭 넓지가 않잖아요. 그러다보니 나를 많이 비워야, 내 가치관이나 내 색깔을 많이 비워내야 조금 다르게 보이고 그리고자 하는 캐릭터를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해요. 그렇게 노력을 하는 편인데, 이번 수미 같은 경우는 제 모습이 많이 투영이 됐어요. 그래서 감독님이 ‘상미야, 고민은 하고 오니? 연기를 해야지!’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많이 놓았던 것 같아요(웃음).
남상미의 실제 모습과 흡사하기 때문에 주변에서는 농담으로 그런 이야기를 할 수는 있지만 본인 생각에는 어떤가요? 연기하는데 있어 더 수월할 것 같지만은 않아 보여요.
아니요, 좋았어요. 아무런 생각, 아무런 의식이 없었던 것 같아요.
아예 접근부터가 달랐어요. 그동안 ‘캐릭터라면 어땠을까’라고 생각을 했다면, 이번에는 ‘나라면 어떨까’ 접근이 반대인 느낌이었죠.
그러면 오히려 스스로도 잘 못 느꼈던 본인의 모습들을 발견하기도 했나요?
아니요. 그냥(웃음).
(웃음) 그냥 자연스런 남상미의 모습?
감독님도 제게 꾸미지 않은 남상미의 모습을 많이 바랐던 것 같아요. 연기를 어떻게 해보려고 용쓰는 모습이 아니라 그냥 남상미의 모습. 감독님이 크랭크인 날 촬영을 마치고 ‘수미가 너더라. 네가 수미더라’ 그렇게 말씀을 해주셨어요. 그것만큼 좋은 칭찬이 없잖아요. 그날 찍은 장면이 장바구니 들고 터덜터덜 내려가다 장부(차태현)를 발견하는 신이었어요. 첫 테이크를 찍는데 제가 장바구니를 들고 무심한 듯하면서 호기심 어리면서 뭔가 복잡한, 디렉션을 주지 않았는데 감독님이 생각한 수미의 모습과 감정으로 걸어 내려오더래요. 그냥 수미구나, 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그래서 어떤 의심도 싹 없앴다고 제게 말씀해주셨어요. 솔직히 말하면, 그냥 저인데(웃음). 저는 그냥 한 건데 감독님은 거창하게 칭찬을 해주시더라고요(웃음).
그것도 어려울 것 같아요. 나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마냥 마음껏 내 모습을 꺼낸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잖아요. 실제 생활에서 내 모습도 내가 아닌 경우들이 비일비재하니까요. 그걸 어찌됐든 끄집어내서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것도 배우로서의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수미는 캐릭터가 좋죠(웃음). 만약 못된 캐릭터를 주고 ‘상미야, 너 자신을 좀 보여줘’라고 한다면 ‘뭐에요!’ 했을 텐데, 수미는 캐릭터가 굉장히 좋으니까 ‘네, 콜!’ 했던 것 같아요(웃음).
촬영현장에서나 인터뷰로 만날 때마다 예의 바르고 따뜻하고 씩씩한 모습이 결코 가식적으로 보이지 않았던, 그런 모습이 연기에도 투영돼서 해맑게 웃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배우 중 하나로 인상에 남아있었어요. 9년 만에 인터뷰로 만났는데 작품 속에서도 실제 모습에서도 변함이 없는 것 같아요. 나이를 먹고 세상의 풍파를 겪으며 예전 같지는 않겠지, 싶었는데 그대로네요(웃음).
변하지 않고 싶죠. 늘 초심을 잃고 싶지 않고요.
그게 어려워요.
어렵죠(웃음).
그 생각을 못했어요. 절박함? 절실함? 저도 그런 것들이 있었는데 그 감정을 살려봐야겠다는 생각까지는 못했고 그냥 수미의 순수함에만 초점을 맞췄던 것 같아요. 여자 나이 서른 살에 계약직 알바만 전전하면서 힘들다는 걸 느낄 틈조차 없는 생활에서도 뮤지컬 배우의 꿈을 놓치고 가지 않는 그 순수함에만 초점을 뒀어요. 오히려 영화 외적으로 노래도 배우고 춤도 배웠어요. 매력이 있더라고요. 공연 보는 걸 좋아하기는 해요. 영화나 드라마는 편집을 통해 만들어지는 작품이라면 공연은 하나의 통으로 만들어가는 거잖아요. 배우가 한 번 몰입을 한다면 얼마만큼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제가 하는 연기의 폭과는 엄청 다른 폭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노래를 배우면서 어려웠어요. 감히 덤빌 수 없는 분야더라고요. 레슨 받으면서 선생님께 칭찬을 많이 들어서 ‘이렇게 1년 만 하면 뮤지컬 할 수 있을까요?’ 물어보면 희망적인 답변을 듣기는 했어요(웃음). 그런데 나중에는 제가 알았죠.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구나(웃음). 그분들을 동경의 시선으로 보고 있어요.
횡단보도에서 전화로 오디션 보는 장면을 보면 뮤지컬에 도전해도 될 것 같아요.
어휴, 어디 뮤지컬에서 어딜 그런 목소리로 노래를 해요. 동요 느낌 나는 노래를 어떻게 뮤지컬에서 할 수가 있겠어요(웃음). 저는 모든 노래를 동요화시키기 때문에 안돼요(웃음).
그렇다면 연기에 집중하는 걸로(웃음).
연기만 파도 모자란 시간이죠(웃음).
캐릭터 설정이 독특하면서도 매력적인 지점이 있었던 것 같아요. 헤어스타일이나 의상 같은 것들요.
감독님 제안이었는데, 수미의 현실을 표현해 줄 수 있는 부분에 초점을 맞췄어요. 장부는 영화가 어릴 시절부터 삶을 쭉 쫓아가지만 수미는 어린 시절에 잠깐 나왔다가 갑자기 서른 살이 돼서 나타나잖아요. 그래서 수미의 환경을 설명해야 하는데 머리와 옷이 많은 것들을 설명하고 있는 느낌이 들어요. 뽀글 파마를 하는 이유는 한번 하면 오래 가기 위해서고, 옷은 꾸밀 시간도 없고 추우니까 이것저것 덧입는 거지만, 뭔가 자유로운 영혼처럼 보이는 부분도 있거든요. 수미의 상황을 굳이 부연 설명하지 않아도 한 번에 보여준다고 생각해서 저는 너무 마음에 들었어요. 하지만 예뻐 보일 거라는 생각을 못했거든요. 현장에서 예쁘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고요(웃음). 그런데 영화를 막상 보니,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서 장부처럼 착한 사람이 착하고 예쁜 시선으로 봐주니까 수미가 예뻐 보이는 거예요. 기분이 좋았죠.
아무리 망가져도 예쁜 사람은 뭘 해도 예뻐요.
헐!
수미의 성격과 현실이 잘 묻어났기 때문에 더 예쁜 거죠. 그게 안 묻어나도 남상미니까 예뻤을 거예요(웃음).
어이구야!
그런 헤어, 의상스타일이 세련돼 보이면 안 되잖아요. 그렇다고 남루해 보이기만 해도 안 되는 거고요. 그 중간 지점을 만들어내는 건 헤어, 의상의 외적 설정을 넘어서는 배우의 힘인 것 같아요.
그래요? 감사합니다(웃음).
그래서 수미가 더 당당하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의상팀, 분장팀 언니들이 받아야 할 칭찬을 제가 듣고 있네요.
시나리오 상 지문은 ‘합격 소식을 듣고 막춤을 추는 수미’였어요. 짧아요(웃음). 저는 그렇게 나올지 몰랐어요. 감독님이 너무 예쁜 신으로 만들어 주셨더라고요. 그 막춤의 탄생 비화는 그야말로 막 만들어진 거예요(웃음). 제가 평소 손동작을 좀 많이 써요. 그러다보니 손이 그냥 위로 올라가서 이렇게 흔들게 된 거예요. 안무 선생님도 현장에 계셨거든요. 안무 선생님이 제 행동들을 보고 여기서 이렇게 해보자고 의견을 주기도 했죠. 그 신은 엄청 금방 찍었는데 인상은 너무나 강하게 남는 것 같아요.
말 그대로 즉흥적으로 막 춘, 어떻게 보면 어설퍼 보이는 동작이 기가 막힌 영화적 순간으로 완성된 거네요. 평소 손을 많이 쓰다 보니 아무래도 손동작에서 자연스러움이 배어나왔겠죠.
아무래도 저의 습관적인 어떤 행동들이 있고, 그것들을 또 안무 선생님이 보면서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었겠죠. 전화를 받다가 앉았다가 폴짝 뛰면서 시작이 된 거에요. 그랬더니 감독님이 컷을 하고 너무 좋다고 하셨어요. 손동작도 하면서 롱테이크로 찍었거든요. 그 손동작은 도대체 뭐냐 물으시더라고요. 그래서 모르겠다고, 내가 어떤 식으로 췄는지도 모르겠다고 했어요. 감독님이 그럼 모니터를 보고 다시 해 달라고 하셨어요. 그렇게 또 찍었어요. 한 번은 감독님이 벽을 보고 춤을 춰달라는 거예요. ‘벽을 보고 춤을 추라고요? 진짜 돌아이 아니에요?’ (웃음) 그랬는데 감독님이 해 달래요. 그것도 하다보니까 되더라고요. 그냥 뭐 갖가지 라이브로 막 했던 것 같아요.
또 하나의 인상적인 손 장면은 CCTV 화면으로 수미의 손이 프레임 인하면서 인사를 건네는 장면이었어요.
손동작이 평상시에도 좀 많아서(웃음).
배우들이 연기할 때 어색해하는 부분 중 하나가 손이잖아요. 배우의 손 하나 때문에 표정이나 다른 연기가 죽어버리는 경우도 많고요.
우연히, 다 우연히 된 거에요(웃음).
골목길의 일상적인 동선에서 보이는 수미의 모습은 어떻게 보이고 싶었나요? 당차고 씩씩한 인물이지만 분명 삶에 치이고 힘든 부분도 많은 인물이잖아요. 단편적으로만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힘들어 지친 수미의 모습보다는 외로운 느낌? 일이 늦게 끝나고 인적 없는 골목길을 혼자 걸어가는 모습에서 드러나길 바랐어요. 혼자 걸어간다는 그런 외로움보다 삶의 궁극적인 외로움 같은 것들 있잖아요. 수미처럼 발랄하고 성격 좋은 사람들은 주변에 친구들이 많아야 할 것 같은데 그 기쁜 날 혼자 삼겹살에 소주를 먹잖아요. 어떤 군중 속의 외로움? 풍요 속의 빈곤? 약간 그런 쓸쓸하고 외로운 느낌을 좀 살리고 싶었어요.
듣고 보니 그 장면들이 생각나서 더 짠해지네요. 장부와 만나면서 수미의 감정 변화가 생기잖아요. 그런 흐름들은 어떻게 잡았나요? 결국 수미는 장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고 있었던 거잖아요.
장부가 신호등에서 ‘나야 나, 여장부’라고 할 때 수미는 어렸을 적 장부라는 걸 알았지만 그 상황이 너무나 머피의 법칙 같은지라 봉수미가 아닌 오수미가 된 거죠. 두 사람의 좁혀지지 않는 간극이 있었어요. 수미에게는 어색한 시간이죠. 봉수미라고 말하고 싶은데 계속해서 말할 만한 상황이 주어지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자꾸 장부와 만나게 돼요. 수미가 찾지 않아도 장부가 찾아주고, 계속 수미를 지켜보고 곁으로 다가오고 수미의 삶 속에 들어오잖아요. 그런 모습에서 점점 더 가까워지는 두 사람의 단단한 관계가 있었어요. 꼭 내가 봉수미이고 네가 여장부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서로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 만나지게 되는 관계. 그러다 나중에는 수미가 장부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 장부를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한 사람이 수미잖아요. 그런 끊을 수 없는 관계들이 처음부터 계속 존재했던 것 같아요.
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시나리오에 없는 상황들을 배우들은 생각해보잖아요. 봉수미는 어린 시절이 생에 가장 봄날이었던 거예요. 장부는 그때 만났던 친구고요. 장부가 따돌림 당했을 때 수미가 장부에게 봄이 되어준 그런 관계였죠. 측은지심일 수도 있고 여러 가지 감정이었을 거예요. 그 이후 수미는 고단하게 살아온 거죠. 서른이 되기까지 순탄하지 않은 삶을 살아왔지만 수미는 장부의 그림을 간직하고 있잖아요. 힘 인거죠. 자신의 봄날을 담아둔 힘. 그러다 장부를 다시 만났을 때는 현실적일 수밖에 없는, 그래서 계속 다가갈 듯 다가갈 듯 다가가지 못하다가 떠나게 되죠. 현실을 직시하고 꿈을 버리고 집을 팔고 떠나죠. 수미는 엄마 집에 있었을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모퉁이만 돌면 바다가 보이는 그 집에서 어느 정도 치유하고 성숙한 다음 그 곳을 찾을 수 있는 용기가 생긴 거죠. 그래서 그 곳을 다시 찾아 갔는데 장부가 거기 있었고, 장부를 봤을 때 머뭇머뭇 반가움이 있어요. 그냥 좋은 거죠. 사랑해서 좋아해서 반갑다기보다는 사람에 대한 어떤 따뜻함? 저는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포괄적인 의미의 사랑을 느껴서 머뭇머뭇 다가간 거라고요.
장부 앞에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장부를 따라만 다니는 수미의 모습에서 장부의 익숙해진 삶에 다시 파장을 던지는 것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느껴졌어요.
그 부분에서 감독님과 제 의견이 좀 갈렸어요. 수미가 장부를 쫓아다닐 때 고민을 해달라는 거예요. 수미는 고민을 할 것 같대요. 아무리 사랑했던 사람도 3년이 지나 다시 만났는데 현실적으로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 힘든 부분이 있다면 그래도 고민을 하지 않겠냐면서요. 제가 생각하는, 제가 연기하는 수미는 안 그럴 것 같았지만 그렇게 했어요. 장부를 쫓아다니면서 현실적으로 눈이 안 보이는 사람과 내가 잘 살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이 사르르 무너지더라고요. 장부라는 따뜻한 사람에게 동화되는 느낌이 들었어요.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라 아픈 나와 아픈 네가 만나서 어느 누구보다 행복한 감정으로 변해가지 않았나 생각해요.
갤러리에서 장부의 그림을 보는 수미의 감정에도 연기하면서 많이 이입이 됐을 것 같아요.
갤러리 신에서 장부가 너무 멋있지 않나요? 결국 수미에게 바다를 보여 준 거예요. 갤러리에 들어서자마자 수미가 본 건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수미의 뒷모습이에요. 결국 장부가 수미를 바다에 데리고 간 거죠. 바다 위에 떠 있는 마을버스까지 외롭고 힘든 많은 사람들이 다 바다에 간 거예요. 그리고 수미의 찰나의 순간들을 고스란히 담아둔 거죠. 손동작이라든지, 모자를 눌러 씌우는 거라든지, 장바구니를 들고 가는 거라든지.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수미보다 더 자세히 수미를 지켜봐왔던 거죠. 마지막으로 수미의 커다란 그림을 봤을 때는 진짜로 감동했어요. 사랑과 정성이 없으면, 관심이 없으면 나오지 못할 그림인 거예요. 그래서 영화 외적으로도 작가님에게 너무 고마웠어요. 실제로 작가님이 저를 계속 지켜보고 사진 찍고 스케치하셨거든요. 제가 갖고 있는 매력보다, 또 수미가 갖고 있는 매력보다 더 매력적으로 아름답게 그려준 거죠. 그 신에서는 실제로 울었어요. 일부러 그 신을 찍을 때까지 그림을 안 봤거든요. 그러다가 그 신을 찍을 때 딱 돌아섰더니, 한 남자가 한 여자를 그렇게 사랑해주고 애틋하게 기다려주고 그리워하고, 여자는 남자의 그 마음을 느꼈다는 것 자체로 수미는 성공한 삶이라고 봐요. 너무 좋더라고요.
이번 작품을 통해서 얻은 것, 느낀 것들이 있다면요?
힐링! 지금 최고로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어요(웃음). 계속 좋은 작품들을 만나서 그동안 쉬지 않고 일을 했고, 드라마 끝나고 바로 영화 홍보를 하고 있거든요. 제가 이 영화의 메시지를 훅 받은 거예요. 큐피드의 화살을 맞은 것처럼 세상이 달라 보이는 것 같은 거예요. 그게 너무 좋아요. 이 역할, 수미로 많은 사람들에게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그런 의미보다는 이런 감정을 많은 분들이 받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앞서요. 좋은 건 나누면 배가 되는 거니까요. 그런 생각이 많이 들더라고요.
안하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친구가 연출한 영화에 출연한 걸 제외하면 <불신지옥> 한편 뿐이었어요.
그렇죠. 안하려고 한 건 아니에요. 오히려 더 많이 바랐는데 인연이 닿는 작품이 없었던 거겠죠. 할 수 있는 역할도 없었던 것 같고요. 혹시 그동안 개봉한 영화중에 제가 했어도 잘 했겠다 싶은 작품이 있나요?
뭘 해도 다 잘했을 텐데요(웃음).
그래요? 헐! 저는 항상 열려 있는데, 저에게 들어오는 좋은 작품, 좋은 책이 있어야죠.
요즘은 더 없겠죠. 안타깝게도 여배우들이 할 만한 작품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네요.
그리고 30대 초반에 들어선 것도 많은 영향이 있는 것 같아요. 마냥 밝은 20대 느낌의 역할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직 미혼인 입장에서 엄마 역할을 하기도 애매한 것 같아요. 물론 저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보는 분들이 몰입을 못할까 걱정이 돼요. 아무래도 경험이 없으니 모성이라는 부분은 감히 어떻게 연기로 쉽게 표현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조금 애매한 시기, 숙제가 많아지는 시기에 돌입한 것 같아요. 잘 풀어가야죠.
현실적인 지점에서의 고민이 맞기는 한데, 생각을 조금 달리하면 더 다양한 기회가 주어질 수 있는 시기가 된 것도 맞아요.
그런가요?
물론 지금 경계에 있는 느낌이 들겠지만, 동시에 어디든 갈 수 있는 상황인 거잖아요. 20대에는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접근이 안 되는 영역이었다면 이제는 발랄한 걸 할 수도 있어요. 뭐 예전같이 발랄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할 수 있잖아요. 엄마도 모성애가 절절한 이야기는 아니라도 엄마라는 설정이 가미된 역할들도 있거든요. 경계에서 너무 힘들게 고민하기보다 주어진 것들 중에서 잘 표현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선택하면 될 것 같아요.
저의 선택 기준도 그래요.
남상미라는 배우의 장점 중 하나는 관객들에게 진입장벽이 높은 배우가 아니라는 거예요. 선입견이나 이미지에 갇혀 있는 배우가 아니에요.
그래요? 엄마 역을 하면 안 어울린다는 소리 듣고 그러진 않을까요? 몰입이 안 된다고 하면 어떡해요.
연기로 몰입하게 만들면 되죠(웃음).
(웃음) 정답입니다!
2014년 10월 6일 월요일 | 글_서정환 기자(무비스트)
사진_김재윤 실장(studio ZI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