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적으로는 배우들과 같이 만들고자 생각했던 영화가 맞아요. 하지만 감독님이 표현을 좀 더 직설적이고 쿨하게 해서 재밌고 새롭게 봤어요. 처음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다 들어 있지만 표현함에 있어 굉장히 직설적으로 욕망을 보여준 느낌이었어요. 구태여 ‘왜’를 자꾸 부여하지 않아요. 캐릭터들이 왜 저렇게 느끼고 행동하는지, 왜 욕망을 따라가는지, 일일이 설명해주지 않잖아요. 그런 부분들이 더 날 것 같고 싱싱한 느낌이었어요. 스토리의 부재로 비칠 수 있다고는 생각해요. 사전 설명 없이 과감하게 버리고 간 부분이 있어서 특별히 더 세게 표현한 건 없는데도 영화를 자극적으로 느끼는 분들도 있는 것 같아요.
<황제를 위하여>를 선택한 계기는 뭔가요?
여러 가지가 작용했죠. 일단 이환이 욕망에 집착해 가는 모습이 굉장히 좋았어요. 시나리오를 받기 전 처음으로 욕망이란 감정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런 시점에 시나리오를 읽게 돼 관심이 갔어요. 이환이라는 인물이 점점 미치듯이 변해가는 지점들을 알 것 같아 좋았고요. 또 제작자나 감독님 모두 같은 이야기라도 빤한 걸 빤하지 않게 표현하는 방법을 찾으려고 해서 이 작업이 해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나리오를 받기 전에 욕망에 대해 어떤 고민을 한 건가요?
욕망 이야기로 인터뷰 끝내도 되는 거예요? 한 40분 걸릴 거 같은데(웃음). 저는 욕망이 없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 역설적으로 욕망이 있었기 때문에 욕망 없이 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욕망을 느끼지 않으려고 오히려 덮어놓고 살아온 거죠. 하지만 불편하고 감정적으로 좋지 않았던 때를 생각해보면 그 안에 욕망이 있었어요. 열정으로 속이고 살았던 부분들에 대해 생각하다가 이게 욕망이라는 걸 깨달았죠. 과거와 현재, 그리고 현재가 진행되는 미래에서 왜 나는 욕망을 못 벗어날까, 그런 고민을 하던 찰나에 시나리오를 봤어요. 알고 있던 답이었지만 실체가 없고 덧없이 허망한 것이어도 여전히 욕망을 쫓아가게 되는 그 지점, 이 영화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닿았죠.
내면의 욕망을 발견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그냥 불현듯이 왔던 것 같아요. 생각할 시간이 있었겠죠(웃음). 작품 생각만 하니까 바쁠 때가 어떻게 보면 더 나은 것 같아요. <연애의 온도>를 끝내고 여행을 갔는데 그때 친구가 혜민 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젊은 날의 깨달음’을 선물로 줬어요. 일기를 쓰며 계속 혼자 혜민 스님과 대화를 나눴어요(웃음). 오늘 혜민 스님 말씀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스님, 어차피 멈추게 될 때는 멈추고 싶지 않아도 멈추게 되잖아요. 난 달릴 수 있을 때 달릴래요. 왜 그렇게 미리 멈추라 그래(웃음). 그런 것들을 글로 썼어요.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냥 여유를 가지라는 이야기인데 왜 멈추라는 식으로 극단적으로 받아들이는지 고민하다 보니 그 뿌리에 욕망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시간 날 때 일기를 보면서 왜 내가 계속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지, 왜 그랬을까, 그런 고민에 빠진 거죠.
인생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라 아마 그 부분이 제일 뚜렷했겠죠. 하지만 꼭 연기가 아니더라도 일, 그 외에 친구, 사회적인 관계들에서도 소소하게 있더라고요. 내가 스트레스라고 생각하는 거의 모든 지점이 어느 정도는 본질적으로 욕망에 닿아있던 것 같아요.
어느 순간 <몬스터>처럼 거친 이미지의 캐릭터를 연기하게 된 것도 욕망과 관련이 있나요?
그렇지는 않았어요. <몬스터>를 21살 때 했으면 어떻게 했을지 상상이 안 가요. 21살 때까지는 살의라는 걸 안 느껴봤거든요. 세상이 아름다운 시절이라 정말 악하다는 사람을 느껴 본 적이 없어요(웃음). 어릴 때니까 감정적인 것보다는 사람 죽이는 연기를 어떻게 해야 되나, 여기를 찌르면 죽나, 이런 것을 더 고민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사회생활을 하고 사람들을 내 의지와 상관없이 겪으며 악하다는 감정을 느끼게 됐어요. 그리고 <몬스터>를 보니 너무나 비인간적인 감정이지만 흡사한 감정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물론 태수가 감정적으로 살인하는 건 아니지만 그런 식으로 해석하게 되는 거죠. <황제를 위하여>도 욕망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을 때와 단지 욕망을 멋있는 것, 남자라면 한번 뜨겁게 살아보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접근했을 때와는 역할의 해석이 달랐을 거란 말이죠. 어떻게 보면 욕망에 대해 인지하고 고민했기 때문에 그 끝의 허망함에 더 중점을 뒀던 것 같아요. 또 이환이 사실은 아주 약하고 여린 사람이라는 것, 그런 지점들도 생각하게 됐던 것 같아요. 제가 욕망을 열정으로 덮었던 것처럼 이환도 자신의 연약한 부분을 덮기 위해서는 욕망을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었던 거죠.
<황제를 위하여>를 찍고 난 다음 그런 생각들에 변화가 있었나요?
욕망의 끝이 허망하다는 것은 모든 책, 영화에서 하는 이야기잖아요. 생각이 변했다기보다 영화를 찍으며 느낀 것이 있어요. 역시 허망한 거구나, 민기야, 놓을 수 있으면 빨리 놓아라. 사실 실제 생활에서는 욕망이 있어도 어떻게 표출할 방법이 없으니까 열정으로 욕망을 덮어 놓은 것처럼 살았어요. 하지만 촬영하면서 욕망이란 감각을 어느 정도는 표출해보고 허망한 감정도 느껴보니까 조금이라도 현재에 행복하려면 욕망을 내려놓아야 된다는 생각이 든 거죠. 그러다가도 현재의 행복이 뭐가 중요해, 너 달려, 이런 생각도 들어요. 왔다 갔다 하는 거죠.
지금은 조금 여유가 생겼나요?
이제 느껴야죠. 생각으로는 아는 거죠. 이환도 그랬고 사실 정답을 알면서도 그렇게 못 살고 끝이 그러리라는 걸 알면서도 달려가잖아요. 영화 끝부분에 ‘알았다면 멈출 수 있었을까’라는 내레이션이 있는데, 정말 알았다면 멈출 수 있었을지 잘 모르겠어요. 지금도 달리고 싶으니까요.
좀 더 많은 설명과 관계들이 있었어요. 처음 이 책은 야구만 바라보고 살던 주인공이 불법 게임에 연루돼 모든 것을 잃고 밑바닥에서 다시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정말 정형적이고 공식적으로 규격화된 누아르였거든요. 사실 연수가 임신을 하고, 이환이 가족과 삶을 이끌어갈 때 상하와 조직의 음모에 휘말린 복수로 야망이 시작되는 지점이 있어요. 그런데 그런 이야기는 앞에 한 두 줄만 들어도 다음 내용을 알 정도로 빤하잖아요. 그래서 시나리오 작업 때부터 감독님과 많이 이야기하며 고쳐나간 부분이 영화에서 두 시간 동안 보여줄 거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제대로 하자는 거였어요. 주인공에게 사건으로 동기부여를 다 해 주면 친절한 영화는 되겠지만, 무엇 하나 새로운 것 없는 영화가 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처음부터 이환을 어디를 가도 욕망을 쫓을 인물로 표현했어요. 오히려 이환은 상하의 조직에서 물 만난 고기처럼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표현해도 되는 곳을 만난 거죠. 준비하는 과정에서 분명히 지금보다 더 설명되는 부분들이 있었지만 욕망도 그렇고 연수와의 관계, 엄마와의 관계도 다 쳐내고 최소화했어요. 구구절절 설명하지 말고 좀 더 직선적이고, 더 남자답다 그럴까요? 그렇게 표현하려 했어요. 그래서 오히려 음악이나 영상에서 섬세하게 가자, 사전에 그런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이환은 유능한 야구선수로 촉망받다가 밑바닥으로 추락해 조직에서 한 단계 한 단계 다시 위로 올라가는 인물이잖아요. 이환을 연기했을 때 중점적으로 신경 쓴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가장 신경 썼던 건 순수성, 욕망이라는 것에 최대한 순수하게 다가가고 싶었어요. 욕망을 표현함에 있어 둘러 표현하면 오히려 덜 순수해 보일 것 같았어요. 정말 본질적인 악은 순수악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처럼 욕망도 그럴 수 있잖아요. 그래서 관객들이 나중에 다시 곱씹어 생각했을 때 이환이 안쓰러울 수도 있는 인물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사실은 연약한 애니까요.
굉장히 자기 방어적인 캐릭터군요.
그렇죠. 왜냐하면 잃을 게 없다는 핑계로 시작하니까요. 사실 잃을 게 없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리고 이환이 끝까지 잃을 게 없었던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욕망밖에 남지 않는 거죠. 영화 끝 부분에 ‘아직도 내가 인간으로 보입니까’라는 내레이션이 있어요. 끝에 가서도 ‘멈출 수 있었을까’라고 이야기하고요. 못 멈춘다는 것에 한 표! (웃음)
이환이 친구 장례식에서 돈을 던지는 장면은 조금 갑작스럽게 느껴졌어요.
친구와의 끈끈함을 좀 더 설명하는 부분이 있어요. 이환이 불법 도박장에서 돈 받고 나오기 전에 어머니 수술비 하라고 친구한테 받은 돈을 줘요. 또 야구용품 매장에서도 내 손으로 너 피 묻히게 하지 마라, 부탁 좀 하자, 라고 하는데 그 부분이 이환에게 있어서는 아픈 지점인 거죠. 사실은 지켜주러 간 거잖아요. 이환이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는 지점들이 있어요. 장례식장에서 부조를 가지고 나올 때 이환도 그만 두고 싶은 마음일 수 있는데, 그 와중에도 돈, 돈, 돈이어야 하니 그런 지점들에서 이환의 심리 갈등들이 묻어나는 거죠. 그런데 그런 설명이 다 빠지고 장면만 있으니까 드라마는 덜 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고속촬영인데다가 신 분위기 자체는 좀 슬픈 느낌이잖아요. 그 뒤에 차를 몰고 가는 장면에서 ‘이 길의 끝은 어딜까’라는 내레이션이 또 그 이야기인 거죠. 그런 부분은 인정하고 가요. 스토리와 인물 관계에 대한 감정선은 아주 뚜렷하고 친절하다고 이야기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러면 아예 영화의 톤의 선택이 달라지는 거라 생각해요. 설명을 할 거면 확실히 하고 안 할 거면 지금처럼 강단 있게, 이게 새로운 지점이잖아요. <황제를 위하여>는 직설적으로 정말 하고자 했던 이야기인 실체가 없는 남자들의 욕망을 다뤘으니까요. 오히려 이도 저도 아닌 선을 타버렸으면 한편으로는 정말 지루하고 뭐 하나 새로울 것 없는 그런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해요. 그래서 시나리오 수정 과정에서도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왔고 영화의 전체적인 톤, 때깔, 스타일까지 다 맞춰갔어요.
모텔 액션 신이 두 번 나오더라고요. 물론 이태임의 얼굴을 더 타이트하게 잡는 것처럼 감정선에 있어서 초점은 조금 다르지만요.
포커스는 달라요. 정사 신도 그렇고 그 액션 신 자체도 처음에는 이환을 따라가며 보여준다면 영화 중간에 반복되는 지점은 조직원들과의 스토리가 다 섞여서 올라가요. 다른 숏들도 있고요. 그런데 같은 숏들이 있으니까 관객들은 헷갈리는 거 같아요.
액션 장면을 촬영하면서 다치거나 힘들지는 않았나요?
다들 그렇게 이야기하죠. 부러지거나 터지거나 하지 않으면 괜찮다고(웃음). 겨울이라 추울 때 찍어 액션이 더 신경질적으로 나온 거 같아요(웃음).
다른 배우들과의 호흡은 어땠어요?
좋았어요. 제가 남자들과 특히 더 잘 어울리는 법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10대, 20대를 거의 남자들과 보내서 숨만 쉬어도 어떤 숨, 어떤 감정인지를 알겠어요. 여자들은 말로 해 줘도 잘 모르겠고, 왜 여자는 말로 한 게 전부가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하고요(웃음).
고향이 부산이라 사투리 연기는 수월했겠어요.
부담은 크게 없었어요. 사투리의 특성은 이미 알고 있지만, 표준어도 촐싹대는 애가 쓰는 말투와 부잣집 애가 쓰는 말투가 다른 것처럼 억양보다는 이환이 써야 될 감정의 말투들을 고민했어요.
그건 장르별로 다르죠. 영화마다 장르별로 다르고, 목표지점이 다른 거 같아요. 그렇게 치면 <황제를 위하여>는 감정보다 스토리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죠. 그런데 아까 이야기했듯이 빤하지 않은 시도를 같이 해나갈 사람들이라 믿어서 작업을 하게 된 거죠.
새로운 이야기보다는 기존의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가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맞아요. <오싹한 연애>도 로맨틱 코미디에 호러가 들어간 새롭고 재기발랄한 영화였어요. <몬스터>도 굉장히 애정이 가는 게 스릴러의 구조를 무너뜨리고 캐릭터의 싸움으로만 갔던 스릴러잖아요. 그런 지점들에서 조금 매끄럽지 못한 부분도 있었지만 분명히 의미 있는 시도였어요. 또 그 부분을 긍정적으로 이야기해 주시는 분들도 많고요. <연애의 온도>도 좀 적나라한 영화, 이런 장르에서 20대 여성 감정에 이렇게 충실하게 풀어나가는 멜로물이 있었나, 생각했던 것 같아요.
연이은 작품 활동이 힘들지는 않아요?
하나도 숨 가쁘지 않아요. 차근차근 해 나가고 있는데 이전에 워낙 뜨문뜨문해서 그렇게 느껴지나 봐요. 전에는 거의 일 년에 한 작품 정도 했는데 이번에는 어떻게 인연이 잘 닿았어요. 사실 작년에 찍었던 <몬스터>가 올해 개봉하고, <황제를 위하여>는 올 초에 촬영이 끝났는데 좀 일찍 개봉하게 된 거고요. 개봉 시기가 좀 겹친 것 같아요.
<연애의 온도>에서 함께 작업한 김민희의 <우는 남자>와 비슷한 시기에 개봉하는데 기분이 어때요?
서로 은밀히 응원을 주고받고 있죠. 사실 VIP 시사회 초대를 받았는데 지방에서 여진구와 호흡을 맞추느라 가지 못해 미안했어요. 서로 문자로 응원 메시지를 주고받았는데 조만간 시간을 내서 심야영화로라도 봐야죠.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다고 하죠(웃음).
30대에 들어선 지금, 과거 자신의 모습에 대한 평가와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네요.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 해 왔다고 생각해요. 30대는 더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시기가 될 것 같고요. 세월이 잘 묻어나는 배우가 됐으면 좋겠어요. 좋은 작품들과 인연이 잘 닿았으면 좋겠고요. 인연 너무 중요하니까요. 그리고 불같은 연애도 한번 하는 걸로(웃음).
2014년 6월 12일 목요일 | 글_최정인 기자(무비스트)
사진_권영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