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 이야기만 살짝 들었는데 약간 섬뜩하더라고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고, 영화에서도 본 적 없었던 것 같아요. 가해자가 사랑하는 가족이라는 설정이 소름끼쳤고, 내용과 결말을 알고 시나리오를 봤는데도 소름끼치는 장면들이 있더라고요. 어둡고 무거운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이 보여줘야 하는 감정선에 끌렸어요. 근데 쉽게 결정을 못하겠더라고요. 이걸 하는 순간 너무 힘들 게 보이니까, 정신적으로 내가 피폐해질 게 보이니까, 쉽게 결정을 못했어요. 계속 고민을 많이 했죠.
고민을 했음에도 결국 결정을 내린 거잖아요(웃음).
운명인 것 같아요(웃음). 배우가 연기적으로 끌고 가야 할 몫이 너무 많은 게 부담이었지만, 또 그만큼 욕심이 나는 거죠. 이렇게 한 작품에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 뭐라 해야 하나요? 멍석이 제대로 깔린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요? 제대로 표현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는 상황인 거죠. 어떤 부분에서는 절제하고 덜 보여줘야 하는 경우들이 존재하잖아요. 그래서 배우는 계속 갈증을 느끼며 다른 인물을 연기하는 것 같아요. 엄두가 안 나지만 또 이걸 안 했을 때 언제 이런 작품을 만날까, 이런 생각도 사실 들었던 것 같아요.
배우로서의 욕심이 힘들 걸 알지만 선택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 같더라고요.
배우들이 다 그렇다고 하지 않아요? 힘들 걸 알지만 그걸 즐기려고 하는 약간 묘한(웃음), 그런 게 있는 것 같아요. 힘든 영화 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도 자기를 괴롭히는 영화를 하고 싶어 하는 그런 게 누구나 있는 것 같아요. 그만큼 연기적으로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
열정이 그만큼 있다는 것 아닐까요? 분명 일을 즐기는 면들이 있어야 선택이 가능한 거겠죠. 연기 욕심이나 배우로서 성장하고 싶은 마음이 클수록 찍고 나서 이렇게 힘든 영화 다시 안한다고 하면서도 또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런 것 같아요. 배우에 대한 열정, 연기에 대한 열정 없이는 이 일을 못할 것 같아요. 누가 시킨다고 되는 부분은 아닌 것 같아요(웃음). 기본적인 욕구인 것 같아요. 배우의 욕구(웃음).
본격적인 스릴러 첫 도전이라는 이야기가 많은데 장르적인 부분에서도 끌리는 부분이 있었나요?
장르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스릴러는 찍으면서 정확한 약속이죠. 여기까지는 이만큼 의심을 하자, 여기서는 감정을 너무 많이 표현하지 말자, 그런 약속은 스릴러 장르이기 때문에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기본적으로 남녀 배우의 멜로나 드라마는 연기하면서 만들어가는 부분이 있잖아요. 반면 스릴러는 조금 더 명확하게 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다은의 눈이 관객의 눈이라서 똑같이 놀라고 똑같이 의심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관객들은 이미 다 아는데 다은 혼자 모르고 싶지 않았고, 앞서 가고 싶지도 않았거든요. 그런데 이 이야기를 왜 했죠? (웃음)
스릴러 장르가 선택에 영향을 미쳤는지 물어봤어요(웃음).
아, 만날 이래요(웃음). 그래서 약속을 하고 계산해야 한다는 그 부분이 스릴러 장르를 염두에 둔 그 정도였지 이번에는 내가 스릴러를 해야겠어, 이렇게 한 번도 해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항상 캐릭터가 가장 중요했어요. 스릴러든 액션이든 멜로든 코미디든 시나리오가 재밌어야 하고, 재밌는 작품의 캐릭터가 가장 중요했던 것 같아요.
맞아요. 스릴러라는 장르가 배우들을 카메라에 그렇게 오랜 시간 집요하게 담지는 않는 경우가 많잖아요. 편집으로 쫓고 쫓기고, 소름끼치고, 무섭고, 잔인하고, 궁금하고, 이런 것들을 강조하는데, <공범>은 인물의 감정선을 굉장히 밀도 있게 따라가요. 그래서 긴장은 계속 유지되기 때문에 스릴러이기는 하지만, 감성 스릴러라는 말이 붙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아빠와 딸의 감정선을 따라 이야기가 교차되고 진행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예고편만 잠깐 봐도 감정적으로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은 장면들이 많더라고요.
그죠? 제 얼굴이 이상하죠? (웃음) ‘아빠 맞지?’ 할 때 이상한 표정이잖아요. 그게 좋아요. 내가 보여주지 못한 모습이 많이 나올 것 같아서요. 진짜 힘들었어요.
헤어스타일도 변화를 줬어요.
사실 <공범> 찍기 전에 숏커트를 하고 싶었거든요. 제 나이보다 어리게 나와야 하는 것도 있었고요. 그런데 감독님은 전혀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사랑스럽게 나오면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사랑스러운 게 그건데(웃음), 그럼 나보고 지금 이 나이에 대학 졸업한 20대로 가자고요? (웃음) 대학원생도 부담스럽다고(웃음), 그래서 대학원 졸업한 기자 지망생으로 바뀌었지만, 어쨌든 저보다는 몇 년 아래잖아요. 뭔가 파격적인 외형적 변신을 하고 싶었는데, 감독님은 오히려 원하지 않더라고요. 그냥 긴 머리 좋아하시고(웃음). 그래서 제가 잘랐어요(웃음).
잘했어요(웃음).
그죠? (웃음) 뭔가 너무 지겹잖아요. 그냥 머리만 잘랐는데 1년 후 다시 그 모습을 보니 괜찮더라고요(웃음). 지금 머리가 이만큼 자랐으니까, 저때 또 다른 느낌이 있구나 생각이 들더라고요.
외모에서 헤어스타일 말고 좀 더 신경 쓴 부분은 없었나요?
자꾸 사랑스럽게 하라고 해서, 억지로 사랑스러운 거 제일 싫어한다고(웃음). 옷은 최대한 사랑스럽게 가려고 했어요. 그렇다고 프릴 있고 그런 건 싫어하거든요(웃음). 유니크하고 독특한데 좀 젊어 보이는 패션. 이어폰 쓰고 티셔츠 입고 발랄한 느낌을 주려고 노력했어요. 워낙 이야기 자체가 너무 무거웠기 때문에 그래서 감독님이 외적으로 사랑스럽고 평범한 딸을 원했는데 그게 맞았던 것 같아요. 거기다 제가 변신을 시도했다면 과했을 것 같기도 해요.
감독님의 요구가 이해가 안 가네요.
네? 어떤 면에서요?
아니, 그 자체로 사랑스러운 사람에게 뭘 더 사랑스럽게 하라고 원하는 건지! 감독님이 보기에는 사랑스럽지 않았다는 거예요? (웃음)
(웃음) 감독님이 원하는 다은의 모습인 거죠. 배우는 궁금하잖아요. 감독님이 어떤 식의 연기를 원하고, 다은을 어떻게 잡았는지. 사랑스럽다는 표현 자체가 힘들고 어렵죠. 막 사랑스럽게 하면 제일 싫잖아요(웃음). 사랑스럽게 만들어져야 캐릭터가 사랑스러운 건데, 다은이는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초반에 아빠를 의심하기 시작하는데, 그 초반 의심하기 전에 잠깐 보이는 캐릭터의 성격이 중요하잖아요. 관객들이 다은이는 저런 성격이구나, 염두에 두고 계속 영화를 보게 되니까요. 처음에 아빠와 있을 때는 그냥 발랄한 딸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이렇게까지 감정을 폭발해서 보여주는 게 보통 영화에서는 한 두 장면이었다면, 이번에는 네다섯 장면이 넘는 것 같아요. 그만큼 감정 소진과 에너지 소비가 너무 많이 됐어야 했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아픔, 가족이 죽었을 때의 아픔과는 또 별개더라고요.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게 있었던 것 같아요. 다은이는 아빠가 세상의 전부였거든요. 아빠에 대한 마음과 애정이 참 강한 아이인데, 그런 아빠가 유괴 살인사건의 범인이라는 사실은 마른하늘의 날벼락일 뿐 아니라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이죠. 그 설정 자체가 주는 압박이 너무 대단했고, 일단 그 속에서 연기를 해야 하잖아요. 이 분노는 도대체 어떤 분노이며, 이 혼란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내가 표현할 수 있을까,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는 이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데, 이건 얼마만큼 내가 하느냐에 달린 거잖아요. 저도 모르겠거든요. 사실 제가 어떻게 할지를 몰랐어요. 집에서 소리쳐서 연습하지도 못했어요. 그렇게 하는 순간 감정이 소멸될 것 같더라고요. 혼자 계속 꾹꾹 담아두고 있다가 현장에서 슛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나오는 즉흥적인, 본능에 가까운 연기를 했던 것 같아요. 뭐가 있겠지, 그게 안 나오더라도 할 수 없는 거야, 준비한다고 되는 부분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래서 모든 것들이 힘들었던 것 같아요. 카메라 앞이 참 외롭다는 느낌은 항상 있었지만, 이토록 외로웠던 느낌은 처음이에요. 이 영화는 두 배우의 연기가 너무 중요했기 때문에, 그만큼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좌지우지 되는 것이 너무 많았어요. 그래서 참 힘들었죠. 모든 영화가 마찬가지지만 거짓말을 할 수 없었어요. 이번 신은 좀 부족했지만 다음 신에서 더 잘 하자가 아니라 계속 명확하게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 굉장히 부담이었던 것 같아요.
감정의 폭발도 힘들지만 그 수위를 어느 정도 표현해야 할지가 더 어려웠을 것 같아요.
맞아요. 그 수위를 생각하기에는 이성적으로 잘 안 되더라고요. 여기에서 이 대사 톤으로 이렇게 연기해야지를 감히 엄두도 못 냈어요. 손이 막 떨리고 입술이 떨리고 대사도 뭘 하게 되는지 사실 모르게 되는 상황이잖아요. 그렇게 분노를 하지만 대사가 정확하게 들리는 게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배우가 감정이 앞서서 대사가 안 들리면 그것만큼 매력 없는 게 없잖아요. 대사를 정확하게 하면서 이 동작을 취하면서 그렇게 연기하는 게 굉장히 힘들었어요. 테이크를 세 번 가니까 머리는 멍하고 손이 쩌릿쩌릿하고 힘이 쫙 빠져서 더 못 가겠다고 진짜 그랬어요(웃음). 하고 싶어도 안 나오겠더라고요. 그런 경험들을 했죠. 나도 그 순간 내 감정이 나올지 안 나올지 모르니까 너무 불안했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다른 작품이었다면 더 많이 끙끙거리고 고민해서 중요한 신을 찍을 때 막상 집중력이 흐트러졌을 수도 있었을 것 같아요. 이번에는 조금 내려놓은 것도 있어서 집중이 되는 순간이 다행히 많았고, 하나하나 찍으면서 감정을 오롯이 표현하는 순간이 분명 있었던 것 같아요.
정신적으로 깊게 들어가야 하는 연기를 했던 배우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큰 흐름에서 이 정도의 감정일 거라고 예상은 하지만 정확히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다보니 현장에서 본능에 맡긴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결과물을 보면 그 감정이 나오고, 그렇게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대사를 하고 순간순간 캐릭터에 맞는 디테일한 동작들이 나오더라고요.
그건 타고나는 것 같아요. 동물적인 감각인 것 같아요. 그 분노의 순간에서도 자기를 컨트롤할 수 있는 것도 본능적으로 갖고 있는 부분인 것 같아요. 차라리 미쳐 날뛰기만 하면 편할 텐데(웃음), 그 순간에 감정을 표현해야 하고 대사를 해야 하고 동작을 취해야 한다는 건 그만큼 이해가 안 되면 절대 나올 수 없는 거죠. 무의식으로 하는 중에도 예상치 못한 동작을 하게 되는데 그게 또 절묘하게 맞아떨어질 때가 있어요. 그런 걸 보면 어떤 부분에서 배우들이 하는 좋은 연기들은 공부해서 되는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 다시 태어나든지(웃음), 그럴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배우는 아무나 할 수 없는 것 같아요. 타고난 능력과 더불어 끊임없는 자기 계발이 병행되어야 할 테니까요.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아무나 할 수는 있는데, 계속 발전하는 배우가 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어느 순간 정체된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거든요. 끊임없이 보여주고 조금씩 성장하는 배우가 되려면 그걸 계속 깨야 해요. 자신을 끊임없이 의심하지 않으면 좋은 연기가 나올 수 없다고 봐요. 자신의 연기를 보며 이거 괜찮은데, 하는 순간 그 배우는 끝일 수도 있다고 보거든요. 그래서 어떤 감독님을 만나 어떤 걸 끄집어내느냐에 따라 배우들이 조금은 달라질 수도 있어요. 내가 나를 못 믿는 부분이 분명 존재하거든요(웃음). 그래서 연기는 참 재밌기도 하고, 선배님들 말씀처럼 하면 할수록 어렵기도 하고, 그런 것 같아요. 처음이고 아무 것도 모를 때는 내가 뭘 할지 누구도 모르지만, 하면 할수록 내가 뭘 하는지 아니까, 관객들도 예상이 되니까, 그 예상을 계속 깨야 한다는 게 정말 어렵죠.
좀 더 우려먹을 걸 그랬어요(웃음). 지금 돌이켜보면 그렇게 나이 많은 역할이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웃음). 내 나이 또래에서 할 수 있는 감정선보다 더 깊었으면 좋겠고, 뭔가 달랐으면 좋겠고, 그래서 진짜 용감했던 것 같아요. 24살에 이혼녀를 아무 생각 없이 했고, <작업의 정석>도 확 깨는 작품이었거든요. 사람들이 왜 하냐고, 못할 거라고 생각하니까 잘 할 수 있다는 반항 같은 것도 있었던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데뷔해서 만들어진 내 모습은 제가 의도하지 않은 모습이죠. 그때만 해도 여배우는 다 청순가련해야 했고 다양하지 않았잖아요. 가냘픈 멜로 여주인공 같은(웃음). 작품 선택하는 것도 두세 개 중에 하나인데 두세 개가 다 그런 거였는데 뭘 할 수 있겠어요. 변화하고 싶었던, 변화보다는 다른 걸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제 나이보다 더 깊은 연기를 계속 하고 싶었는데 깊은 연기를 하기에는 그냥 예쁘고 가녀린 역할만으로는 또 안 되잖아요. 그래서 계속 그렇게 새로운 시도를 해왔던 것 같아요. 그때 했던 선택들이 저에게는 자산인 것 같아요.
그런데 여배우들이 서른이 넘어가면 역할이 더 한정되다 보니...
우리나라 너무 심해요. 그렇지 않아요? 남자들이 봐도 그렇죠?
맞아요.
<공범> 개봉할 때 여자주인공은 저밖에 없어요. 저한테 시나리오 많이 들어오지 않느냐고 말씀들 하시는데, 저에게 많은 시나리오가 들어온다고 해도 다른 분들에게 그 시나리오가 갔을 테고 어떻게든 만들어졌으면 개봉할 거 아니에요. 그런데 지금 개봉하는 영화들 중에서 여배우들이 나오는 게 진짜 없잖아요. 현실이 그런 거죠. 남자영화는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정말 재밌고, 기획도 많잖아요. 그래서 남자 배우들이 부럽죠. 선택의 폭이 넓고 다양하니까요.
30대 초중반의 주연급 여배우들은 그래도 여배우들 중 가장 선택의 폭이 넓은데도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현실이 안타깝네요. 구조적으로 개선될 부분이 1순위이기는 하지만 손예진 같은 배우가 여배우가 중심이 되는 작품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줌으로써 길을 열어주는 것도 일정 부분의 몫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물론 그러고 싶죠. 끊임없이 작품을 하고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건 당연한 것 같고요, 그런 기회가 왔을 때 안 한다고 하는 여배우들이 있을까요? 그 자체가 없으니까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조금씩 나아질 거라 생각해요. 점점 나아지겠죠. 설마 이보다 더 하겠어요? (웃음) 이보다 더하지는 못할 것 같아요.
<공범>이 흥행이 잘되고 손예진의 연기도 좋은 평가를 받으면 여배우가 중심이 되는 영화들이 지금보다는 더 많이 기획되지 않을까요? (웃음)
더 무겁네요(웃음). 잘 돼야 하는데(웃음).
전에 배우는 고통을 받아야 희열을 느낀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 영화 많이 힘들었으니 기쁨을 느낀 적도 많았겠네요(웃음).
대박이다! 완전 마조히스트(웃음). 내가 알고 있는 나라는 사람은 나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사람은 누구나 약간 그런 부분이 있잖아요.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감추고 싶은 나약함? 저 역시 그런 부분이 많은 사람인 것 같아요. 그런 결핍과 나약함, 그걸 버티고 견뎌내고 있을 때는 내가 생각하는 나보다 근사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그건 말로 표현이 잘 안 되기도 하거든요. 그냥 그 공기, 그 순간의 느낌들, 촬영을 하며 나의 모습들이 하나하나 완성돼 갈 때의 어떤 희열은 분명 있는 것 같아요. 특히 힘든 신일수록 내가 원래 생각하는 나보다 좀 더 괜찮아 보이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굉장히 극찬이네요. 본인이 제작한 영화의 배우라고(웃음). 글쎄요. 그러려고 노력은 하는데 그런지는 잘 모르겠어요. 내 안에 있는 의외의 모습, 표정들을 보여주려고는 했는데, 내가 이제까지 보여주지 않은 표정을 보이려고 의도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후시 녹음할 때 제가 나온 모습을 보면 생소한 내 표정이 있더라고요. 이제까지 연기하면서는 그런 표정으로 연기한 적이 없었던 거죠. 그런 정도까지의 감정 극대화도 없었을 테고요. 그런 순간의 다른 모습을 봤을 때 박진표 감독님이 조금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손예진이라는 배우는 욕심도 많고 똑 부러지는 성격일 것 같아서 철저히 준비하고 계산하고 완벽하게 소화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배우일 거라 예상했거든요. 그래서 그동안 손예진이라는 배우를 떠올렸을 때 동물적인 감각을 크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연기하면서 이제까지 제가 맡았던 역할에서의 아픔과 슬픔의 표현들이 극적인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드라마에서 갑자기 누가 죽고 그래서 오열하는 건 찰나로 보이는 모습들이고 영화는 오랫동안 잔상이 남잖아요. 그래서 영화에서는 특히나 힘든 영화를 많이 찍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힘들고 감정 소모가 다른 건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최근에는 더 그랬던 것 같아요. <오싹한 연애>도 그 인물의 아픔이 있었지만 로맨틱 코미디에 가까운 멜로의 느낌이었잖아요. 되게 오래됐더라고요. 절절한 멜로도 <내 머릿속의 지우개>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고요. 최근 <타워>도 그렇고, <백야행>도 그렇고 어떤 부분에서는 표현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도 제 연기론이나 연기관은 사실 연기를 최대한 덜 하고 싶거든요. 그러다보니 어떤 동물적인 감각이 필요한 부분도 좀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역할도 그랬던 것 같고요. 그런 동물적인 감각이 자기도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더 재밌고 더 매력 있게 다가오는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공범>이 필모그래피에서 연기적으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나요?
연기적으로 대표작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솔직히 들어요. 누가 제게 대표작이 뭐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보더라고요. 잘 모르겠더라고요. 하나를 꼽기가 참 애매했는데, <공범>이 됐으면 하는 욕심은 있죠.
요즘 정신없을 것 같아요. <해적> 촬영도 하랴, <공범> 홍보도 하랴(웃음).
불안한 마음도 있고, 또 좋게 봐주지 않을까라는 설렘도 있지만 흥행이라는 것은 내 의지대로 되는 건 아니잖아요. 차라리 <해적> 촬영을 하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오싹한 연애> 개봉할 때는 한 달 간 잠을 못 잤어요. 그때도 신인 감독이었고 후배와 연기해서 제가 짊어져야하는 것들이 너무 무거웠어요. 그래서 <타워>를 선택한 것도 사실 그런 짊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웃음). <공범>은 제가 오롯이 갖고 가야 할 게 많은 영화라 걱정이 되죠.
배우로서의 끝까지 가져가고 싶은 목표가 있나요?
장기적으로 뭔가를 결정해도 잘 안 될 것 같아요. 그런 생각은 해봤어요. 언제까지 연기를 하게 될까, 나이가 들면 어떤 연기자가 될까, 하는 생각. 선배 배우들이 어느 순간이 되면 엄마 역할을 해야 하고 욕심을 버려야하고 그런 이야기들 하시잖아요. 왠지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마음은 들지만 막상 그 순간이 되면 서글퍼질 것 같기도 해요. 그래도 저는 김갑수 선배님이든 김해숙 선배님이든 그 모습이 너무 좋거든요. 윤여정 선배님도 굉장히 활동 많이 하시고요.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분명 그 힘든 과정을 겪었을 테니까 나도 그 과정을 잘 이겨내고 나이 들어서도 멋지게 하고 싶다는 생각은 해요.
여배우로서 선택의 폭이 좁다고는 하지만 그 안에서 나름의 다양한 선택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연기 자체, 배우라는 직업에 대해서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잘 모르겠어요(웃음). 하루에도 생각이 계속 변하거든요(웃음). 그럴 때도 있고, 어떨 때는 조금 지친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고요. 지금 제 시기가 작품을 연달아 해서 살짝 그렇거든요. 그러다가 <해적>을 찍을 때는 순간 재밌거든요. 남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저 혼자 슬럼프나 매너리즘에 빠지는 순간이 분명 존재하는 것 같아요. 특히 연기적인 것들에 있어서는요. 다양한 걸 하는 재미는 확실히 있는 것 같아요. 여러 사람과 하는 작업의 재미를 <타워>할 때 처음 느꼈기 때문에 그 부분이 좋았고, <해적>도 여러 사람이 함께 나오는 작품이라 또 하게 된 것도 있고요. 연기적인 부분에서의 욕심은 예전에는 그냥 욕심만 있었다면 지금은 조금 내려놓은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내가 하고자 하고 억지로 하고 싶었던 것들이 그렇게 해서 나오면 너무 좋겠지만 안 되는 순간도 있는데 그럴 때면 날 너무 힘들게 하는 거니까요. 나한테 조금 아니었어, 라고 생각이 드는 작품도 순순히 인정할 수 있는 여유가 분명 필요한 것 같아요. 나이가 드니 그런 부분이 점점 생기는 것 같아요. 무슨 원로배우가 이야기하는 것 같네요(웃음).
사진_김재윤 실장(studio ZI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