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 사실 내 텃밭이야. 텃밭. (웃음)
그런데 한참 연극하던 예전에 비해서 대학로의 경관이 많이 달라졌다. 낯설진 않나?
많이 달라졌지. 건물들이 점점 고급화되는 것 같고. 물론 이렇게 되는 건 좋은데 연극무대는 이제 옮겨져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이제 연극공간이 점점 없어지고 있거든. 왜냐면 연극 극장이란 게 건물에 속해 있는데 이렇게 건물들이 주점화되고 상업화되다 보니까 건물주들이 건물 임대료를 점점 올려. 임대료가 올라간다는 건 연극의 제작비가 올라간다는 거고, 제작의 여건이 힘들어진다는 거고, 그만큼 연극을 하기가 더 힘들어진다는 거지. 그니까 지원금을 못 받으면 아무 것도 못하게 되는 거야. 4~5년 전만 해도 소극장이 한 달 공연하기 위한 예산이 한 3~4천(만원) 정도였는데 요즘은 억 단위까지 가더라고. 그만큼 배로 뛰었지. 옛날엔 그래도 오백(만원)에서 천만(원)이면 했거든. 요즘은 꿈도 못 꿔. 지원금 없이 절대 안되지. 쉽게 말해서 요즘에 영화 한편을 단 돈 1억만으로 찍기 힘든 것과 똑같아.
그런데 대학로 같은 공간적 대안이 없다는 것도 문제 아닐까?
여기는 이동 인구는 많은데, 그 사람들이 다 극장에 오는 건 아니라고. 어쩌다 극장에 왔다가도 술집 보고 ‘야, 여기 분위기 좋네’, 하고 이쪽으로 다시 오는 거지. 난 문화적 공간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예를 들면 한곳에 딱 포진된 예술의 전당 같은 곳처럼, 거길 갈 땐 아예 문화라는 체험 그 자체를 마음먹고 가는 거잖아. 난 그래서 용산 같은 곳으로 옮겨지면 어떨까란 생각을 자주해. 물론 거기에 극장 용도 있고 국립박물관도 있지만, 거기에 중소극장들이 옮겨가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어. 공원도 가까우니까 어느 극장 갈까 둘러보다가 자연도 보고, 그런 공간으로 좀 이동했으면 좋겠어. 음주문화와 거리를 둔 순수한 예술적 공간으로 변모할 수 있게.
그런 의견을 주변의 지인과 나눠본 적은 없나?
지금 대학로에서 연극하는 집단들이 ‘우리 떠나야 된다’는 마음을 많이 갖고 있어. 그래서 실제로 대학로에서 공연 안 하겠다는 친구도 많고. 사실 대학로의 처음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서는 문화 공간이 많이 생겨야지. 갤러리가 생기든, 극장이 들어서든, 그래서 하나의 문화 공간으로서 대학로를 느낄 수 있어야 되는데 요즘은 그저 술집 많고, 먹거리 많고, 그저 그런 공간으로만 변질되어가니까 아쉽지.
대학로가 지닌 문화적 정체성이 상실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정체성이 많이 없어지고 있다고 보지. 사실 극장이 좋아야 공연을 좋아하게끔 끌어들일 수도 있는데 어렵게 저런 지하에 극장을 만들었다 이거야. 얼마나 옹색하겠어. 물론 소극장이 나쁘다는 건 아니야. 그런 소극장도 필요하지. 하지만 그것이 소극장이 지향하는 하나의 컨셉에 걸맞은 필요성에 따른 크기와 규모인가란 것이지. 질적으로 향상돼야지, 그게 아니라 단지 열악한 이유 때문에라면 힘든 거잖아. 작고 아담해서 단순히 귀엽고 예쁘다 할 수도 있지만 막상 의자 불편하고 그러면 다시 오고 싶지 않지. 솔직히 영화도 의자가 편한 극장에서 보고 싶어하잖아. 물론 진실되게 땀 흘리는 연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게 얼마나 되겠어. 그런 면에서 우리도 좀 더 좋은 소극장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을 좀 찾아야겠다 싶은 거지. 그래서 어딘가로 이동해서 다시 한번 포진을 잡던지 해야 되는데 아직까지 그러기엔 우리 여건이 열악하지. 사실 문화에 대한 인식이 열악한 탓도 있고.
어쨌든 이젠 연극 배우보단 영화 배우란 타이틀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필모그래피를 보니까 작품 수가 어마어마하던데.
이젠 그렇게 돼버리네. 연극을 하도 못하니까. 이제. 그렇다고 어마어마하진 않을 텐데. (웃음)
물론 단역으로 출연한 작품도 있지만 어쨌든 출연 편수가 상당하더라. 그리고 인상적인 작품들도 눈에 띠고. <야수>는 정말이지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다.
<야수>가 잘됐어야 했는데. 아~! (웃음)
흥행은 실패했지만 손병호란 배우 개인에겐 상당히 많은 것을 남긴 작품일 법 한데.
진짜 영화 배우라는 각인을 시켜줬으니까, 그래서 난 개인적으로 고마운 작품이지. (권)상우와 (유)지태가 들으면 미안하지만, 솔직히 자기들도 잘 알아! (웃음) 지태는 특히. 지태는 욕심이 많은 친구야. 그래서 지태가 내 역을 너무나 하고 싶어했지. 지태가 정말 좋은 배우라고 생각하는 게 마인드가 참 좋아. 젊은 시절의 청춘 스타보단 진짜 배우가 되고 싶어하는 거야. 배우로서 막 이기고 싶은 거야. 그래서 유강진을 그렇게 하고 싶어했던 거고. 자기가 조금만 더 늙었다면 그 역을 했을 거라면서 ‘선배님, 전 정말 빨리 늙고 싶었어요’ 그러더라고. (웃음) 며칠 전에도 전화 왔었어. 대학로에서 술 먹다가 전화해서, ‘형님, 형님 최고야!’ 이러더라고. 그래서 대답했지. ‘미안한데, 그래도 나 못나가.’ (웃음)
그런 이야기 들으면 그래도 뿌듯하겠다.
그런 말만 해줘도 고맙지. 사람이 만나면 서로의 장단점이나 모자란 점도 다 보이는 건데 서로가 그걸 다 이해하고, 격려해주고, 보완해주면 그게 다 좋은 거잖아. 미운 사람보단 예쁜 사람을 더 챙겨주고 싶은 것처럼, 그런 인간적인 면에서.
가끔 연기를 통해서 사람의 선과 악은 백지장 차이란 생각이 들게 만든다. 그래서 말인데, 사람은 본래 선하다고 생각하나, 악하다고 생각하나?
난 항상 성선설을 주장하지. 그렇기 때문에 영화에서도 그런 모습이 나올 거야. 선천적으로 인간이 나쁘다고 보지 않아.
그렇다면 왜 사람이 악해진다고 생각하나?
환경이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거지, 특히 어릴 땐 부모와 환경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해. 가정 교육도 그래서 필요한 거고. 지금 문제아라고 불리는 청소년들 보면 그 친구들 가정의 절반은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야. 부모가 이혼했거나 자식에게 어떤 애정이 없어서 방관했거나, 어릴 때 다독거려줘야지. 스킨쉽이 부족한 거야. 인간은 체온을 느끼면서 마음의 정서가 열린다고 생각하거든. 그리고 그렇게 교감이 트이면 내 마음도 훈훈해져. 이런 교감이 차단되고, 마음이 차가워지고, ‘너 뭐하는 거야! 저런 자식을 내가 왜 나아가지고.’ 이런 말 한마디에 그 사람의 마음은 이미 비뚤어지기 시작하는 거지. 그럼 그 사람이 사회를 보는 눈이 어떻겠어. ‘그래, 나 비뚤어진 놈이야. 누가 날 낳았어. 사회가, 너희들이 날 이렇게 만들었잖아’, 그래서 사회에 반항하고, 뭔가 불만만 터뜨리게 되고, 보는 사람마다, ‘왜, 나한테 뭐 불만 있어?’ 이렇게 되는 거지.
후천적이란 말인데, 그럼 다시 선한 사람으로 교화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하나?
그 사람과 다시 한번 정서적인 교환을 하거나, 조금씩 좋은 생각을 하게 만들면 교화시킬 수 있어. 결국 난 충분히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단지 그런 환경 자체가 그 사람을 몰아세우는 것이니까. 민기자가 한 달간 배가 고팠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런데 저 안에 먹을 거리가 있어. 그럼 결국 장발장이랑 똑같을걸. 장발장이 무슨 나쁜 사람이라 빵을 훔쳤나, 정말 배고파서 빵 하나 먹었을 뿐인데. 물론 훔친다는 게 죄겠지만 순순히 부탁하면 안 주는걸. 배고픈 사람에게 뭔가 줄 수 있어야 될 거 아닌가, 사회가, 아니면 인간이. 그러면 그 사람 감동받을 거야. 은혜를 입어서. 그렇지 못한 사회니까 훔쳐야 된다고. 사람을 자꾸 그렇게 만드는 거야. 환경이. 옛날엔 시골에서 잔치 있으면 거지도 불러서 먹였다고 하잖아. 그게 정이거든. 없는 사람, 있는 사람 같이 나눠먹는 정. 근데 점점 각박해지는 거지. 더군다나 요즘 사회는 있는 사람, 없는 사람 점점 빈부차가 심해지고, 또 일류끼리만 놀고, 거기에 못 끼면 완전 무시하고.
사회가 점점 몰인정해지는 건 사실인 것 같다. 그런 생각이 연기에 직접적으로 미치는 영향도 있을 것 같다.
영화마다 이 친구가 왜 이 지경으로 될 수 밖에 없었는지 그 요인을 찾는다. 그게 시나리오에 직접 나와 있기도 하지만, 숨어있기도 하고, 그걸 내가 찾아서 내 마음 속의 적절한 지점에 담는 거지. 어떤 것에 의해 내가 이렇게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그래서 이런 불만이 생기고, 그것 때문에 어떤 욕망이 생긴다는 것을, ‘그래, 네가 날 이렇게 했어?’라는 생각을.
결국 환경에 따라서 악함도 정의된다고 할 수 있겠다.
어떤 똑같은 환경인데도 사람에 따라 ‘내가 어떻게 할까’란 생각은 다 다르겠지. 그리고 행동도 마찬가지일 테고. 그래도 악한 사람은 없어. 단지 생각이나 마인드가 부여하는 가치의 차이지. 물론 아닌 사람들도 있어. 내가 <무방비도시>에서 형사를 연기해서 이번에 강력반 형사를 만났는데 형사님한테 똑같은 질문을 했거든. ‘형사님은 인간이 악한 거 같나요, 선한 거 같나요?’ 그럼 나하고 반대야. 형사가 되기 전엔 인간이 선하다고 생각했는데, 강력반 형사가 되니까 인간은 악하다고 생각이 변했대, 자기는. 내가 만약 형사여서 수많은 범죄자를 대하고 악한자만 상대하면 ‘정말 인간은 악한 놈이구나. 정말 태어날 때부터 악마가 있는 게 아닐까?’ 란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감히 말하기가 두렵긴 하지만 그래도 내 스스로는 난 선한 쪽이라고 생각해. 난 선해, 아직까지. 결국 그런 생각도 환경에 따라서 이렇게 틀릴 수가 있겠단 생각이 드네.
하지만 솔직히 <야수>의 유강진은 선천적으로 악하다고 느껴졌다. (웃음) 물론 그 완벽한 악함이 한 순간 무너지던 순간이 있었지. 자식 앞에 있을 때만큼은 어쩔 수 없더라.
자기 가족 앞에서는 누구도 악인이 될 수 없을 것 같다. 물론 그런 아버지들은 있겠지. 가족을 버리고, 책임지지 않고. 대신 그런 아버지라면 보스가 될 수 없겠지. <대부>를 보면 패밀리가 제일 중요하다고 하잖아. 그리고 유강진이 그렇지. <야수>에서 ‘나는 이 사람이 날 배신해도 이 사람을 버리지 않아.’라는 유강진의 대사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만큼 유강진은 힘이 있었고, 그 힘이 보스의 힘이라고 생각하고. 버리지 않고 날 배신한 이조차 내가 감싸 안는 것. 얼마나 노력했겠냐고, 뭐든지 어떤 식으로도 노력하지 않으면 이루어낼 수가 없어. 리더라는 건, 내가 먼저 보여주고 내가 먼저 베풀지 않으면 날 안 따라와. 안 그렇겠어? 친구들한테도 내가 먼저 베풀고 내가 먼저 전화해야지, 날 더 기억해주지. 그렇지도 않으면서 이 친구들이 날 사랑해 줄거라 믿으면 그건 천만의 말이지. 그런데 유강진은 그런 인물이라고. 그럼 가족은 당연히 지키지. 가족이 생명인 걸, 가족 때문에 그러는 걸. <가족>을 지키고자 하니까 욕망이 생기는 걸. 만약 가족이 없었다면, 유강진은 국회의원 될 필요도 없었을 거야, 아마. 그냥 군림하다가, 흥청망청 살다가 망가졌겠지. 마약이나 하고. 하지만 가정이란 게 있으니까 욕망이 꿈틀거리지. 아버지로서 사회적 신분을 얻고 싶은, 자기가 국회의원이 된다면 어떤 이들도 깡패라고 함부로 말하지 못하거든. 그게 다 자식을, 가족을 위한 거죠. 그러니까 국회로 가는 거야. 난 그게 자식을 위해서라고 생각해.
가족을 명예롭게 하기 위해서?
그렇지. 난 아직까지 어린애가 다섯 살 밖에 안돼서 잘 모르는데, 우리 선배 중 한 분이 애들을 다 유학 보내고 기러기 아빠야. 왜 보냈냐고 하니까, 그것 참 신기하대. 그냥 TV에서 악역을 좀 많이 하다 보니까 아이가 학교에서 그렇게 놀림 당한다는 거야. ‘네 아빠 나쁜 놈이지’ 이러니까 얘는 충격이지. 몰랐어. 나도 그 정도까지 심할 줄은. 그런데 애들은 그렇게 놀린다고 하더라고. ‘너 나쁜 놈이지, 너희 아빠 나쁜 놈이니까 너도 나쁜 놈이야.’ 이런다는 거야. 그래서 그 애가 아버지랑 말도 안 했대. 그래서 ‘너 왜 그러냐?’ 물어보니까 ‘아빠, 그런 역 좀 하지 마요. 나 학교 가기 싫어.’ 이랬다는 거야. 거기에 충격을 받아서, 이거 안되겠다 싶어서 떠나 보낸 거지, 캐나다로, 가족 다. 그만큼의 환경이 중요하더라니까.
그런데 본인도 악역을 많이 하지 않나? 걱정 좀 안되나? (웃음)
그래도 내 딸은 아직 어리니까. (웃음) 다섯 살 유치원 짜리니까. 그리고 난 영화 하니까! TV는 잘 안 하잖아! (웃음)
부인께서는 악역을 자주 하는 것에 어떻게 생각하던가?
내 와이프가 송일곤 감독의 첫 영화 <소풍>에 같이 나왔잖아. 그전에 자기도 무용 공연하고. 물론 이제 내 와이프는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이 아니란 거 알잖아. 그런데 뭐 영화적인 면에서 강인한 연기 코드를 지녔을 뿐이니까 괜찮아. 대신 마음속엔 조금 있겠지. 조금 더 좋은 역을 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겠지.
그럼 요즘엔 더 뿌듯하시겠다.
그런데도 사람의 욕심이란 게 참 끝이 없어. 성이 안 차는 거야. 물론 내가 원해서 하는 경우도 있지만 나도 생활인이잖아. 경제란 게 필요하고, 가정이 있으니까. 필요해서 할 수 밖에 없는 배역이 있고, 하기 싫어도 해야 될 때가 있고. 다만 고마운 건 날 이제 만났던 감독이나 모든 사람들이 욕하지 않는다는 거. 조연출들이 만날 때마다, ‘저희 조연출들의 첫 상대가 선배님이신 거 아시죠. 입 봉하면 선배님 꼭 잡고 싶은 배우 선배님이 1위입니다.’ 라고 하면, ‘꼭 입봉하쇼.’ (웃음) 그런 말들이 고맙더라고. 그런 말이 내 힘이 되지. 하지만 배우는 항상 염려스러운 게 있어. 수많은 배우들이 그렇지만 어느 날 주목 받다가 어느 날 사라질 수 있거든. 진짜 두렵잖아. 내가 지금은 이렇게 인터뷰하고 그래도 어느 순간 날 아무도 안 찾아주면 난 두렵다니까. 그런 강박 관념이 있어, 배우들은. 그건 어쩔 수 없어. 그런 것들과 계속 싸워야 되는 거지. 생각보다 힘들어. 그게.
아무래도 인상이 강한 것이 그런 캐릭터를 자주 맡게 되는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되는데, 혹시 그로 인해서 손해 본 건 없나?
조금 괴로웠다. 어릴 때부터 눈매가 좀 강해서. 흰자위가 너무 많으니까. 조금만 눈을 부릅떠도 사람을 잡아먹을 듯 해 보인다는데. 어쩌겠어. 생긴 게 이런 걸. (웃음)
반면 우직한 신뢰감도 느껴진다.
고집스러워 보이니까. 자기 신념을 지킬 것 같고. 그런 점에서 보면 또 나쁜 건 아닌 것 같아. 어쨌든 배우로서 강렬하게 보인다니까.
<바르게 살자>의 경찰서장 이승우 역할은 좀 애매모호한 역할이다. 얄팍한 듯 하면서도 강직해 보이고, 얼핏 보면 악역인 척하는 인물처럼도 보인다.
악역인 척한다기 보단 얘가 좀 명석하고 두뇌가 빨랐던 거지. 정치를 너무 잘 한다는 거야. 매스컴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는 놈이고, 이걸 어떻게 이용해야 대중들의 심리를 잘 구슬려 볼 수 있다는 걸 알고. 그러니까 그걸 감행하는 건 매스컴을 통해서 상황을 수습하려고 했던 거지. 그래도 정직한 놈이야. 아무래도 이승우가 내가 연기한 캐릭터들 중에서 저하고 좀 비슷한 거 같아. 그니까 본질에 대해서 어떤 것이 옳다는 걸 분명히 알지만 내가 이걸 옳다고 주장만 한다고 해서 되진 않는다는 거지, 이 사회가. 그래서 어떤 이슈를 벌려야 돼, 매스컴을 통해서 한마디 했을 때, 이게 더 천파만파란 거지. 내가 백날 혼자 떠들어봤자 미친 놈 취급만 당하고 앉아있어야 하는 거야. (웃음) 그런데 똑똑한 놈이라면 어떤 걸 통했을 때 진실이, 아니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명확성이 더 정확히 꽂힐 수 있는가를 아는 거야. 그런 면에서 이승우는 명쾌한 놈이고 똑똑한 놈이지.
일단 이승우는 나쁜 놈은 아니라는 거지. 너무나 똑똑하고, 사회의 구조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그 시스템을 끌어들였는데 그게 잘못이었어. 한 인간의 진짜 정직성에 이승우의 명석한 수가 반대로 당한 꼴이니까. 왜냐면 이승우는 정도만이 정직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선택한 거잖아요. 어수룩하게 선택한 게 아니라 그런 고집 있는 애가 필요하고,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거죠. 물론 한 켠엔 얘가 제대로 해낼 까란 의심도 있었겠지만 그 안에선 정도만 밖에 없었던 거지. 그런데 얘가 예상 밖으로 앞서갈 때, 화는 나지만 그를 통해서 깨닫게 된 거죠. 그래서 놔두지. ‘끝내라면 끝내겠습니다.’라고 하는데, ‘아니야. 어차피 이제 다 포기했고, 어디 한번 가보자. 내가 굴복하든 나도 한번 너하고 싸우고 싶다. 진정으로 싸움하자. 너 같은 애가 없어서 내가 못 싸워 본거다.’라고 마음먹은 거야. 그래서 그냥 적당히 보여주고 풀려고 했는데 정말 정직한 놈을 만나서 진짜로 가는 거지.
어쩌면 정도만을 통해서 이승우란 인물의 본질이 복원되는 것 아닐까?
도지사와 대화하는 씬에서 도지사가 내가 와서 어쩌고 하는데, ‘도지사님, 방해하고 계시거든요. 가시죠.’ 냉정하잖아, 이승우가 나쁜 놈이라면 벌써, ‘아 오셨어요~.’ 이러면서 아부 떨었겠지. 그건 아니라고. 일에 대해 철저한 놈이야. 너무 철저하다 보니까 그 철저성에 대한 자신의 가오, 무너뜨리기 쉽지 않은, 자존심이 많은 사람이지. 대신 자존심을 건드리니까 거기서 이제 끝까지 가는데 결론적으로 옳은 건 옳다고 인정하고, 대신에 자신의 임무가 있으니까 잡아들이자고 애쓰는 거지. 그리고 다시 복권시키고, 복직시키잖아. 그러니까 참 메리트 있는 인물이야, 이승우가. 그래서 난 처음에 시나리오 보고 너무 좋았어. 철저하게 필요한 사람이야, 현실적으로. 현실적인 처세에 능하지만 마음속에는 바르게 살자고 하는 정도만 같은 색깔을 갖고 싶어하는 사람. 단지 그렇게 살아봤자 이 세상 날 그렇게 봐주지 않는다는 걸 아니까 다른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는 사람. 하지만 마음속으로 그리던 정도만 같은 인물을 봤을 때, 끝까지 한번 가고 싶은 거지.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따라서 그걸 스스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람. 멋있잖아. 크으~! (웃음)
그런데 항상 리더역할을 많이 하는 듯싶다.
그게 아무래도 성향 같아. 실제로 내가 회장직을 세 개 맡고 있거든. (웃음)
아니, 어떤 회장직을 세 개씩이나.
그러니까 <먼 길>팀의 회장직을 맡고 있고, 산악회 회장직하고 스쿼시 동호회 회장직을 맡고 있지. 그게 성격 때문 같아. 리더라는 건 좀 나서고 싶어하고, 어떤 일을 할 때 결속적으로 책임감 있게 밀고 나가는 사람이잖아. 리더는 말보다 행동이 제일 중요한 거 같아. 그런 면에서 내가 제일 신뢰하는 건 말보다는 행동이거든. 말은 누구도 다해, 사실. 말로만 아프냐고 묻는 사람보단 캔 하나 사가지고 말없이 먹으라고 하는 사람이 더 따뜻한 사람이잖아. 말없이 그런 사람이 정말 리더거든.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 욕심이 큰지도 모르겠지. 또 하나는 이제 모임을 갖다 보면 내가 분위기 메이커 노릇을 하게 되더라고. 연기자를 한 10년 하다 보면 무당 된다고 그래. 그래서 어떤 사람과 한 시간 동안 얘기하다 보면 ‘저 친구는 어떤 성격이구나, 저 친구는 어떻게 치고 들어가야 편하겠구나, 이렇게 하면 이 친구가 되게 불안해하겠구나’ 이런 걸 내가 빨리 아는 거 같아. 그러니까 빨리 친숙해지는 거지. 빨리 끌어오는 편이야. 내가.
그래서인지 나도 처음 만났는데도 참 편하다. (웃음)
그러니까 이게 편하게 사람을 끌어오는 거야. 끌어오다 보면 모이게 되고, 그런 다음엔 계속 모이게 되고, 그러다 보니까 모든 사람들이 회장을 맡아라, 그러는 것 같아. 그리고 난 정말 내 말에 책임을 지려고 하거든. <먼 길>팀도 신년회 때 내가 건방진 말을 했었는데 결국 했어. 내가 제작해서 우리가 단편도 만들었거든. 어차피 우린 영화 만남이니까, 우리 <먼 길> 영화팀 거기 다 있거든. 다들 프로페셔널이야. 우리 <먼 길>팀이.
<먼 길>이라면 <엄마>말인가?
그렇지. <엄마>팀이 다 모인다. 지금도 한 달에 한번씩 만나는데, 그게 벌써 2년 넘었잖아. 그 모임을 갖고 오다 보니 내가 한가지 깨달은 건 우리가 다 프로들인데 가격으로만 따져도 이게 지금 몇 백억의 자산 아닌가, 근데 우리가 술만 마시면 무슨 재미가 있겠냐, 영화로 만났는데 뭔가 좀 영화적으로 후배들한테 본보기가 되려면 우리도 영화작업을 하는 게 좋지 않겠냐. 해보자, 우리끼리. 우리가 배우 다 있고, 촬영감독, 조명, CG 감독, 녹음실 대표 다 있으니까 못하는 게 없지 않나.
모임 자체가 거의 프로덕션 급이다. (웃음)
프로덕션이지. 그래서 그런 꿈이 생기더라고. 왜 우리가 투자에 목숨을 걸고 우리가 끌려가야만 하나, 난 영화는 아직도 감독이 살아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그런데 감독이 다 죽었잖아. 자기 색깔 내는 감독이 별로 없어. 이창동 감독이나 박찬욱 감독 같은 성공한 몇 명을 제외하면 없지. 하지만 그 분들도 투자자들한테 동의를 얻어야 되거든. 난 구성주 감독이 갖고 있는 힘이나 재치, 상상력이나 인간적인 마인드가 너무 좋아. 그래서 그 사람과 친숙해지고 용기 주고, 같이 어울려서 다음 작품 기약하고, 담에 또 만나면 해보자, 이렇게 되다가 이제 다음 작품을 단편으로 만들어보자 까지 온 거지. 그래서 이제 일이 추진되고, 단편을 만들었잖아. 그건 너무너무 행복한 거야. 그런 행동이란 게 난 중요하다고 생각해.
솔직히 쉬운 일은 아닐 것 같은데, 본인의 말에 대한 어떤 책임감을 많이 느끼나 보다.
내가 말을 뱉은 이상 책임을 져야 된다는 게 중요하지. 물론 다 지킬 수 없을지도 몰라. 나도 인간이라 그럴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10가지 중엔 한 8가지 정도는 지켜야지. 그니까 말이 중요하다니까. 그러니까 말을 함부로 뱉지 못하는 거지. 다른 사람들이 그걸 보고 있을 거 아냐, 또 내 얘기를 들을 거 아냐, 또 글을 읽을 거 아냐, 그럼 정말 저렇게 하는지 볼 꺼 아냐, 물론 내가 그렇게 쉽게 말하는 건 아닌데 하여튼 그만큼 말이 중요하다는 거지. 정말 옛말이 그른 게 없어, 말 한마디로 천냥 빚 갚고, 사람을 울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고. 하여튼 말을 뱉은 이상 그 책임을 분명히 져야 된다라는 거.
그런 면에서는 이승우란 캐릭터가 상당히 와 닿는다.
그렇지. 이승우는 자신이 뱉은 말에 대해서 책임을 졌으니까!
물론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하긴 했지만 끝까지 지켜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안 그런 놈이라면 다른 수습을 했겠지. 머리가 빠른 놈이니까. ‘넌 정리하고 뒤로 돌아가’라고 명령했겠지만 정작 내 가슴은 쓰라리겠지. ‘난 이런 적 없었는데’라고 생각했을 테니. 한편으로 이승우는 저런 친구를 만난 적이 없었는데 ‘아직 시대가 살아있구나’라고 생각했겠지. (웃음) 기분 좋았을 거야. 그 친구가 드러내진 않았지만.
<바르게 살자>는 장진 감독 특유의 연극적 코드가 강한 작품이다. 그런데 <바르게 살자>가 하나의 연극이라고 생각해본다면 은행은 하나의 무대라고 볼 수 있고, 이승우란 역할은 그 연극의 연출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 그럴 수도 있지. 맞네. 밖에서 다 연출하는 거지. 그런데 연출이 잘못된 거지! (웃음) 가끔 그럴 때 있거든. 연기자는 무대에 생활화되려 하고 그 인물이 돼버려, 완전. 사실 그 인물이 되면 안되거든. A도 아니고 B도 아니고 C의 인물을 만들어내야 되는데 그에 몰입해버리면 그 인물이 된다고 생각해버리는 사람도 있거든. 그건 연기가 아니야. 그건 나쁜 연기지. 연기를 그럴 듯하게 만드는 것이지, 내가 그 사람이 될 순 없어. 그건 잘못된 상상이고, 연기 안에서 저 사람은 저 사람이야. 손병호도 아니고 이승우도 아닌 걸 합쳐서 새로운 인물을 만들어내는 게 연기자지, 그게 좋은 연기고. 어떻게 내가 이승우가 돼. 손병호가 어떻게 완전히 없어져. 안 없어지지. 내 눈이, 내 코가 있고, 버릇이 있고, 목소리 톤이 있는데 어떻게 변해. 단지 이승우의 마인드 자체가 내가 갖고 있던 마인드에서 내가 그 사람을 닮아가려고 각자 분량의 소스를 바꾸는 거지, 비율을. 여럿 비율을 바꿔서 이 사람화되려고 노력하지만 내 비율의 반은 내가 갖고 있어. 이 사람 반의 비율을. 생각의, 마인드에 대한, 철학에 대한 비율도. 그래서 그게 교차돼서 새로운 생각과 사고가 생기고, 그 때문에 행동하게 되고 보게 되는 거지.
그래도 자신을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캐릭터에 동화되기도 힘들지 않나? 그런 경지에 오르면 그게 진짜 엄청난 연기가 아닌가란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물론 그럴 수도 있지. 그리고 그런 경우에 연출만 잘 하면 될 것 같은데, 흔한 말로 ‘이거 또라이 아냐’란 말 하잖아. 왜 군대에서도 뭐라 하잖아, 고문관이라고, 고문관. 그런 사람 있다니까. 연극하는 후배들 중에도 어느 날 같이하다 보면 완전 몰입해서 앞뒤 계산 없어지는 녀석들도 있거든. 연극은 연극다워야 좋지만 또 하나의 약속이 있는데 그걸 넘어서는 사람이 있는 거지. 영화 촬영 중에도 카메라가 여기 있는데 혼자 저기 쳐다보면서 몰입하면 좋겠어? 안 되잖아. 연기자는 그걸 지켜줘야지. 그런데 지나치게 몰입해서, 평상시에도 그 역에 빠져가지고 정신 못 차리고 있으면 그냥 때려주고 싶지! (웃음) 정도만이 그런 거야. 연출을 해야 하는데 너무 빠져버린 거지. 근데 어쩔 수도 없는 거야. 연극은 시작됐어. 무대는, 관객 앞에서 시작했다고. 연습도 안 했지만, ‘너 괜찮지. 할 수 있지. 자, 너 믿고 간다. 진짜 네 맘대로 해봐.’ 그런데 거기까지 갈 줄은 몰랐지. (웃음) 무대에서 약속대로 안 하는 거지. ‘야! 너 왜 그래! 임마!’ 이러는데 관객이 그걸 또 봤잖아. 미치는 거지.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되는 거야. 계속 ‘야, 네가 들어가서 쟤 끌고 와.’ 그런데 그것도 안 되니까 미치는 거지. 무대에서. 그거랑 똑 같은 거 같아. 어쨌든 딱 맞는 비유네. 연극과 연출이라, 하나 건졌어. (웃음)
결국 정도만이란 인물이 연출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혼자 즉흥적인 연기를 펼친 셈인데 궁극적으로 연극 자체는 성공한 것 아닐까?
살았지! 연극은 살았어! 그 예측할 수 없는 파장이 재미있지! 그것도 내가 어쩔 수 없는 거야. 관심이 없으면 모르는데 관객들이 재미있어하거든. 처음엔 별 반응을 안 보이던 관객도 너무 재미있어한단 말이야. 그럼 여기서 끌어낼 수도 없고, 막을 내릴 수도 없어. 그럼 관객들 미쳐. 막 내리면 이거 우리가 다 환불해줘야 돼. 그럼 안 되잖아, 그건. 어떻게든 가보는 거지. 그래서 가잖아. 관객들 눈치보고. ‘야, 끝까지 조심해. 일단 못나가게 막고 보자. 그리고 쟤도 그 이상은 못하게 해. 이 정도 선만 지키게 만들어. 자기가 결정짓게 해봐. 일단 잘 가고 있어. 그냥 끝까지 가.’ 그래서 끝까지 지켜보는 거지. 그리고 끝나고 나서 엄청 박수가 쏟아지는 거고. 하지만 연극으로 따지면 롱런 했지만 결국 대박은 안 나는 거지. 연극이 일관성이 없잖아. 다시 만들 수 없는 무대야. (웃음)
하지만 배우로서는 인정해줘야 되는 거 아닌가?
난 끝나고 나서 배우로서 자격을 인정해주는 거지. ‘인정한다. 너 정말 배우로서 아주 뛰어난 놈이고, 넌 배우 자격 있어. 하지만 이제 너하고 다시 작품할진 모르겠다.’ (웃음) 그렇게 되겠지. 무서워서 다시 하겠어? (웃음)
<바르게 살자>엔 연극 무대 출신 배우들이 많이 등장한다. 비슷한 계보를 걷고 있는 배우들과 함께 촬영한다는 게 반가웠을 것 같은데.
장진 사단만의 영화들이 그런 독특한 형태나 구조를 낼 수 있는 건 이유가 있어. 한 달간 연습을 하거든. 무대에서 씬 하나를 놓고 계속 만들어보는 거야. 연극 연습이랑 똑같지. 장진 감독하고 라(희찬) 감독도 보면서, ‘뭐, 불편한 거 있어요?’라고 묻고, 그럼 ‘이 구조가 좀 뭔가 그렇지 않나?’ ‘아, 그런가?’ 이런 식으로 배우와 감독이 의견 교환하면서 새롭게 고치고, 쓰고. 이렇게 연습하니까 뭐 그냥 영화 찍는 거지. 연극 연습한 걸 그대로 찍는 거 같은 거야.
하지만 무대와 현장과의 괴리감도 발생할 법한데, 그런 건 어떻게 극복하나?
물론 현장에 오면 카메라 구도에 신경을 써야 하지면 동선이나 연기적인 약속이 다 되어있으니까 훨씬 더 편하고 연극적일 수 밖에 없지. 상호 다 아니까. 단지 그걸 어떻게 영화적인 표현으로 카메라에 담을 것인가는 우리가 고심을 못 했겠지. 그건 이제 스텝 쪽에서 할 일이고, 라 감독이나 촬영 감독이 할 일이니까. 그러면서 이제 그 쪽은 우릴 믿으면 되는 거고. 그쪽도 리허설 보면서 어떻게 찍을까, 어떤 표정이 나을 것인가, 어떻게 가야 한다는 걸 아니까. 그니까 하나의 소재가 연극적으로 다 나오는 거지. 이게 좋을까, 저게 좋을까, 연습해보니까. 하나하나 아이디어들까지 검토해보고. 결국 감독만의 영화도 아니고 배우들이 감독의 생각만 따라가는 것도 아니지. 배우와 감독이 함께 연습하며 영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색깔들이 나오니까 독특한 거야. 일반적으로 영화는 그냥 콘티 짜 온대로 맞춰가면 되는데, 우린 그 전에 이미 어떤 게 좋을지, 이게 좋을까, 저게 좋을까, 직접 고민해보고, 함께 만들어보니까.
단단한 팀워크를 구축시키는 과정이라 볼 수 있겠다.
일단 우리끼리는 재미있겠단 믿음이 생기지. 다만 이게 실제로 관객에게 재미있을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건 한번 해보자는 믿음이 생기지. 그래서 장진 사단의 매력은 충분한 연습을 한다는 것, 씬 분석부터 시작해서 연극처럼 모여서 한 달간 연습해. 그게 너무 신나더라고. 그리고 나중에 실제로 촬영할 땐 편안하지. 그러니까 안정된 연기가 나오고.
그런데 요즘 스크린에서 맹활약하는 배우들 중 연극 출신 배우들이 많이 눈에 띈다.
좋은 현상이라고 봐. 나는 연극 무대가 영화나 TV, 그 밖에 모든 매체에서 활동하는 연기자를 위한 기본적인 보고라고 생각하거든. 배우는 연극 무대를 통해 연기를 다져야 되고, 그를 통해 다져지는 거라고 생각하지. 그리고 그렇게 성숙하게 자라난 배우들이 영화나 드라마 가서 자리를 잡아야지, 좋은 영화가 나오고 좋은 드라마가 나온다고 생각해. 우리가 신성일 시대의 영화와 지금 영화를 단순히 비교하면 배우들의 연기가 많이 향상됐지. 그게 다 연극 배우들이 향상시켜놓은 거라고 생각해. 물론 분야적으로 접근하는 생각이 많이 변해서 전문적인 공부도 많이 한 덕분에 작품의 질이나 감독들의 기량도 많이 발전했지. 하지만 제반적 조건으로 봤을 땐, 연기자들이 중심이 되는 거지. 결국 배우의 힘이 제일 중요한 거잖아. 결국 그 영화를 만든 배우들이 다 연극했던 사람들이야. 드라마도 마찬가지지. 다 연극에 있다가 TV로 가고, 영화로 가고. 물론 옛날부터 잘 생긴 사람들이 기회를 얻기 쉬웠지. 옛날에도 외모가 주가 된 건 사실이니까. 근데 외모뿐만 아니라 연기적인 면이 중요하다는 걸 아는 순간부터 그게 어느 정도 무너진 거 아냐. 진짜 연기자가 필요하게 된 거지. 그럼 연극 무대만큼 풍부한 연기자가 어디 있겠어, 없지. 그러니까 그만큼 풍부한 영화를 만들어내고 보여줄 수 있는 거지.
하지만 그런 배우들을 쉽게 찾을 수도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난 영화 투자자나 프로듀서나 감독이나, 무조건 연극 무대는 지켜봐야 된다고 생각해. 찾아야 된다고, 좋은 배우를. 그래서 (설)경구도 찾고, (송)강호도 찾았고, 다 찾은 거 아냐. 처음부터 누가 스스로 나왔겠어. 찾아 다녔다고. 근데 왜 지금은 그 몇몇만 가지고 투자하려고 하느냔 거지. 지금도 찾아 다녀야 한다는 얘기야. (박)해일이도 그렇고, 다 연극에서 찾아낸 거 아니야. 지금도 강호 같은 인물, (최)민식이 같은 인물, 해일이 같은 인물을 또 찾아야지. 물론 지금도 누군가는 찾고 있겠지만 계속 찾아내야 하는 거지. 뭔가 투자가 있어야 돼. 그래야 젊은 후배들이 연극을 통해서 열심히 자기 모습을 다듬어야겠단 생각을 할 수 있지.
지금 내가 선배로서 후배들을 보면 안타까운 건, 대학만 졸업하면 모든 것이 다 됐다고 생각하는 모습들, 그냥 무대에 잠깐 서면서 영화나 갈 수 있을까 생각하고. 난 그게 좀 안타까운 거야. 난 아직까지 대학이란 건 그냥 수박 겉핥기에 불과하고 이제 사회에서의 시간이 그걸 제대로 공부해야 시기라고 생각해. 자신이 좋아하는 어떤 연출가나, 좋아하는 극단이나, 아니면 좋아하는 작품이 있거나, 아니면 자기들만의 마인드가 맞는 사람이 있는가를 찾으면 일단 5년에서 10년간은 그 안에서 실력을 쌓고 있어야지. 내 풍성함을 위해서.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연기가 지향할 수 있는 정점은 어디라고 생각하나.
나도 연기의 규정은 모르겠어. 연기가 잘 됐다 생각하는 어느 순간 딜레마에 빠지고, 그런 딜레마가 3~4년 가다가 다시 또 깨달음이 올 때가 있지. ‘아, 이런 거였구나!’ 그걸 믿었다가도 다른 순간되면 또 그냥 빠져. ‘어, 이건 아닌 거 같은데, 이게 아니라 다른 거 같은데, 뭘까? 모르겠어.’ 또 그러면서 바꿔. 그렇게 끝없이 바뀌는 게 연기라고. 그런데 고작 대학교 연극영화과 나왔다고 자기가 무슨 다 아는 양 구니. 물론 빠른 친구도 있어. 끼가 많은 친구들. 기본적인 연기를 위해서 우리가 노력도 하고 수행도 해야 되지만 선천적인 끼로 그걸 넘겨버리는 애들도 있어. 선천적인 재질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친구들도 재질만 가지곤 안돼. 재질을 통해서도 노력이 있어야 되고 자신만의 후천적인 경험이 있어야 그 재질도 꽃이 피는 것이지. 재질만 가지고 믿으면 안돼. 오래 못 가, 그건. 깊이가 없거든.
오랜 경험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교훈이라고 생각된다.
내가 젊었을 때 신구 선생님이 오셔서 그러시더라. ‘그냥 10년 동안 옆도 보지 말고, 뒤도 보지 말고, 널 믿고 그냥 가. 열심히 무대에서만 해. 그 뒤에 널 돌아보면 널 지켜보는 사람들, 네가 가야 할 길들, 다 보일 거야.’ 그때 그게 정말 딱 옳으신 말씀이셨어. 그 시기엔 내가 몰라. 아직 철학도 없었고, 날 다그칠 시간도 없었으니까. 진짜 서른이 넘어야 돼. 서른이 넘어야, 산도 보이고, 사회도 보이고, 인간도 보이지. 성숙한 만큼 내 가치관도 생기고, 어떤 철학도 생기고. 철학이 없는 사람은 예술가 못 해. 자기 철학은 뚜렷해야 돼. 연극 연출가든, 연기자든 자기 철학이 뚜렷해야지, 정확한 내 마인드를 가지고 어떤 코드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이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면 아무것도 못해. 자신이 생각해본 인간적인 철학들이 분명히 무르익었을 때, 그 때 정말 또 하나의 연기적인 경험이나 풍부한 눈빛이 나올 수 있는 거라 생각하지. 그런 면에선 후배들이 좀 급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 있어. 그런데 하도 초스피드한 빠른 시대라서. (웃음) 예를 들어보자고. 젊은 가수들만 봐도 금방 나왔다가 사라지고. 노래는 안 하고 그저 춤이나 외모만 신경 쓰니까 금방 질려서 그러는 거 아냐. 솔직히 그런 애들 홍대 앞이나 클럽만 가도 수두룩한데 오래 가겠어?
최근에 부산영화제에 대한 말도 많다. 개막식 날 과열된 열기부터. 어떻게 생각하나?
부산영화제 얘기가 잘 나왔는데, 이대로 가면 부산영화제 정말 위험하다. 이번에 유명한 감독들도 많이 왔잖아. 유명한 해외영화제 위원장들도 왔고. 그런 분들 정도는 알아서 잘 모셨어야지. 솔직히 우리 대중이 해외의 유명한 감독은 잘 모르잖아. 그러니까 솔직히 기자들도 그냥 아는 사람만 포토 하지. 수많은 배우들 중에서도 모르는 배우는 안 찍는 판에 그 사람들을 챙기겠어? 그거 무시당하면 얼마나 아픈지 알아? 그래서 안가는 배우들도 많을걸. 위원장을 비롯해 영화제 관계자들이 철저하게 교육을 시켜야 돼. 경호업체부터 시작해서 자원봉사자들까지. 이번에 누가 온다는 걸, 사진부터, 경력부터, 필모그래피까지 다 교육시켜야지. 왜? 문화를 모르기 때문에. 그 사람을 모르는데 그 사람 예술에 대해서 누가 알겠어. 엔니오 모리꼬네? 잘 모르지, 대중은. 연예인보고 소리지르는 20대 애들이 뭘 알겠어, 그 분을. 외국 영화를 보는 사람들도, 그 감독이 어떻게 생겼는지, 몇 살인지, 깊게 관심이 없으면 모르는 거야. 근데 그런 유명인사들을 다 데려다 놓기만 하고 무식하게 수행을 한다는 거야, 말도 안 되는 거지. 그럼 그 사람은 뭐가 돼. 사실 영화제가 제일 인정해줘야 할 사람인데, 얼마나 정말 무시당했다고 생각하겠냐고. 진짜 영화인을 무시하면서 어떻게 영화제라고 할 수 있어. 제대로 교육을 시켰어야지. 경호업체부터 자원봉사자까지. 최소한 엔니오 모리꼬네 같은 감독이나 선댄스 영화제 위원장 왔을 땐 기본적으로 동시 통역사까지 2명 정도 붙이고 수행했어야지.
내실을 다지기도 전에 규모가 너무 커져버린 건 아닐까란 인상이 들었다. 주객이 전도된 느낌도 있었고.
실속은 없고 뻥튀기만 됐지. 과장만 하고 실제로 뒤에 보면 아무것도 없어. 옷만 화려하게 입으면 뭐하냐고, 안에 때가 잔뜩 있는데. 올 해 부산영화제 정말 문제가 많다니까. 반성 많이 해야 돼, 정말. 사실 어제도 부산영화제 갔다 오신 이명세 감독님과 만나서 우리끼리 토로를 했어. 토로를. (웃음)
누구보다도 일선에 계시는 분들의 느낌이 그렇다면 정말 심각한 거라고 생각된다. 이젠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영화상에서 두드러지게 활약하는 중년 배우들이 단순한 희화화의 역할을 하거나 혹은 단순한 보조 역할로 소비되는 쪽에 치우쳤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생각하나?
그래도 한편으론 옛날보단 참 좋아졌다. 그것이 방금 말한 대로 하나의 피상적인 볼거리, 아니면 끼워 맞추기라 치더라도. 다만 그 중간이 없어서 안타까운 거지. 그래도 남자 배우들은 좀 괜찮아. 근데 우리 여배우들의 아픔이 뭐냐, 한 이십 대에서 삼십대로 올라오면 막 없어지는 거야. 한때만 해도 강수연 씨도 있었고, 심혜진 씨도 있었고, 옛날엔 배우들이 다 있었다고, 여배우들이. 그런데 젊은 애들이 오지, 그럼 갑자기 사라지는 거야. 이건 감독, 영화의 문제가 아니라 대중이 문제라니까. 그 깊이나 삶을 쉽게 생각 안 하려고 해. 영화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 자체가 질서가 없는 거야. 위계질서도 없고, 모든 게 없어. 그러니까 이렇게 되는 거야. 위계질서를 지켜줘야 되고, 존중해줘야 되고, 전통을 이어가야 되는데 우리는 전부 다 어느 순간 무너져 버렸잖아. 그래서 이번에 오현경 선생님께서 영화 들고 부산영화제에 가셨다가 후배들한테 쓴 소리 많이 하셨잖아.
나도 그 소식은 들었다.
그 말씀이 맞아. 나도 요즘 배우들이 왜 그렇게 폼 잡고 다니고, 자기 맘대로 스케줄 조정해서 배우들에 맞춰서 영화들이 찍히고, 이게 뭐야. 정말 잘못된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어. 그건 우리 영화뿐만 아니라 한국 자체의 문제이기도 해. 한국의 모든 체계가, 위계 질서가, 질서가, 전통이 하나도 지켜지는 게 없어. 기성 세대가 그렇게 만들어 놨으니까 다 그런 거지. 매니지먼트가 커지고, 매니저들의 힘이 점점 생기고, 그러면서 배우를 지들이 그렇게 만들어. 왜, 그것이 자본주의의 논리니까. 물론 이해는 해. 자본주의에 대해서. 하지만 일본이나 미국 같은 곳에서도 분명히 전통은 존재한다고. 그걸 인정하는 가운데 새로운 게 또 나오는 거지. 이렇게 다들 전후가 공존해 가는데, 우리는 그게 없어. 수요가 사라지면 그에 맞춰서 이상한 것들이 나오는 거지.
오래 지속되기가 힘든 것 같다. 전반적으로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말이다.
내가 연극할 때부터 일간지 기자들한테 이야기하는 게, 단순히 문화부 기자를 잠깐 컨택해서 넘어가는 시기라고 생각하지 말고 정말 문화부일 때 고작 5년만이라 해도 문화부 공부 좀 해라. 연극이 뭔지, 책도 보고, 인물도 누가 있는지 옛날 자료도 좀 찾아보고. 예를 들어서 인터뷰 올 때 그 사람의 모든 연극은 못 봤더라도 그 사람의 기본적인 색깔이나 사진, 예전에 인터뷰한 거라도 읽어서 그 사람을 다 이해하고 와서 이야길 해야지. 대뜸 이름 뭐냐, 나이는 몇이냐, 이런다니까. 게다가 예전에 나의 스승인 오태석 선생한테 그렇게 해서 정말 그 사람 때려 죽이고 싶었던 적도 있어! (웃음) 정말 그건 기본 예의가 없는 거 아냐? 그렇게 이게 만들어져 온 거야. 이런 판에 우리가 다시 질서를 지킨다는 건, 물론 좋은 마인드지. 그렇지만 너무 아픈 거야. 힘들거든.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 이렇게 되는 거지, 부산영화제처럼.
그렇다면 전통을 지키기 위한 방법이 뭐라고 생각하나?
선별이 있어야지, 선별의 기준도 있어야 하고. 그게 바로 전통을 이해하는 모습이지. 나도 잘 모르겠어요. 전통이 없는 문화에서 살다 보니까, 모든 현실이 그렇게 되는 게 아닐까. 일본만 해도 잘 지켜지는데. 우리가 일본 무시하면 안돼. 우리도 배울 건 배워야 되니까. 일본만 해도 위계질서가 있거든. 커리어에 따라 틀려, 매니지먼트라도. 예를 들어서 내가 20대에 스타가 됐다 이거야. 그럼 다 필요 없어, 그냥 올인해! 이게 현실이야. 물론 배우는 자기한테 올인하니 좋지. 그러다가 결국은 이용당해. 배우로서 그 사람이 인간이고, 깊이를 만들어줘야 되잖아. 매니저란 게 작품 선택을 잘 해주고,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훈련시켜 줘야 그게 진정한 매니지먼트지. 잘 나갈 때 어떻게든 팔아먹으려고. 그러니까 권상우가 아프잖아. 상우가 나쁜 친구 아니거든. 남이 그렇게 만드는 거야. 그러다가 나중에 이용당한 거지. 돈만 벌어먹고. 배우로는 안 키워주고. 그래서 고소하고 고발하고.
결국 시스템의 문제다?
배우들도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되겠지만 배우들도 어쩌겠어, 매니지먼트가 없으면 안 되는걸. 매니지먼트가 다량으로, 이 배우면 끼워주기 세네 명. 다 그런 식으로 팔아먹어, 지금, 매니지먼트에서. ‘우리 배우 누구? 그럼 두세 명 더’ 그럼 다 해줘야 돼. 그럼 감독도 어쩔 수 없는 거야. 그러면 투자를 안 해주니까. 그니까 투자자의 문제지, 이거 문제가 많아. 어디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어. 근데 확실한 건 자본이 들어오면서부터 잘못된 거야. 자본이 들어오면서 자본에 대한 권력들이 좌지우지하다 보니까 감독들이 힘을 잃고, 감독이 원하는 색깔대로 시나리오도 못 쓰고. 흔한 말로 어떤 영화감독이 시나리오를 써서 갔더니 잘 고쳐오라고 해서 입봉을 해야 하니까 계속 조건대로 한 세네 번 걸쳐 그 짓을 하고 막상 뚜껑을 딱 열어보니 제 작품은 하나도 없고 이상한 영화가 됐다잖아. 그래서 못하겠습니다 하고 나왔대. 지금 그게 현실이라니까. 입봉하려면 어쩔 수 없이 웃기는 코미디나 해야 되고, 어떻게든 투자 받아야 되고, 일류 배우를 잡아야 되고. 자기가 아는 좋은 배우가 연극에 있어서 그 배우를 좀 데려가고 싶은데, 힘이 없으면 안 되는 거야. ‘쟤는 누구야, 모르는 애잖아, 투자 안돼!’ 이러니까. 그러니까 좋은 배우를 찾기 힘든 거야.
요즘은 가수들조차도 다들 연기로 전향하는 상황이다.
그걸 난 이해 못하겠어. 도대체 가수 애들을 왜 데려와서 연기하는지. 그런 게 다 매니지먼트 힘이라니까. 가수가 돈이 얼마 안되니까 연기로 다 튀는 거야, 요즘 가수 다 죽었잖아. 음반 시장 죽으니까 다 연기하잖아. 우스운 거지. 연기자가 수두룩 한데, 정말 잘 하는 애들 있는데 다 놔두고. 그 자체가 잘못된 거야. 벌써 영화 판에 전통이 무너진 거지. 배우란 개념도 무너진 거고, 이미, 이 판에서. 거기에 뭘 어떻게 하겠어. 그럼 결론은 생존게임이야. 어떻게든 먹고 살려면 인맥을 건지든지, 좋은 매니지먼트에 적을 두던지, 감독을 막 구슬려보던지, 뭐, 그것도 아니면 인터넷에서 옷을 벗던 사고라도 쳐서 이름을 내던지. (웃음)
연기자가 되겠다는 의식보다 스타성에 집착하는 게 문제 아닐까. 그러니까 젊은 배우들한테 지나치게 스포트라이트가 몰리는 것 같다.
그저 스타가 되면 된다는 생각이지, 검색 1위면 떴다 이거야. 이런 식의 사고를 갖고 있다고. 특히 인터넷도 문제야. 사람을 가볍게 만들어버려. 이게 어디서 잘못 된 거냐고 물으면 답답하지. 나도 메릴 스트립 같은 여배우들이 우리나라에도 나왔으면 좋겠어. 근데 지금 선생님들 다 웃기는 캐릭터밖에 못하잖아. 김수미 선생님조차도. 하지만 그나마 그거나마 다행인 거야.
다행이다? 어째서?
그 분들이 그나마 그 나이에 영화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란 거지. 왜? 그래도 영화적으로 다양해진 거니까. 좋은 쪽으로 해석한다면 정말 다양성의 측면에서 좋은 배우들이 나이가 들어서도 뭔가 역할을 맡을 수가 있다는 걸 체감할 수 있지. 또 이렇게라도 보여져야 관객들도, 저 어른들도 대단하구나, 연기 잘 하시는 분들이구나, 애들만이 연기하는 게 아니구나, 라고 느낄 테니까. 그리고 그렇게 중년연기자들한테 익숙해지면 40대, 50대, 60대까지 점점 연령의 폭을 늘려도 관객들이 편하게 볼 수 있겠지. 익숙해져야 되니까. 개인적으로 난 좋은 청사진을 보기 위해서 이런 시기도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것이 아까 말한 대로 어떤 매개체가 될지언정 그래도 다양성의 면에서 배우들이 어떤 가능성을 염두에 둘 테니까. 나도 배우로서 열심히 생활하다 보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겠구나, 하는 자신감이나 긍정적인 마인드가 생길 수 있으니까. 그런 면에서는 참 좋은 거 같다.
<바르게 살자>에서 이승우의 본질적인 의도는 쇼맨십이었다. 그런데 그런 의도가 전복되면서 오히려 훈련의 본질을 회복한다. 지금까지 말한 어떤 지적들이 어쩌면 본질을 훼손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사안들이라고 생각한다.
영국에서 수상이었던 처칠을 교통경찰이 교통위반으로 잡고 벌금 부과했다고 통보한 예가 있다더라. 우리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야. 근데 정도만은 했잖아. 경찰서장인데도 불구하고. 그런 세상이 돼야지. 그걸 또 인정해줘야 되고. 그런데 자기의 어떤 일말에 대한 양심이 없고, 자기가 맡은 바에 책임을 다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모든 구조에 있기 때문에 그게 힘든 거야. 물론 다 그런 건 아니야. 모두가 그렇다는 건 아니니까 오해하진 마시고. 다만 너무 만연해있기 때문에 그렇단 거지. <바르게 살자>는 우리가 잃었던 본질성에 대한 이야기지. 내가 맡은 바 책임을 다할 수 있게 그 책임을 인정해주는 사회 구조에 대한, 정확한 정직성을 바탕으로 자신에 대한 본질적인 책임을 다했을 때, 거기에 대한 배려, 그리고 인정, 그런 체제가 되야 된다. 그래서 이 사회가 따뜻해져야 된다라는 것. 그니까 결론은 바르게 되야 된다는 거지. 그런 구조에서 전통도 지켜지고, 내가 어떤 걸 해도 올바르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고, 그렇게 하고 싶단 욕망도 생기고. ‘나도 정직하게 하면 돼. 저 사람도 됐잖아. 나도 열심히 하면 언젠가 저렇게 될 수 있을 거야.’ 이런 꿈이 생길 수 있는. 그게 없으면 안돼. 정의가 없으면 그런 꿈을 못 그려. 정도만이 정말 인정받는 사회가 돼야지. 나도 저렇게 바르게 살면 복을 받는구나. 내가 저렇게 바르고 옳은 행동을 하거나 내 신념을 굽히지 않고 가면 언젠가 내게 돌아올 몫은 있겠구나 라는 믿음, 그런 믿음을 주는 꿈 있는 사회. 그래서 <바르게 살자>는 정말 따뜻한 영화인 거 같아. 그리고 난 아까 말했던 복원의 힘이 난 분명히 있으리라고 생각해. 게다가 상업적인 재미도 있잖아. 본인이 보기엔 어땠어? 복원의 힘이 느껴지던가? (웃음)
개인적으론 사회적인 불신감이 크기 때문에 <바르게 살자>같은 영화에 감정이입이 되는 게 아닌가 싶더라. 그런데 김지훈 감독과 마찬가지로 경상도 출신으로 알고 있다. <화려한 휴가>에 출연했는데 개인적으로 그 시대에 광주의 외부에서 그 사실을 직접 접한 이들 중 하나 아닌가? 어떤 감회가 있을 법하다.
나도 죄인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80년대는 나도 방관자 입장이었으니까. 그 당시엔 알려진 대로 진짜 적색분자들, 빨갱이들이 데모하는 줄만 알았었다. 진상이 밝혀지면서 나도 뒤늦게 알게 된 거지. 아마 김지훈 감독님도 방관자적인 아픔이 있었거나 아니면 그에 대해서 학창 시절에 선배들하고 많이 접하다 보니 언젠가 그 얘기를 해봐야겠단 생각을 했나보더라.
지금 <무방비도시>에도 출연하는 걸로 알고 있다.
지금 한 60% 정도 찍었다. 부산 내려가서 찍었고, 서울 올라와서 찍으면 끝난다. 11월 초쯤 크랭크업될 듯 하네.
거기서도 경찰 역을 맡았다고 하던데.
형사반장! 나 이제 악역 안 하려고. (웃음)
하긴 따님도 학교 가실 때가 다가오는 것 같다. 근데 아무래도 대화를 나눠보니 국회로 보내드려야만 할 것 같다. (웃음)
2007년 10월 20일 토요일 | 글: 민용준 기자(무비스트)
2007년 10월 20일 토요일 | 사진: 권영탕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