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문학 작품에서 ‘소녀’는 소년의 성장을 담보로 하는 노스탤지어로 그려졌다. 여성의 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여자로 대할 수 없는 존재. 그저 그 모습 그대로 지켜줘야 할 것만 같은 소녀는 남성들에게는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성역’을 의미하곤 했다.
‘송혜교’의 이미지는 바로 그 ‘소녀’다. 드라마 <가을동화>에서 애틋한 사랑을 꽃피우기도 전에 운명에 절망하며 세상을 등진 ‘은서', 한 남자의 거대 욕망을 애달프게 지켜봐야만 했던 <올인>의 ‘수연’은 모두 송혜교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그 이미지로 승화된 캐릭터들이다. 언제나 운명에 휘둘리는 이 애달픈 처자의 모습에서 다른 모습을 상상하기는 어려울 정도다.
그러나 그녀는 남모르게 조금씩 변화를 추구했다. 그게 설사 남이 알아주지 않는 변신일지라도 송혜교는 드라마에서 꿋꿋한 생활력을 가진 당당한 여성을 연기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변화의 범주가 ‘소녀’적 감수성을 뛰어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그건 그녀의 책임이 아니다. 아직도 대중은 송혜교에게서 삶의 질곡을 그려내는 여성상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운명을 개척하기보다 순응하는 소녀 이미지는 대중이 갈망하는 척박한 이 시대의 아이콘이다. 그게 환상인 줄 알면서도 많은 이들은 송혜교를 통해 갈증을 해소해 왔다. 그래서 송혜교는 잠깐 가던 길을 멈추고 생각한다.
‘성숙을 잠시 뒤로 미루고 소녀로 돌아가 주자. 그래도 늦지 않아...’
그렇게 영화는 그녀에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는 타임캡슐을 열어주었다.
<파랑주의보>로 스크린 신고식을 마쳤다. 신인배우로서 지금 심정은?
사실 이상하게도 걱정이 안 된다. 영화를 처음 하는 거라서 그런가? 두 번째 영화부터는 달라지겠지. 아마 내가 영화를 지금 막 시작한 입장이라서 뭘 몰라서 그렇다(호호)
충무로에서 혜교씨에게 많은 러브콜을 보낸 걸로 알고 있다. 인기와 명성에 비해 스크린 진출이 참 늦게 이루어진 것 같다.
데뷔는 했지만 30살 넘어서 영화 쪽으로 넘어오는 분들도 많다. 그에 비하면 난 늦은 게 아니다. 그만큼 심사숙고 했다는 뜻이기도 하고.
솔직히 원작(영화)을 안 봤다. 제작자나 주위 분들이 원작이 있는 작품을 다시 리메이크 한다고 말을 나에게 했지만, 나나 ‘차태현’(수호)씨는 <파랑주의보>를 찍으면서 원작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우리는 단지 수호와 수은이 돼서 연기를 했지, ‘원작에서 이렇게 했으니깐 우리도 이렇게 해야 하지 않나?’ 이런 생각 혹은, 부담은 가져 본 적이 없다.
아예 관심이 없었다는 게 정답일 거다. 사실, 부담도 없었지만 원작영화도 책하고 다른 부분이 많다고 한다. 아마 우리 작품이 오히려 원작소설에 가까운 작품일 게다.
영화 촬영 초반에 공개된 교복 사진이 화제가 됐다.
고등학교 때 교복을 많이 입지 못했다. 그때부터 연예계 활동을 했기 때문에 남들처럼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해 교복과 할 시간이 나에겐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번에 <파랑주의보>하면서 입은 교복은 내가 봐도 너무 예쁘더라. 녹화해 둔 것 보니깐 덩달아 그림도 잘 나와 기분이 무척 좋았다.
‘교복’에 대한 혜교씨의 느낌을 물어 본 이유는 사실 다른 데 있다. 나이도 이제 20대고 드라마에선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해 왔는데 굳이, 첫 영화에서 ‘소녀’의 이미지로 돌아간 게 의아해서다. 나름대로 고민도 있었을 듯하다. 소녀의 이미지로 고착화 되는 것 같아서...
고민을 한 게 아니라 어떻게 하다 보니깐 이렇게 다시 어린 쪽으로 돌아갔다. 첫 작품이라 해서 부담가지고 작품을 고르진 않았다.
많은 시나리오를 읽었지만 딱히 와 닿는 작품은 없었다. 최근에 본 게 ‘파랑주의보’였는데 느낌이 그냥 너무 좋더라. 완전 신파도 아니고 병 걸렸다고 해서 그 부분을 지루하게 오래 끌고 가지도 않고, 그냥 아기자기한 예쁜 모습만 보여주다가 끝에 잠시 10분 정도만 아픈 모습을 보여준다.
또 그런 부분을 깨끗하게 처리해줘 더욱 맘에 들었다. 차태현씨도 평소 같이 연기해보고 싶던 배우인데다가 감독님에 대한 믿음도 가고. 그래도 물론 선택의 우선순위는 시나리오다. <파랑주의보> 시나리오가 개인적으로는 정말 맘에 들었기 때문에 고민 없이 선택했다. 이미지 변신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사실, 30살에 교복 입은 차태현씨가 그런 부분을 더 고민했을 듯하다.
30살에 교복을 입었다고 차태현씨가 많이 투덜투덜했는데 내가 볼 때는 교복이 너무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하하). 그만큼 연기 소화를 잘해서 그런 건지 몰라도, 현장에서 교복 입고 왔다 갔다 하는 모습 보면 정말 ‘수호’같은 느낌이 든다. 오히려 내가 상대적으로 ‘수은’이처럼 안 보일까봐 걱정을 할 만큼 태현씨는 ‘수호’ 그 자체다.
영화에서 소녀 수은은 죽는다. 그래서 더 애처롭게 수호의 기억에 남는다. 혜교씨가 생각하는 ‘소녀’란?
모든 남자들의 첫 사랑 같은 존재...........
요즘 남자분들 대부분 고등학생 때나 혹은 중학생 때 첫사랑을 한다고 들었다. 여중생이나 여고생을 ‘여자’라고 표현하기에는 좀 그렇고. 모든 남자들의 첫사랑 같은 존재가, 소녀 아닐까?
그거는 작품 선정에 따라 다른 것 같다. <파랑주의부>에서는 고등학생 역할이기 때문에 ‘소녀’이미지만 강하다. 나도 그런 면을 외적으로 표현했다. 만약 다음 작품이 여성스러운 면을 원하는 작품이라면 연기도 바꿔야겠고 또 외적으로도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려고 노력할 거다. 연기란 작품이 나와야 볼 수 있기에 옷 하나만 색다르게 입어도 사람이 달라 보인다. 결국 이번 영화에선 소녀적 감수성을 충분히 표현하려고 노력했지 성숙한 이미지에 대한 고민이나 부담은 없었다.
말을 들어보니 <파랑주의보>에서 혜교씨가 연기한 수은이는 우리가 익히 알던 혜교씨의 이미지에서 크게 변한 게 없는 것 같다.
나 또한 연기활동을 오래했기 때문에 연기변신을 원한다. 그러나 나에겐 <파랑주의보>는 첫 영화였고, TV에서 아직 보여주지 않은 섹시한 이미지를 첫 스크린에서 갑자기 보여주면 그것도 아마 거부감이 들 꺼다. 생각해봐라, 사람이 갑자기 변해도 거부감이 든다. 조금씩 조금씩 변해야지 한 번에 확 변해야 한다는 생각은 없다. 일단 첫 작품에서, 내가 스크린에 어떤 모습으로 나오는지 모르는 상태고, 그것조차 확인되지 않는 바에서 서툰 연기 변신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다.
‘수은’ 캐릭터는 기존에 내가 해오던 캐릭터하고 솔직히 비슷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성격 자체만 다른 건데. 항상 해왔던 청순한 역할이어서 그게 오히려 나에게는 잘 할 수 있는 ‘무기’가 됐다. 그렇게 잘하는 것부터 시작해도 늦지 않을 것 같더라.
물론 비난하는 사람도 당연히 있을 거다. ‘옛날에 가을동화에 했던 연기를 그대로 하는 구나’이러면서 말이다. 하지만 100명이 있는데 그 100명의 맘에 다 차게 일을 할 수는 없는 문제 아닌가?
예상보다 자기생각 확실하고 당당한 것 같다.
맞다. 그런데 겁은 없다. 내가 워낙에 한국의 여성상 같은 캐릭터를 많이 했기 때문에 나 또한 그런 비슷한 캐릭터 연기에 재미를 못 느낀다. 그래서 앞으로는 색깔 있는 인물을 연기해 보고 싶다. 연기 폭을 넓히는 문제에 있어선 겁낼 필요가 없다고 본다.
솔직히 앞으로 내가 어떤 변신을 시도하든 비판하는 사람은 항상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배우로서 내가 소화를 하던, 안하든 간에 새로운 캐릭터에 도전하고 싶다. 이제는 할 때가 된 것 같고. 그렇다고 180도 변신을 선호하는 게 아니라, 지금 내 나이와 상황에 맞는 여유 있는 변신을 천천히 신중하게 실천해 나갈 것이다.
나를 똑바로 쳐다보는 눈빛에서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실제 성격도 청순가련형일 것 같았는데...(하하)
20살 때까지는 정말 말 없는 성격이었는데. 연예활동하고 여러 사람 만나다 보니깐 성격이 발랄해졌다. 그래서 그런지 나를 실제로 만난 사람들은 나를 편하게 생각해준다.
드라마와 영화는 매체 성질이 다르다. 앞으로 영화에 더 치중하면서 활동할 계획인가?
영화만 고집할 생각은 없다. 좋은 작품, 드라마가 있으면 언제든 선택하고 연기할 것이다. 영화는 확실히 드라마보다 시간적 여유가 있다. 드라마는 방송 시간이 촉박해지면 하루에 20~30씬을 찍는 경우도 많다. 그에 반해 영화는 시간에 쫒기지 않으면서 최대치의 연기력과 좋은 장면을 끄집어 낼 수 있더라.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남겨주시라.
말을 하면서 내가 좀 흥분한 것 같다.(호호) 왜 흥분했을까? 기자님이 좀 찾아주시라. 아마 우리 영화 <파랑주의보> 때문에 그런가 보다. 정말 괜찮은 영화다. 많이들 좋게 봐주시면 좋겠다. 배우의 모습보다 아련한 첫사랑을 떠올리면서 영화를 본다면 연기한 나로서는 감사할 따름이다.
취재: 최경희 기자
▶ 송혜교 사진 컷 실컷 구경하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