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들 중에서 지각하지 않기로 유명한 류승완 감독이 지각을 했다. 그것도 장장 30분씩이나. ‘감독’이란 호칭이 무색하리만큼 꽃미남 감독의 원조 격인 류승완 감독은 이제는 트레이드 마크처럼 굳어진 한쪽으로 멘 배낭을 내려 놓으면서 조심스럽게 커피를 주문했다.
잘 알려졌다시피 그가 선택한 영화는 헐리우드 B급 무비의 선두주자 사무엘 풀러의 <충격의 복도>였다. ‘시네마 테크의 친구들’ 취재차 진행된 이번 인터뷰는 우연의 일치인지도 몰라도 영화관 2층의 어두운 복도에서 진행됐는데, <충격의 복도>를 이야기 위해 복도 위에서 마주 앉은 우리의 대화는 짧지만 유쾌하게 진행됐다.
돈이 되지 않더라도 의로운 일에는 빠지지 않는 감독 같다고 말을 꺼내자 “그렇지도 않은데.(웃음) 참여하게 된 동기에 대해선 인터뷰용 멘트가 따로 있어요. 제가 영화를 공부하고, 보러 다닐 때만 해도 우리나라 ‘시네마 테크’라는 곳은 몇몇 공간에서 제한적으로 불법 복제해서 비디오로 여러 번 복사한 화질도 안 좋은 걸로 영화를 봤거든요.
그럼 인터뷰 외적인 멘트는? “앞으로 내가 봐야 할 영화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서울 아트시네마의 평생 회원권을 끊어 놨는데, 없어지면 안되죠. 제가 또 손해 보는 짓은 절대 안 하거든요.”라는 합리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시네마 테크’는 영화를 사랑하고, 영화에 의한, 영화를 위한, 영화에 죽고 못사는 ‘시네필’들의 아지트라고 볼 수 있다. 문화적인 공유를 위해 영화를 상영하는 서울 유일의 비영리 시네마테크인 서울아트시네마를 문턱이 닳도록 드나드는 영화광처럼 류승완 감독한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저는 연애 할 시간이 아까워서, 결혼을 빨리 한 케이스라 ‘연애 할 돈을 아껴서 영화를 보자’ 그런 주의였어요. 그렇다고 많은 시간을 들여서 영화를 보러 다니는 스타일은 아니 예요. 좋아하는 영화를 여러 번 반복해서 보는 걸 즐기고. 많이 알려진 얘기지만 저는 동시 상영관을 좋아해서 홍콩 영화들은 다 거기서 섭렵했거든요. 고등학교 시절 ‘로드 쇼’란 잡지를 지도 삼아서 영화들을 찾아 보다가 그 무렵 만났던 미국 영화들을 비디오로 보면서, 스무 살 무렵에 봤던 흑인 영화들을 보고 쇼크를 먹고, 타란티노 영화들, 당대 영화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간 스타일이죠. 최근에는 50년대 미국 영화들에 꽂혀 있는데, <충격의 복도>는 60년대 영화인데 되려 50년대 분위기가 나요. 반골감독으로 유명한 풀러 감독의 작품이구요.”
그들과 마주 앉아 자신의 추천한 영화에 대한 얘기를 나누기 위해 준비한 게 바로 박찬욱 감독의 지원사격이라고 밝힌 류승완 감독은 “ 후원의 밤 때만 하더라도 영화를 못 봤었는데, 마침 며칠 전 미리 영화를 볼 기회가 있었어요. 막상 보니까 할말이 없더라구요.(웃음) 그래도 추천하길 잘했다는 생각은 들었어요. 그 말을 박감독님께 하니까 ‘승완이가 망가지는 걸 볼 수 없다.’그러시면서 좀 있다 무대 위에 같이 올라가기로 했는데….”하는 순간 극장에 도착한 박찬욱 감독의 전화가 울린다.
그가 서울 아트시네마에서 주최한 이번 행사에 참여하면서 여러 명의 스타 감독들과 함께했지만 인터뷰가 진행되기 전 극장 로비에는 유독 많은 감독들이 그가 추천한 <충격의 복도>를 보러 온걸 눈으로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인지 인터뷰 시간 내내 그를 찾는 전화가 끊임없이 울렸는데, 류승완 감독이 선택한 방법은, 일단 받고, 인터뷰 중인걸 밝힌 뒤, 질문에 최고의 대답을 해주는 거였다.
사실 류승완 감독을 좋아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그의 작품보다도, <오아시스>에서 보여준 연기 때문이었다. 영화에 나온 분량은 작았지만 그가 감옥에서 막 출소한 설경구를 비겁한 큰형보다 한 술 더 떠 나무라는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더 강렬하게 다가왔던 것이다. 그런 그가 감독과 주연, 1인 2역을 맡아 화제가 된 <짝패>가 얼마 전 촬영을 마쳤다는 소식을 듣고 질문을 던지자 아직 언론에 밝힐 단계가 아니라고 손 사례를 친다. 자신의 영화 홍보보다는 시네마 테크의 안정과 발전이 우선이라는 류승완 감독은 5분 뒤면 시작될 영화상영을 위해 일어서면서 그다운 멘트로 인터뷰를 마무리 지었다.
“개인적으로 성룡의 70년대 영화들이나 <영웅본색>을 프린트로 다시 보고 싶어요. <천녀유혼>의 왕조현도. 이쪽에서는 ‘뭐 그런 영화를…’하겠지만 서도.(웃음) 시네마 테크에서 틀고 싶은 영화들은 너무 많아요. 샘 페킨파의 영화들 특히, <어둠의 표적>을 극장 화면으로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은 항상 해요. 다행히 올해 3월경에 <와일드 번치>를 한다고 하더라구요. 어렸을떄 저를 흥분시켰던 토요 명화에서 틀어주던 <무숙자>, <4인의 프로페셔널> 이런 영화들을 다시 보고 싶어요. 하여튼, 제가 보고 싶은 영화를 꼭 보고 싶어서라도 이곳은 유지돼야 합니다.”
취재: 이희승 기자
사진: 권영탕 사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