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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사미로 추락한'영웅'그/러/나/
영웅 | 2003년 1월 23일 목요일 | 서대원 이메일

저 멀리 대륙의 박스오피스를 일순간 풍비박산 내고 장대한 스펙터클의 깃발을 앞세우며 한반도까지 위풍당당 입성한 영화가 있다 하니, 그의 간판 존함은 <영웅>. 이미 촌철살인('영웅'그들이 왔다. 하지만 금방 갔다)적인 문구로 영화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장예모 대인과 그의 좌청룡우백호 격인 양조위. 장만옥 협객이 한국 관객 제위들에게 알현차 왔다 금세 갔음을 얼마 전, 날 것 그대로 전한 바 있다. 그리고, 오매불망 기다리던 그들이 남기고 간 영화 보따리를 풀어 헤칠 때가 당도했으니 이 어찌 아득한 떨림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때는 기원전 3세기, 당시, 중국의 광대한 대지는 전국 7옹이라 불렸던 국가들의 군웅할거로 백성들이 혹세무민에 시달려야 했던 춘추전국시대. 피바다로 뒤덮인 검붉은 대지는 서서히 무소불위의 힘을 지닌 진나라의 영정(시황제)에 의해 통일되는 국면에 접어들기 시작하고. 이에, 반기를 든 조나라 출신의 자객 파검(양조위), 비설(장만옥), 은모장천(견자단)은 영정의 목을 따고자 5분 대기조를 형성하게 된다.

후에 천하통일을 이루어 황제로 등극할 진시황 영정은 세 자객의 움직임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자신을 기준 삼아 백보 안에 어느 누구도 얼씬 못하도록 명을 내린다. 이 와중에 천우신조의 덕택인지, 세 무사의 숨통을 끊어 놓았다는 이름없는 협객 무명(이연걸)이 그의 앞에 떡 허니 나타나게 된다. 불로장생의 길로 나아가기 위한 첫 삽을 뜬 것이나 진배없는 경사스런 일을 맞닥뜨린 영정은,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무명을 십보 안으로 불러들여 자신과 독대할 수 있는 기회를 갖은 호들갑을 다 떨며 마련하기에 이른다. 영정은 어떻게 무명이 신묘한 무공을 지닌 세 고수를 볏단 자르듯이 자빠뜨릴 수 있었는지 자초지종을 묻게 되고, 무명은 천일야화를 들려주듯 자잘하게 설을 풀기 시작한다.

영화 <영웅>은 이렇듯 실존했던 역사를 바탕으로 해 영정을 둘러싼 협객들의 신념과 의리 애증을 원색의 색조들이 너울너울 파노라마 치는 양식미 속에서 화려하게 수놓으며 보여준다. 장예모 대인이 이미 천명했듯 영화의 묘미는 웅혼한 스텍터클과 그 풍광의 정점에 위치한 협객들의 몸 동작에 오롯이 담겨져 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막판까지 주리줄창 진중하고 멋드러진 화폭으로 일로 매진하는 것은 아니다. 무릇, 초반부에 시연되는 몇몇 아크로바틱한 장면만을 따지고 본다면 눈이 휘둥그레해짐과 동시에 입은 턱이 빠질 정도로 오픈되며 혀는 오토매틱으로 알아서 삼세번 차게 될 정도로 경이로움 그 자체다. 특히, 자웅을 겨루는 수많은 장면 중 가장 먼저 진중하게 등장하는 무명과 은모장천의 대결은 <영웅>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은은하게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배경으로 눈먼 노인이 비파를 탄주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그들의 심후한 내공의 겨루기는, 탐미적이며 우아한 발레와 같은 기존의 결투 장면들과는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그 다름의 비밀은, 이 합의 장관이 온전히 그들의 육체성에 의탁해 그림이 그려진다는 데 있다. 그러기에, 공기를 가르며 내지르는 무명의 유려한 검과 장쾌하며 힘이 느껴지는 은모장천의 창의 맞부딪침은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내며 그들이 아닌 보는 이들의 숨을 멎게 한다. 이에, 대구를 이루는 것이 파검과 무명의 일전이다.

천혜와 같은 절경을 병풍 삼아 호수 위를 유영하는 그들을 보자면,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신성일 엄앵란 커플이 꽃밭 위를 사뿐히 거닐며 노는 것처럼 엘레강스 한 알콩달콩함이 느껴진다. 허나, 견자단과 이연걸의 몸 자체에 많은 것을 빚진 전 장면과 달리 이 신에서는 한 폭의 산수화 같은 비경이 큰 몫으로 쓰인다. 그러기에, 풀샷과 클로즈업을 위시로 해 사실적으로 잡아 낸 초반의 결전과는 결별한 채 중력으로부터 해방된 유려하기 그지없는 경공술을 세속을 탈피한 듯한 정경 속에서 재현하고자 롱샷으로 담아낸다. 그 외에도 <영웅>은 검은 빛깔의 장대비를 연상시키는 화살의 진격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듯…무협의 신경지를 열어제낀 이 같은 절대 장관을 세치 혀로 표현해낸다는 자체가 다 부질없는 짓, 차마 말을 잊지 못하는 필자의 심정을 이해해주시라.

호방함과 우아한 의연함으로 비춰지는 초.중반의 스펙터클의 향연은, 외형적 이미지와는 상반된 부실한 서사의 내용과 전개방식으로 인해 후반으로 치달을수록 다소 빛이 바랜다. 영정과 무명이 나누는 공허한 무용담은 기실, 각각의 과도한 원색의 색깔의 장식미에 종속돼 서서히 강박증 증세를 보인다. 탐미적인 거대한 형식미 안에서 색깔을 바꿔가며 진행되는 자그마한 이야기들이 결국은 자신의 자리를 못 찾고 주저 앉는다는 것이다. 천하장사 봉걸형이 빤스끈 늘어난 95자리 속옷을 입어야만 하는 비극처럼. 그리하여, 비설과 파검이 닭꼬치 꽂히듯 하나의 검에 두 몸이 관통돼 최후를 맞는 비통한 순간에도 그다지 그들이 대수롭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또한 종반에 이르러 밝혀지는 <영웅>의 퇴행적 이데올로기는 이안의 <와호장룡>이 설파했던 유장한 동양의 허무주의의 세계관과 배치돼 화룡점정의 대미를 장식할 순간에 먹물을 화폭에 튀기는 것과 같은 우매함으로 복무한다. 장예모는 인터뷰를 통해 "<영웅>은 무(武)보다는 협(俠)에 비중을 둔 영화"라고 밝혔다. 자고로'협'이라함은, 필자의 반골(필자의 아이디는 그 의미와는 하등 관계가 없음을 밝힌다)이라는 아이디처럼 철저하게 타협화된 제도권을 벗어나 비주류적이며 강한자보다 약한자의 편에 서는 인물로 최소한 정통무협영화 속에서는 그간 그려져 왔다. 헌데, <영웅> 속에서의 협이 이 의미와 일맥상통하는지는 꽤나 의심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자충수를 다 상쇄하고도 남을 만한 것들이 전언했듯 <영웅>에는 형형하게 존재한다. 거대함으로 매무시를 잡은 뒤, 빼어난 풍광과 가장 진솔한 스펙터클인 인간의 육체를 프레임에 가득 채운 전례없는 신천지의 세계를 보고 있노라면 탄성을 자아내기에 바쁘다. 명불허전, 역시나 괜히 있는 사자성어가 아니라는 점, <영웅>을 통해 다시 한번 환기시켰다. 그 대상이 장예모든, 견자단이든, 이연걸이든, 정소동이든 상관없이.

3 )
bjmaximus
사실 견자단의 비중은 너무 적었다는..   
2009-04-16 12:42
ejin4rang
영우의 추락   
2008-10-16 15:10
pyrope7557
화살이 와창 날라오던 신이 기억 나네용....   
2007-07-19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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