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로 한국영화 지형도에 있어 ‘스릴러’와 ‘사극’은 돈은 돈대로 쓰고, 욕은 욕대로 얻어먹는 피박 쓰기 딱 좋은 고질적 취약 장르로 인식돼 왔다.
그럼에도 잔혹스릴러 역사물인 <혈의 누>는 개봉 전부터 세인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화제를 모았다. 능청스럽기 짝이 없는 코믹 캐릭터의 정점을 보여준 차승원의 진지 필 가득한 연기 구경, <번지 점프를 하다>의 김대승 감독 작품이니만큼 은근슬쩍 기대감, ‘다빈치 코드’로 부각된 팩션(사실(fact)+허구(fiction)) 소설이나 퓨전 장르의 대유행 등이 일정정도 작용한 탓일 게다.
물론,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대중과 평단의 호들갑스런 기대만빵의 예비 동작에 반하는 나 몰라라 하는 영화도 있었다만, 다행시럽게도 <혈의 누>는 그렇지 않음이다. 꽤나 묵직한 메시지와 밀도 그리고 장르적 쾌감을 자랑하며 영화는, 입장료 7000원 반대급부 이상의 눈요기 거리와 이야기 거리를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선 말기 일어난 연쇄살인극을 축으로 진행되는 <혈의 누>의 방점은 잔혹극의 외피를 빌려 생래적인 혹은 세속에 의해 쉽게 굴절되는 ‘인간의 탐욕’이다.
그러니까 감독은 부질없는 욕심을 부리는 염치없는 자들의 말로가 어떠한지를 보여주려는 작가적 야심을 상업영화의 틀에서, 대중영화의 미덕 안에서 실현하고자 장르 영화의 얼개와 도식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혈의 누>를 관통하는 거대한 뼈대이자 보는 이의 시선을 옭죄는 데 긴요하게 쓰이는 영화의 소재는 신문물과 구문물의 대립이다. 기이한 긴장감을 뿜어내며 이내 공포로 전이되는 무속신앙과 근대과학의 경합은 대관절 누가 범인이고 어떠한 방법으로 죽은 이의 숨통을 끊었는지 추리 과정에서 상당히 흥미롭게 영화 안에서 묘사된다. 동시에 그것은 미궁에 빠진 수사를 더욱 종잡을 수 없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살인범을 산 자로 규정하고 과학적 수사를 펼치는 이원규(차승원)와 산 자가 아닌 죽은 자의 소행임을 거듭 암시하는 무당의 대립은 이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근대 문물의 수혜자인 원규는 시체 검시를 해부학 강의하는 교수처럼 배운 티를 팍팍 내며 과학적 규명 하에 수사를 펼치고, 무속 신앙의 대표주자인 무당은 신들린 굿판을 벌이며, 때로는 빙의 현상까지 초래하며, 원시적인 주술의 힘을 소름끼치게 흩뿌린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얄팍해지는 무당의 존재감은 심히 안타까운 대목이다.
물론, 이 같은 배치구도는 그릇된 욕망 속에 묻혀 버린 비밀이 하나 둘 밝혀지고 돌이킬 수 없는 진실에 서서히 접근해가는 <혈의 누>의 치밀한 추리 과정에 자리한다. 하지만 그것은 스릴러 장르의 관습과 다를 바 없다. 김대승 감독은 이러한 영화의 구성 방식을 보다 세련되고 진화된 형태로 내비치고자 그 추동추로 상당한 내공으로 사려 깊게 관장된 완성도 높은 비주얼을 내세운다. 세트, 의상은 말할 것도 없고 죽임을 당하는 이들의 잔혹 이미지는 역대 한국 영화 중 최고라 할 만큼 발군이다.
그러나 영화는 사건의 매듭을 지으려는 순간 꼬이기 시작한다. <번지 점프를 하다>가 그랬듯 사건의 단서와 전모를 ‘플래시백’을 이용해 풀어놓는 <혈의 누>는, 결정적 장면이라 할 수 있는 그들의 뼈아픈 속사정을 왠지 칼퇴근 하려는 공무원마냥 뭔가 생략한 채 서두르며 영화의 흐름을 빠르게 전개한다. 속도감 있는 이미지의 운동성을 통해 장르의 재미를 전해주려는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성글게 엮인 장면은 적잖이 아쉬움을 남긴다.
인과율을 명확히 제시해야 하는 추리물로서는 불친절했고, 아비귀환의 지옥도에 내쳐질 수밖에 없는 동화도의 인간 군상들, 특히 비중 있는 캐릭터간의 느슨한 관계는 섬뜩한 영화의 강렬한 정서적 효과를 반감한다. 사건의 키를 쥐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고 뺴어난 연기도 연기지만 인권으로 분한 박용우가 당 영화를 통해 부각될 수 있었던 배경은 이를 반증한다. 누군가와 반목하고 연정을 나누는 실타래 같은 인간관계가 좀 더 구체적으로 캐릭터에 입혀졌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이 상업영화의 욕망과 작가적 야심 사이에서 고심했을 감독의 강박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영화는 중반까지 장르 영화 본연의 수순에 맞춰 충실하게 진행된다. 하지만 종반부로 접어들면서 감독은 영화 초반부터 꾸준히 구축해왔던 장르의 경계를 스스로 허물며 본심을 내비친다. 피비린내 나는 잔혹한 복수를 감행하는 연쇄살인범이 누구인지 실체를 밝히는 건 사실상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한 수단이요 장치일 뿐이다. 결국, 대중영화 안에 자신의 인장을 새기고 싶은 감독의 의도는 두 가지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한 끝에 균형을 잡지 못하고, 영화의 내러티브와 맥락에 미진하게나마 균열을 가하는 역기능으로 복무한 것이다.
그럼에도 <혈의 누>는 분명 반길 만한 영화다.
상업영화의 거대한 시스템에 투항할 수밖에 없는 지난한 상황 속에서도 작가적 시선을 영화에 담고자 끝까지 고군분투한 흔적이 <혈의 누>에는 헛되이 사그라지지 않고 대단원의 장면에 역력하게 남아 있다.
탐욕이 들끓는 동화도의 인간 군상들이 의식을 치르듯 집단적으로 피의 복수를 자행하는 그 장면은 소돔과 고모라에 다름 아니다. 잔혹함을 넘어 처연한 슬픔과 회한을 던져주는 영화는, 피눈물처럼 진한 여운을 보는 이의 가슴에 뚝뚝 떨어뜨린다.
● 찐다? 같은 차승원, 그래서 참 좋은 배우다.
알다시피 차승원의 신장 190cm에 육박함이다. 그런 육척 이상의 장신이 갓을 썼으니 이거 말 안 해도 대충 알 거다. 그런데, 그 갓 쓴 차승원의 얼굴이란 마치 두상 크기보다 훨 작은 철모 쓴 군인의 그 모습이니 이거 참! 그러니까 뭐 갓에 얼굴이 눌려 약간 찐다 같이 보인다는 말이다. ‘가오’ 잡고 영화를 끌어 나가야할 주인공임에도 .그런데 이거, 본인인 차승원도 분명 눈치 챘을 거다. 그럼에도 차승원 끝까지 좋은 연기 펼친다. 그래서 차승원은 좋은 배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