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모르겠는데 옛날 문방구에 가면 잡다한 만화잡지부터 프로레슬링 미니책자까지 다양하게 팔았다. 어린 우리의 눈을 현혹시키는 불량과자부터 시작해 요상한 지우개까지 문방구는 문방구 그 이상의 의미를 넘어 돈 100원에 꿈을 살 수 있는 보물창고였다. 케리 콘랜 감독의 <월드 오브 투모로우>을 봤을 때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책과 공책을 사기 위해 방문하기보다 50원하는 ‘너구리오락’ 한 판을 두들기기 위해 뛰어들어갔던 그 공간에 관한 추억 말이다.
95년부터 창고에서 100달러 주고 구매한 중고 매킨토시로 만든 6분 짜리 단편영화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외피를 쓰기까지는 2년이라는 시간이 더 걸렸다. 근 10년이라는 세월을 투자한 영화인만큼 ‘작품’까지는 아니더라도 재미만점인 ‘오락영화’로써는 기대해 볼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어 보인다. 화려한 이미지와 롤러코스터 같은 스토리의 진행도 박진감 넘치지만 보물을 찾듯이 숨어있는 이야기를 찾아내 영화를 ‘보기’보다 ‘읽는’다면, 더 재미있는 구석이 많은 영화이다.
잡동사니(짬뽕)SF블록버스터 <월드 오브 투모로우>, 감독 이름은 낯설어도 쭉쭉빵빵 출연진에 구미 당기는 당 영화의 몇 가지 사소한 진실 혹은 잡담을 듣고 난 후 관람하시라. 관람도우미를 자청한 본좌의 잡썰을 듣고 나서 구경가면 영화가 더 재미있으니, 모두 주목!!
SF블록버스터 영화가 아니다!
거대한 로봇이 등장하고 원대한 우주개척의 야망이 <월드 오브 투모로우>의 기본 골격이지만, 극의 긴장감을 끌어내는 것은 캡틴 조(주드 로)와 폴리(기네스 팰트로우)간의 죽기살기 사랑싸움이다.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에서도 과거 서로의 과실을 탓하는 이들의 애정행각은 스릴감과 웃음을 동시에 준다.
그러나 주거니 받거니 하는 이들의 대화나 사랑방식이 어딘지 모르게 낯설게 보이고 촌스러워 보이는 것은 왜일까? 어떤 사건에 우연찮게 끼어 들게 되면서 서로를 오해하다 사랑하게 되는 액션커플도 흔히 봤을 뿐더러, 요즘 나오는 로맨틱코미디 영화도 빠짐없이 관람했던 우리로서는 조와 폴리 커플에 대한 반응이 심상치 않다.
위기의 순간 쏟아지는 대사들, 서로를 비꼬는 악의에 찬 대화들은 그 둘이 절대로 가까워 질 수 없는 앙숙의 관계임을 재차 확인시켜준다. 그럼으로써 사건은 점점 거대한 미궁 속으로 깊이 빠져들고 위험은 거세 진다. 또한 둘이 협력하여 어떤 미션을 수행해야 하는 ‘협력자’의 역할도 커져간다. 즉, 서로 싫어하지만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되는 것이다. 결국,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커플은 가식을 벗어 던지고 진실한 실체에 가까워진다. 이런 순서에 따라 마지막 순간까지 조와 폴리는 서로의 자존심에 상처 입히는 말로 그들만의 사랑을 키워나간다.
그러나 1930년대에 유행하던 코미디 형식을 2005년 신세대에 맞게 재구성하는 것은 그리 만만한 작업이 아니다. 현대의 ‘로맨틱코미디’처럼 상황에 맞게 인물의 관계를 설정하여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것과는 달리, ‘스크루볼코미디’는 인물의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차이와 성차에 의해 사건이 ‘따라간다’. 달리 말해 사건과 갈등은 인물의 대사와 처지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대사의 ‘묘미’를 가장 극명하게 느낄 수 있는 장르가 ‘스크루볼코미디’다.
이런 특징을 케리 콘랜감독은 살리고 싶어 폴리와 조가 극 안에서 끊임없이 서로를 속이고 기만하게 설정한다. 그럼으로써 대사와 인물의 관계를 극 앞에 전진 배치하여 미스터리에 대한 궁금증을 더 크게 드리우는 반동효과를 얻었다. 또한, 고집 센 남자 조와 드세고 똑똑한 여자 폴리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하워드 혹스의 <베이비길들이기>(1938년작)의 캐리 그랜트와 캐서린 헵번을 닮아있다. 때문에 영화<월드 오브 투모로우>는 SF영화가 아닌, 할리우드 고전미가 살아 숨쉬는 로맨틱코미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관람도우미 한 말씀!
남자는 액션/SF 영화를 좋아하고, 여자는 로맨틱코미디나 멜로드라마를 좋아해서 영화관람이 용이하지 못한 커플이 있다면, <월드 오브 투모로우>를 추천한다. 말 그대로 액션과 로맨스가 1석2조로 짬뽕 되어 있어 두루두루 만족시켜 줄 것이다.
세기의 로맨스, 여기서 부활하다.
깜찍이 금발미인 기네스 펠트로, 섹시가이 주드 로, 화끈한 안젤리나 졸리 누나 등, 요즘 할리우드에서 주가폭락 없이 승승장구하는 에이스 스타들을 <월드 오브 투모로우>에 가면 몽땅 만날 수 있다. 주연들 얼굴 보느라고 조연이나 단역들은 그냥 지나치기 일쑤인데, 잠깐잠깐 비치는 악당 토튼코프와 그의 오른팔 킬러 여인의 얼굴이 낯설지 않다.
먼저, 토튼코프의 오른팔 역으로 나오는 미스터리 여인은 얼마 전에 우리의 간담을 써늘하게 했던 <쓰리, 몬스터>의 <만두>에서 만두 먹는 여인역으로 나왔던, ‘바이링’이다. 꽤나 비중 있는 조연이지만, 그녀의 운명 순탄하지 않다. 검은 선글라스와 베일로 온몸을 가려 스크린에서 관객과 제대로 눈 한번 못 맞춘다. 누가 그녀를 알아볼세라 온통 검게 분장하고 나오더니만 결국 마지막에 얼굴이 으스러진 채로 선글라스 벗겨져 등장해 주위를 더욱 더, 안타깝게 만들었다. 그러니 극장 가기 전 미스터리 우먼이 ‘바이링’임을 미리 알아주는 배려를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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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히로인 ‘비비안 리’와의 로맨스는 아직까지 말 만들기 좋아하는 호사꾼들 사이에서는 단골메뉴로 등장할 만큼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로 멋지게 재기에 성공했지만 떠나간 사랑인 로렌스 올리비에에 대한 악의로 생애를 마감한 비비안 리의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는 ‘스타’ 그 이면에 존재하는 ‘고립감’과 ‘상실감’을 대변해주는 듯 하다. 그래서 <월드 오브 투모로우>의 화려한 스타들의 출연에 좀 더 남다른 의미가 새겨진다. 유산 된 아이, 피로와 스트레스 그리고 줄담배로 인한 폐결핵의 발병 등, 육체적으로 황폐한 삶을 살았던 비비안에게 로렌스는 큰 위안이 됨과 동시에 버팀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끊이지 않는 다른 여배우들과의 염문설과 소문을 뒷받침하는 결정적 증거들은 점점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꺼야”하며 기운을 북돋았던 그녀에게 내일이 없음을, 삶은 고통임을 확인시켜주는 날 날의 연속으로 만들어버렸다. 일화에 의하면 비비안 리는 죽는 순간까지 로렌스 올리비에를 저주하면서 죽었다고 한다. 물론 어느 정도는 과장된 소문이겠지만 그녀가 로렌스 올리비에에 대하여 융합할 수 없는 극단적인 감정을 동시에 가졌음이 추측된다.
관람도우미 한 말씀!
세기의 영화팬들에게 지금까지 사랑 받고 존경받는 로렌스 올리비에와 비비안 리는 2005년 디지털 신기술로 화려하게 <월드 오브 투모로우>에서 부활되었다. 물론 비비안은 출연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비비안 리의 저주 때문인지 몰라도 악당으로 출연한 로렌스 올리비에의 등장이 그래서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2차 세계대전의 전조, ‘힌덴부르크(Hindenburg) 호’의 비극.
그러나, 근래에 밝혀진 진실에 의하면, 수소에 의한 화제가 아니라 비행선의 외관 재질이 공기와 쉽게 마찰을 일으키는 소재로 되어있어 불길이 번진 것이라 한다. 어떻게 대참사가 일어났는지는 여기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독일의 군신(軍神)이라는 칭송을 받았던 대통령 ’힌덴부르크‘의 이름을 따서 만든 비행선은 이름 자체에서부터 전쟁의 예고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있었기에 히틀러가 제3제국의 문을 열 수 있었고, 1차대전의 패전이라는 쓰라린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의 폭탄을 투하할 수 있었다.
그후, ‘힌덴부르크2호’가 실제 존재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많은 이들의 독일의 나치즘에 다시 한번 치를 떨었다고 한다. <월드 오브 투모로우>에서는 이런 역사의 의미를 극의 시작으로 차용한다. 가상으로 만든 ‘힌덴부르크3호’가 뉴욕 상공에 정박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앞으로 일어날 인류최초의 로봇 습격 사건이 단순히 오락영화를 위해 설정된 전쟁이 아니라 숨은 역사적 은유성이 있음을 반문한다. 키치적 재능만 넘친다고 대우받던 신인감독 케리 콘랜의 이미지가 싹 바뀌는 순간이다.
관람도우미 한 말씀!
수준이 높디높아 킬링타임용 오락영화는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월드 오브 투모로우>는 볼만한 가치가 있는 킬림타임용 영화로 환대 받기에 충분하다.
왜 자꾸 그래? SF영화가 아니래도!
인류를 위협하는 로봇이 출몰하여 그 뒤에 숨겨진 거대한 음모가 궁금해 죽겠는데 단서는 생각보다 적다. 엎치락뒤치락 거리는 조와 폴리를 따라 미로의 답을 찾아가기는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영화의 진행이 일반적 SF/액션영화와는 사뭇 다르다. 유난히 폴리를 잡을 때만 뽀사시한 화면처리도 적응 안 되는데, 암울한 영화도 아니면서 화면은 어찌나 어두컴컴한지. 필름느와르풍의 화면에 난데없이 출몰하는 거대 로봇 때문에 정신마저 아찔해져, 사람 정신없게 만든다.
감독은 미스터리 스릴러의 이야기 구조를 영화에 기본으로 장착시켰고 SF는 단순히 호객꾼의 노릇만 한다. 때문에 캡틴 조의 고공비행 액션 씬은 비주얼을 높이기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특히, 로봇 디자인은 워너社의 애니메이션 <아이언 자이언트>와 미야자키 하야오의 <천공이 성 라퓨타>의 거인로봇을 생각나게 만든다. 또한 캡틴 조의 기지를 수색하는 로봇은 SF영화의 고전 프리츠 랑의 <메트로 폴리스>에서 나오는 로봇과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다.
감독은 영화 <킹콩>을 많이 참조했다고 하지만 영화 내에서 나오는 메커니즘이 SF영화의 고전부터 비슷한 시대로 설정된 다른 영화의 로봇 디자인과 닮아있다. 어디선가 봤던 로봇 디자인이라는 소리를 들을 줄 뻔히 알면서도, <월드 오브 투모로우>에 로봇을 사건의 ‘가시적’인 기둥으로 과감히 세운 것은, 고전 미스터리 스릴러형식을 변주하고 싶은 감독의 욕심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관람도우미 한 말씀!
다분히 이런 고전적 코드가 나오는 것을 영화상에서 당신이 읽을 수 있다면 영화보기의 수준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것이다. 당신의 영화 매니아적 지수를 캐치하는데 <월드 오브 투모로우>는 좋은 지침서가 될 듯하다.
할리우드에서 최고의 행운아인 신인감독 케리 콘랜이 만든 <월드 오브 투모로우>에 대한 몇 가지 쓸데없는 이야기 보따리를 털어 보았다. 할리우드 SF블록버스터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극장에 가서 보니 외형적 부피가 크게 안 느껴진다면 위에서 적었듯이 단순히 외피만 블록버스터지, 속은 감독의 키치적 개성이 강한 B급영화의 정서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분명, <월드 오브 투모로우>도 최첨단 기술로 만든 21C 영화지만 복고적 느낌으로 인해 영화가 꿈의 공장임을 상기시켜주는 ‘독특한’ 영화로 기록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