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이웃집 토토로> 국내 개봉 당시, 미야자키 감독과 함께 한국을 방문한 이래 두 번째 방문. 스즈키 토시오는 미야자키 감독과는 절친한 친구 사이로, 지브리 스튜디오의 창립멤버이자 공동대표다. 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안노 히데야키, <공각기동대>의 오시이 마모루 감독 등 재패니메이션을 대표하는 명감독들과 함께 작업해 온 일본 최고의 프로듀서다.
코엑스 인터컨티넨탈 호텔내 안단테룸에서 진행된 기자간담회는 차분하지만, 작품에 대한 뜨거운 궁금증이 쏟아진 흥미로운 자리였다(그러니만큼 참석하지 못한 미야자키 감독에 대한 아쉬움이 컸던 자리이기도).
먼저, <하울의 움직이는 성> 일본내 스코어를 묻는 질문에, 스즈키 프로듀서는 “11월 20일 개봉한 이후, 이틀 만에 110만명을 동원했다. 이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140% 넘는 성과다. 지브리 스튜디오는 보통 여름방학 기간 때 영화를 개봉했기 때문에 걱정이 많았지만, 약 3주간이 흐른 지금까지 660만명이 관람했다”며, “마음 속 깊이 놀라고 있고, 어린이들의 겨울방학이 시작되는 12월 20일 정도부터 관객들이 더 늘어날 것이라고 본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그런데 보고 나면 고개가 갸우뚱하는 부분들이 있어 속시원한 해답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단 말씀! 그 중의 하나가 소피가 다시 18세로 돌아온 뒤에도, 왜 머리색깔이 변하지 않았나 하는 부분이다. 미야자키 감독의 뭔가 특별한 연출 의도가 있는 것인지 궁금한 사항인 것.
바로 이 질문에 대해 스즈키 프로듀서는 “처음에는 원래 머리색깔로 했었는데, 미야자키가 이건 아닌 것같다고 말했다. 그러자 색을 담당하는 스태프가 머리색깔만 남겨놓으면 어떻겠냐는 의견을 내놓았고, 그렇게 해보니 미야자키도 만족했다. 하지만 왜냐고 물으면 조금 곤란해진다.(웃음)”고 즐겁게 답변했다.
미야자키 감독의 작품에서 처음으로 근사한(?) 키스신이 등장하거니와 남자주인공 ‘하울’의 그 예사롭지 않은 순정만화풍 자태도 기존 그림체에선 볼 수 없는 시도라 타겟층을 다르게 잡은게 아니냐는 질문에, 스즈키 프로듀서의 다음과 같은 긴 대답이 펼쳐졌다.
“기본적으로 어린이들이 봐 줬으면 하는 생각에서 만들었다. 하지만 모든 연령층이 그에 상관없이 영화를 다 보고 있다. 우린 이 작품에서 두 가지 중요한 포인트를 설정했다. 하나는 원작에선 움직이지 않았던 성을 움직이게 만드는 점, 다른 하나는 18세 소녀가 마법에 걸려서 할머니가 되는 점이다. 그래서 미야자키는 지브리 스튜디오의 젊은 스태프들을 모아놓고 토론을 했다. 여주인공을 처음부터 끝까지 할머니로 만들었을때 과연 이게 영화가 될 것이냐를 놓고 얘기를 나눴는데, 누군가로부터 ‘여주인공이 꼭 젊고 예뻐야 할 필요는 없지 않나’는 의견이 나왔다. 미야자키는 그런 의견을 굉장히 존중하고, 참조한다. 또, ‘하울’에 대해서도 ‘그런 캐릭터가 전 싫습니다’라는 의견이 나왔는데 미야자키 왈 ‘당신은 인기가 없으니까 그런 말을 하는 거야’라고 대꾸했다. (웃음)”
‘하울’의 목소리 연기를 맡은 기무라 타쿠야에 대한 얘기도 흥미로웠다. “외모와 상관없이 미야자키 감독은 ‘하울’을 본인이라고 생각한다. (웃음) 어쨌든 30명의 후보가 있었는데, 찾기가 어렵던 중 누군가 기무라가 꼭 목소리 출연을 하고 싶다는 얘기를 꺼내 캐스팅하게 됐다. 미야자키 감독은 젊은 가수들을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유일하게 기무라만은 알고 있었다. SMAP 초창기 시절, 전철안에서 우연히 고교생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보고 불쌍하다는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다. (웃음)”라는 것.
한편,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제61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애니메이션 최초로 수상(기술공헌상)의 영예를 안기도 했다. 집행위원장인 마르코 뮬러가 베니스 초청작 중 유일한 반전(反戰) 영화임을 피력하며, 적극 추천했다는 일화를 소개하며, 스즈키 프로듀서는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에 실린 기사 소개까지 덧붙였다. ‘전쟁이라는 코드 외에 상업성과 예술성이 혼융된 대단한 작품’이 그 골자였는데, 이를 얘기하는 스즈키 프로듀서의 목소리에는 뿌듯한 자신감이 내비치기도.
이렇듯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미야자키 감독이지만, 일본이 아닌 나라에서의 흥행력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불안한’ 편.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볼 사람은 이미 다들 아는 방식(^^) 으로 ‘빠삭’하게 봤지만, 막상 극장 개봉할 경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제외하고 이렇다할 흥행 성적을 거두진 못했다(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일본문화수입개방 문제 등 복잡한 사정들이 얽혀있으니, 한번쯤 분석해볼 문제이기도!).
아무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놓고 봤을땐, 유럽에선 단연 프랑스가 압도적인 흥행 성적을 기록했다고 한다. 일본에선 지브리 스튜디오가 광고부터 배급까지 세세하게 관여하지만, 외국의 경우 배급을 맡긴 회사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만큼, ‘누구에게 맡기느냐’가 스즈키 프로듀서가 생각하는 ‘미야자키 작품의 흥행 관건’.
지브리 스튜디오를 설립하기전, 스즈키 프로듀서는 잡지사 기자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렇게 모인 기자들의 고충을 잘 안다”며, “기사거리가 될 만한 얘기들을 하고 있다”고 재치있게 말을 던지기도 했는데‘자신에게 애니메이션은 무엇인지’에 대해 아직 뚜렷하게 설명할 만한 것은 지니고 있지 않다고.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미야자키 감독의 작품들에선 이미 익숙한 ‘전쟁’이 배경이다. 원작 소설에서 하울은 황야의 마녀를 해치우고, 행방불명된 왕의 동생을 찾아올 것을 명령받지만, 여기선 하울이 전쟁에 협력할 것을 명령받는 설정으로 대담하게 재구성된 것도, 배경이 된 전쟁과 좀더 효과적으로 맞물리기 위해서였을 것(이러한 ‘전쟁’ 부분은 지금,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대한 주위의 평가를 조금 엇갈리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하다).
전쟁에 대한 묘사가 은근한 어두움을 뿌리고 있긴 하지만,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지루함을 느낄 새 없는 재미난 스토리와 캐릭터가 변함없이 들어차있다. 스즈키 프로듀서가 미야자키 감독을 두고 ‘서비스 정신이 투철하다’, 즉, ‘관객들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고 밝힌 것처럼 미소와 웃음이 섞인 유쾌함이 오랜 시간 머릿속을 떠다니는 것.
미야자키 감독의 단골 파트너 히사이시 조의 영화음악과 키무라 유미의 주제곡도 또 하나의 즐거움을 주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 일본에선 최종 관객 목표 4,000만을 향해 승승장구하고 있다. 과연, 국내 관객들은 '아름답지 않다면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부르짖는 닭살 꽃미남 '하울'에게 얼마나 매료될지 크리스마스 이브 전날을 모두 두근두근 기대해 보시길.
취재: 심수진 기자
사진: 이한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