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 몇 단계쯤 될 것 같은 ‘학교’에서, 그나마 입시 경쟁에 낄 수 있는 누군가 외엔, 들러리 선 기분으로 괴롭게 앉아있던 나날들이 그 시절 ‘너’와 ‘나’의 모습이었던 것. 그리고 몰아닥친 20대의 시간들도, 갈피를 잡을 수 없이 힘겹긴 마찬가지. 여기에 가난의 하중까지 밀려오면, 그 미칠 것 같은 심정이란!
하지만 그런 가운데도 누군가는 야마다 에이미의 소설 속 주인공처럼 “미리 말해두는데, 난 공부를 못해. 하지만 세상에는 그것보다 멋지고 중요한 일들이 많다고 생각해”, 혹은 무라카미 류처럼 “즐겁게 살지 않는 것은 죄다. 나는 내게 상처를 준 선생들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그들은 정말로 소중한 것을 내게서 빼앗아 가버렸다. 유일한 복수 방법은 그들보다 즐겁게 사는 것이다”를 외치며, 발칙한(?) 이탈을 감행한다.
어찌됐든, 모두가 심정적으론 ‘세상 한 두 번 떠났던’ 날들로 카메라를 들이댄 또 다른 영화 한 편이 바로 변영주 감독의 신작 <발레교습소>다. 어릴 적 어머니의 죽음이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민재(윤계상)’. 그는 아버지에게 구체적인 목표 대학까지 하달(?)받았지만, 울컥 솟는 반감 외에 뭘 어째야 할지 모르겠는 평범한 고3 남학생이다. 이에 비해 영악하게 자기 살길 찾아 놓은 ‘수진(김민정)’은 외모 상당히 되는 데다 머리도 좋은 고3 여학생. 하지만 수진에겐 대학입시도, 자신에게 사랑고백을 하는 동성친구도, 부모님도, 아니 세상 전체가 그저 지독히 조소하고픈 대상이다.
<발레교습소>는 민재와 수진을 주인공으로, 가난, 폭력, 진로 등의 문제를 안고 저마다의 회색빛 무게감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그들의 친구 ‘창섭’, ‘동완’, ‘기태’ 등을 배치했다. 민재의 일인칭 내레이션이 섞이며 평범한 구성으로 흘러가는 이 영화는 입시 몇 달 전부터 졸업 무렵의 시기 동안, 그런 그들에게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엮어간다.
적지 않은 이 인물들을 응집시키는 축은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발레교습소’. 어쩌다 보니 구민회관 발레강좌 수강생들로 모이게 된 그들은 강사를 비롯한 그 안의 몇몇 어른들과도 관계를 쌓아가며 청춘의 한 터널을 지나게 되는 것. 굳이 ‘발레’를 택한 건, ‘처음 신은 토슈즈가 불편하고, 발레복 입은 자신이 창피하지만 자신의 날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에 점점 익숙해지고, 드디어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성장을 하게 된다’는 의도라고.
하지만 이 영화가 ‘발레’와 ‘성장’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결합시켰는지는 솔직히 회의적이다. 많은 인물들이 지닌 갖가지 문제들을 나열하다 보니, 다소 산만한데다 (아마추어 공연이라고 하기엔 아무리 생각해도 월등한) ‘발레공연’을 대단원에 놓으면서 오히려 영화의 초점이 흐려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
답답하고 두렵기만 한 열아홉의 일상, 그 속에 민재와 수진의 풋연애, 기성 세대와의 갈등, 동성애 등 적지 않은 요소들을 담아낸 <발레교습소>는 가볍진 않은 대신, 양념 같은 조연들로 무거운 제스처를 떨쳐낸다. 이에 민재와 아버지와의 갈등 해소 등 이렇게 저렇게 벌어진 일들이 어느 결에 모두 희망적인 느낌으로 갈무리되다보니, 영화를 본 후 그 여운보단 깔끔한 장르 영화를 봤다는 기분.
진짜 현실이라기보다는, 팬시용품까진 아니어도 한 겹의 그럭저럭 예쁜 포장지로 덧씌운 듯한 <발레교습소>는 청춘 군상들의 현실 속으로 치열하게 접근해간 영화가 아닌, 접근한 ‘척’ 하고 있다는 느낌을 버릴 수 없는 영화다.
또, 비슷한 나이와 성장통(痛)을 그린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가 공간과 인물의 심리를 은유적으로 연결시켜 눈길을 끈다면, 평범한 장면 연출로 일관하는 <발레교습소>는 시트콤 캐릭터같은 주변 인물들이 주는 단순한 웃음 외에, 이렇다할 재미를 느낄 수 없는 것도 아쉬움 중의 하나.
<낮은 목소리> 등의 다큐멘터리를 거쳐 상업 영화 <밀애>, <발레교습소>까지 이어지는 변영주 감독의 행보에 왠지 안타까운 물음표를 던지게 되는 건, 찝찝하고 우울해지면서도 부조리한 세상을 향해 이유있는 불만을 터뜨리는 용감한 몸짓을 내심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절망적이고 힘겹지만, 열심히 살다보면 살.아.볼.만.하.다.고? 내 곁의 다정한 친구들과 연인, 따뜻한 누군가가 있을 거라고? 정말, 정말 그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