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줄리안 무어’를 캐스팅해 만든 <포가튼>은 그래서 더 기대를 모았는지도 모른다. 세상이 험악해져도 변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모성’을 전면 부정함으로써 유발시키는 긴장감은 애초부터 비교의 대상이 없었을 것이다. 즉, 영화의 소재와 형식만큼은 일단 관객의 호기심을 땡긴다.
아들이 비행기 사고로 죽은 지 1년, 텔리(줄리안 무어)는 오늘도 아들의 동영상과 사진을 보며 간신히 하루하루 버텨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사진 속에서 웃고 있던 아들의 모습이 사라지고 우리에겐 자식이 애초부터 없었다고 남편은 그녀를 정신병자 취급을 한다. 바로 이 순간까지 아들을 기억에서 버리지 못했건만 세상은 텔리에게 그 모든 것이 거짓이라 증명한다.
<포가튼>은 줄리안 무어의 연기력에 많은 것을 의존하고 있는 영화다. 자식에게 향한 부모의 끝없는 그리움과 애정을 ‘기억’의 일부분이라고 합리적으로 재단하지 않는다. 또한, 아기의 태동이 배안에서 느껴질 때부터 시작되는 모성의 희열을 본능 또는 본성으로 치환해서 거대한 세력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힘’으로 설정된다. 그러나 TV시리즈 [엑스파일]을 보는 듯한 중반이후부터, 가족을 분열시키는 (개인적) ‘기억’이 거대한 음모이론의 한 단면일 뿐이라는 설정은 황당하다 못해 짜증까지 동반한다.
조셉 루벤감독은 <포가튼>에서 가족의 해체를 모성과 기억의 등가교환으로 설정하여 스릴러의 기본 골격을 형성했다. 영화는 텔리의 모성이 이 원리를 하나하나 부정하고 오류를 짚어냄으로써 긴장감을 끌어낸다. 하지만 음모를 파헤치긴 보단 미궁 속으로 무작정 떨어진 고립감이 영화의 극적 긴장을 상쇄시킨다. 아들에 관한 기억을 되찾기 위해 음산한 뉴욕의 밤거리를 헤매던 어머니가 기억이 아닌 아들의 실체를 확인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단서도, 부연설명도 없다. 오로지 간절한 ‘모성’에 의해 죽은 아들마저 살린다는 현대판 ‘전설의고향’ 할리우드 버전이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 끝나버리는 허무한 결말은 나름대로 열린 구조라 우기며 배짱을 튕기겠지만 결국, 스릴러의 외피를 둘러 쓴, 모성의 위대함만 찬양하는 교훈드라마에 가깝다. 관객은 기억을 조작한 세력이 궁금하기보다 삐딱하게 흘러간 영화 내용에 강한 의혹을 드러낼 것이다.
현미국의 사회적 불안요소들이 최소집단인 ‘가족’을 해체시키는 새로운 공포 소재로 등장한 만큼 감독 조셉 루벤도 이런 것을 상징화하기 위해 실체 없는 거대한 세력 앞에 평범한 중산층가정을 빗대어 붙여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초에 예상했던 의도적 효과들은 상업적 형식에 얽매이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좌표를 잃은 채 표류한다.
<포가튼>은 ‘멀더’ 빠진 “엑스파일”이자 ‘모성’을 추상화시켜 피카소 그림 같은 명작이라고 우기는 얼치기 “환상특급”이다. 같이 탑승할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