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아오키 역할을 연기한 배우는 있다. 하지만 아오키가 우리에게 안겨주었던 재미를 선사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미국판 [쉘 위 댄스?]와 원작의 차이가 바로 여기 있다. 원작은 춤을 통해 중년 남성이 삶의 새로운 활력을 찾아간다는 묵직한 주제와 아울러 아오키 같은 조연들을 통해 재미를 선사했었다. 하지만 미국 판 리메이크는 그런 재미가 감소되어 건조하게 다가온다. 약간 나이가 든 성숙함 이라고 할까. 물론 할리우드 공식의 뻔함을 간직하고 있지만 원작의 이야기와 느낌을 그대로 살려내면서 자신만의 분위기를 살려내고 있다.
전체적인 이야기 구성은 비슷하다. 다만 늘 그만그만한 샐러리맨이었던 남편이 유언장 담당 변호사로,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아내는 커리어우먼으로 상류층에 가까워졌다. 아이들도 다 자라고 이제 더 이상 가정의 가장이 되지 못하는 상황. 품안의 자식이란 말처럼 아이들마저도 자기들의 삶을 살아가느라 아빠의 출 퇴근마저도 관심이 없다. 그렇다고 뚜렷이 불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딱히 뭐라 말할 수 없지만 삶이 공허하다. 뭔가 삶의 새로운 활력이 필요하지만 그걸 찾지 못하고 매일 똑같은 지하철에 몸을 싣고 출퇴근을 반복한다. 그러다 발견한 게 바로 춤이다. 엄밀히 얘기하자면 댄스 교습소의 미모의 여자다.
매일 같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에 이끌려 접하게 된 게 춤이다. 그리고 존은 이곳에서 그동안 자신이 만나왔던 사람들과는 다른 종류의 사람들을 만난다. 물론 몰래 춤을 배우고 있는 같은 회사의 동료를 만나기도 한다. 그러면서 존은 여자가 아닌 춤이라는 걸 진정으로 접하게 된다. 그리고 춤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활력을 찾아가고 있는지를 발견하게 된다.
사람에겐 늘 긴장이 필요하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 해도 편안함과 동시에 서로 긴장감이 조금씩은 유지돼야 한다. 성장한 아이들까지 있는 결혼 생활 10여년이 흐른 존(리차드 기어)과 비벌리(수잔 서랜든) 사이엔 긴장감이 없다. 서로를 믿는다는 게 오히려 무관심한 것처럼 느껴진다. 존이 새로운 활력을 찾아가고 있다는 걸 깨닫고서야 비벌리는 존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탐정을 고용해 뒷조사를 한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사랑에는 믿음 못지않게 관심이 필요하단 얘기다.
신비의 여인 폴리나(제니퍼 로페즈)의 육감적인 몸매는 극의 흐름을 방해한다. 육감적인 몸매가 신비로움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원작이 없었다면 충분히 감안이 되겠지만 이렇게 리메이크 되는 영화들은 태생적으로 원작과 비교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때문에 이 영화가 웃음의 장치를 많은 부분 거둬냈다고 하지만 원작과 비교되는 상황 때문에 묘한 웃음이 흘러나오기도 한다.
춤이 자신의 모든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마음에 상처를 안고 댄스 교습소에 숨어살던 폴리나 역시 존을 통해 새로운 탈출구를 발견한다. 존과 폴리나는 서로를 통해 인생의 또 다른 전환점을 맞게 된 것이다. 앞길이 보이지 않을 때 일탈이 아닌 누군가를 통한 자극이 두 사람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준 것이다. 다양한 춤과 함께 흘러나오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만으로도 충분히 즐길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다. 경쾌한 듯 하면서도 뭔가 우수에 젖은 느낌, 성숙한 영화의 느낌이 음악으로 표현된 듯하다.
아내를 향해 장미 한 송이 들고 나타나는 리차드 기어의 모습은 황홀하다. 뭘 해도 멋있고 잘 어울리는 리차드 기어의 매력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당신이랑 함께 행복할 때가 가장 자랑스럽다”고 뒤늦게 울먹이며 고백하고 나가버리는 리차드 기어와 혼자 남아 울고 있는 수잔 서랜든의 모습은 삶이 그대로 투영된 듯 한 느낌이 들 정도로 리얼하게 다가온다.
영화가 한층 성숙해져 돌아온 듯 한 느낌이 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원작의 묘미를 충분히 살리면서도 할리우드 시스템을 교묘하게 접목한 쉘 위 댄스?. 어긋난 일탈이 아닌 신선한 자극을 통해 무기력한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변화시킬 용기를 안겨주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