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 말고도, 이날 시사에는 기존의 그것과 달리 한 가지 특이한 점이 눈에 띄었는데, 그건 다름 아닌 팝콘과 콜라를 일일이 공짜로 제공했다는 것이다. 주최측의 이러한 이벤트는 <투모로우>가 어떤 영화인지 극명하게 드러낸다.
‘팝콘성 블록버스터 재난영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을...
오래 전 필자가 썰 풀어놨듯, 재난영화는
전지전능하다고 자부하는 인간에게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들이 존(잠)재 한다는 사실을 휘황한 스펙터클과 함께 각인시켜 주는 장르다. 그와 동시에 이 장르는 그럼으로써 우리가 미처 인식하고 있지 못했던 혹은 까먹고 있었던 보편적이면서도 전통적인 가치들의 재각성을 요구한다.
한데, 그러한 움직일 수 없는 가치들의 지평으로 회귀하고자 우리를 이끄는 요체가 아이러니하게도 할리우드라는 사실이다. 규모의 경제와 기술 결정론의 메커니즘을 통하여 생산되는 무한증식의 순간적 비주얼로 숭고한 사유 방식의 토대를 가볍게 밟아버리며 한 없이 우리를 일차원적 단세포로 퇴행시키는 그들이 말이다. 그래서 얘들이 영악하다는 거다.
이러한 어긋남의 순환과 메시지는 이미 수십 년 동안 지속돼온 재난영화의 형식이자 일종의 숙명이다. 때문에 볼거리와 재미만 있다면 다른 모든 것은 용서가 되거나 무시되곤 하는 게 오늘날의 분위기다. 문제는 환락의 늪 속에 허우적대는 인류를 자신들이 메시아인 양 길어 올리며 구원자로 행세하는, 다시 말해 이건 해도 해도 너무 한다는 궁극의 오바질을 잊을 만하면 자행하는 할리우드산 영화들이 오다가다 꼭 목도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완전 코미디다. 당 영화의 감독인 롤랜드 에머리히의 전작인 <인디펜던스 데이>도 이 부류에 속하는 블록버스터라 볼 수 있다. 다행히도 <투모로우>는 그러한 안면에 철판 깐 웃긴 작태를 범하지 않는다.
되레,
현 부시 정권의 오만불손한 환경정책을 강도 높게 비판하는 정치적 메시지가 있다고 해 눈길을 끌고 있는 중이다. 허나, 그리 뭐 대단한 안티테제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실 건 없다. 제작진들이야 그러한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스스로 감동 먹을 수야 있겠지만, 워낙이 그 수가 빤해 우리들에게 심도 있게 와 닿지는 않는다.
<효자동 이발사>의 송강호 못지않은 부성애가 느껴지는, 위험에 갇혀있는 아들(제이크 길렌할)을 찾아 기나긴 시련의 길을 나서는 아버지(데니스 퀘이드)의 모습을 통해 휴머니즘과 가족애를 옹호하며 종래의 재난 영화보다는 훨씬 드라마에 신경 썼다는 흔적 역시 <투모로우>에는 역력하다. 그렇지만 하루 이틀 울궈먹은 소재가 아니다 보니 가슴 속 깊은 그 곳까지 감정의 돌덩이를 던지지 못한다. 어마어마한 물량공세와 크기로 승부수를 던졌던 <인디펜던스 데이> <고질라> 등을 봐서 알겠지만, 재앙의 한 복판에서 사방으로 뛰 다니는 인간들의 이야기를 드라마틱하고 촘촘하게 엮어내는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솜씨는 그리 신통치 않다.
어쨌든,
기존의 그것들과는 차별화를 그으려는 이 같은 영화의 요소들. 물론 가상하다. 하지만 이건 부차적일 요소일 뿐, <투모로우>의 묘미는 대부분의 재난 블록버스터의 지향점이 그러하듯 가공할만한 진(살)풍경의 스펙터클에 있다. 현 인류가 실질적으로 떠안고 있는 크나큰 환경문제인 지구의 온난화에 의한 기상이변이란 그럴듯한 설정을 가지고와 뉴욕을 중심으로 각 나라의 대도시가 우박, 홍수, 해일, 토네이도로 쑥대밭이 되는 기괴한 장면은 가히 허걱! 수준이다. 동네 북마냥 재난 영화마다 단골로 등장해 온 몸으로 수난을 겪는 불쌍시런 자유의 여신상은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또 험한 꼴을 당하고야 만다.
영화 속에 출몰하는 해괴망측한 기상 이변 중에서도 압권인 것은 빙하기가 도래해 온 도시가 얼음으로 뒤덮이는 극단의 순간들이다. 맨하튼의 마천루와 지상이 얼어붙은 풍경을 맞닥뜨리고 있노라면 지독히 을씨년스러우면서도 이탈리안 호러의 거장 다리오 아르젠트의 잔혹한 장면이 그렇게 인식되듯 심지어 탐미적으로 보인다는 게 이 영화가 전면에 내세우는 아찔한 이미지들의 기기묘묘한 힘이다.
아쉬운 건,
앞서 말한 바와 같은 맥락이지만, 스토리가 있긴 하되 긴장감과 박진감이 결여돼 있다는 거다. 거대한 빙하기의 기습으로 인해 스크린 밖에 자리한 관객에게까지 한기가 느껴지는데 그걸 녹여낼 만한 살 떨리는 흥미진진함이 부족, 허전함이 남는다. 고로, 심장이 약해 대수롭지 않은 일에 가슴 벌렁벌렁 거리며 긴장감을 심하게 자주 느끼는 노약자나 심신이 허약한 분들을 제외하고는 굳이 당 영화가 와락 던져줄 충격완화를 위해 준비한다는 우황청심환과 같은 약을 드실 필요는 없다.
주인공들이 대피한 맨해튼 공립 도서관 안에서의 폐쇄공간을 또는 때 아닌 난리로 우리를 벗어난 늑대들의 인간을 향한 광포한 공격의 달려듦을 좀더 적극적으로 활용했어야 했다. 재난 영화의 원조라 불리는 <타워링>과 <포세이돈 어드벤처> 등이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저력은 <투모로우>가 간과하고 있는 서서히 조여 오는 긴박감 같은 것을 볼거리 못지않게 비중을 실어 묵직하게 다뤘기 때문이다.
대중이 재난 영화를 찾는 건 여러 가지가 이유가 있을 게다. 하지만 ‘불구경만큼이나 재미난 구경거리도 없다’는 생활밀착적 문구만큼 가장 유효적절한 설명도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투모로우>는 불대신 얼음이긴 하지만 정말이지 구경거리를 눈이 시리도록 서비스한다. 자신의 본분은 이행하되 그 이상의 진화를 이루진 못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투모로우>는 누가 재난 영화 아니랄까봐 대중에게 재앙을 안겨주며 완전 죽을 쑨 그간의 영화와는 격이 다름과 동시에 팝콘 영화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