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킬빌> vol.1의 DVD가 무삭제로 출시가 됐다. 워낙 극장에서 개봉할 때 등급보류가 되어 몇 초를 삭제해 간신히 18세 관람가로 개봉했던지라 DVD 무삭제 출시는 숱한 화제를 낳았다.
이에 뒤질세라 갑자기 <스위밍 풀>도, <한니발>도, 심지어 <누드모델>도 무삭제로 출시가 되었다. 이럴 수가. 대한민국에 갑자기 표현의 자유의 광풍이 휘몰아친단 말인가. 영화팬들 중 일부는 펄쩍펄쩍 기쁨의 뜀박질을 뛰며 환호했으리라. <스위밍 풀>은 오래 전부터 조소를 받아오던 ‘체모 노출’ 사항에 딱 걸리는 영화다. <한니발>에서 두뇌를 갈라 뇌를 잘라내 요리해먹는 장면은 어떠한가. 그런가 하면, 극장 개봉 당시에도 2/3 이상이 잘려나갔던 <누드모델>은 또 어떻고? 하지만 이런 바람을 타고도 여전히 DVD로 출시되지 못하는 안타까운 영화들이 많다. 혹은 몇몇 장면의 삭제라는 과정을 거쳐야 하거나. 왜? 왜? 왜?
러닝타임이 긴 영화도 한 장에 디스크 안에 담을 수 있는 DVD란 매체의 너그러움은, 테입 길이에 맞추느라 영화를 마구 잘라내던 비디오 업자들의 마음까지 너그럽게 만들었다. 적어도 길다고, 지루하다고 장면을 마구 잘라내는 DVD 업자는 비디오 업자에 비하면 거의 없다. 그러나, DVD라는 광매체의 너그럽고 부드럽고 아름다우신 마음씀씀이도 도무지 통하지 않는 분들이 계셨으니...
이 분들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언제나 우리 국민들이 정신 건강을 염려하시는 분들로서, 지나친 걱정 때문에 치질과 변비를 비롯한 각종 배설기관 질환과 스트레스와 고민으로 인한 이마, 눈가, 눈썹 사이를 중심으로 한 주름증가증상과 눈 밑 다크써클 확대증상, 탈모현상 등을 경험하고 계시며, 지나친 우국충정과 바른생활 강박증으로 인한 위산과다 및 위염을 앓고 계시는... 것 같다고 추측만 되는, 영등위에서 심의를 하는 분들이시다.
● 둘
아아, 심의, 하면 갖가지 생각나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이 있다. 화면 가득히 빠알간 하트가 둥~둥 떠다니던 <패션쇼> 사건, 하얀 막대기가 남사스럽게 남자주인공을 쫄~쫄~ 쫓아다니던 <부기나이트> 사건, 특정장면에서 갑자기 모자이크 화면이나, 뭉개진 화면이나, 허연 스프레이가 뿌려진 화면(업자 용어로 ‘보카시 처리를 한다’고 한다.) 등이 등장하는 영화는 너무너무 많아 제목을 일일이 대기도 귀찮을 정도다. 18세 관람가 영화의 2/3 이상이 그러지 않았을까나? 비디오는 더 심하다. 보카시를 치다 못해 마구잡이로 막 잘라내는 게 비디오였다.
그나마 DVD는 사정이 좀 나았다...곤 하지만, 글쎄올시다. DVD에 관심을 갖게 된지 얼마 안 된 나조차도 기억하는 <포레스트 검프> 사건을 비롯하여... <뱀파이어와의 인터뷰>가 아직도 출시되지 않는 이유가 어딘가에 0.1초 보이는 체모 때문이라지. 게다가 많은 DVD 팬들이 오해하는 건데, DVD도 보카시는 당연하고 일정 장면 삭제도 한다. DVD를 사는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는, ‘기술적으루다가 삭제가 불가능하다’는 해괴한 믿음이 어디에서 시작하여 어떻게 마구마구 퍼져나갔는지 모른다만...
공윤에서 공진협, 그리고 지금의 영등위로 이름이 바뀌기까지, 뭐 세상이 많이 좋아진 게 맞긴 한 거 같다. 하지만 여전히 갈증에 눈 뒤집어지며 죽어가기 일보 직전인 우리 영화팬들에게 지금의 영등위는 2%도 아니고 20% 부족하다. 바야흐로 표현의 자유 보장, 무삭제의 따땃~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 건 불과 얼마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바람 역시 가뭄에 콩 나듯이 부니까. 아무리 <킬빌>과 <한니발>과 <스위밍 풀>과 <누드 모델>이 무삭제로 출시된다 한들, 심의를 통과하지 못하거나 몇몇 장면을 삭제해서야 겨우 심의를 통과하는 영화들은 출근시간 꾸역꾸역 지하철 안으로 밀려드는 승객 수만큼이나 많다.
게다가 ‘등급보류 조항’. 영등위가 아무리 ‘아니에요, 우린 과거의 공윤과 달라요, 우리는 검열이 아니라 사전심의를 할 뿐이에요’라며 얼굴이 새빨개져서 억울하다고 외쳐도 말은 똑바로 하자. 무한정의 횟수만큼 때릴 수 있는 등급보류 조항은 사실상 검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미 헌법재판소에 의해 ‘위헌’이라는 판정이 난 영화진흥법의 등급보류 조항과 달리, 비디오와 DVD가 영향을 받는 음반, ‘비디오 및 게임물에 관한 법률(이하 음비게법)’의 등급보류 조항은 이제사 서울행정법원에 의해 헌법재판소에 위헌심판이 제청된 상태다. 올해 3월 초에. 오늘 뉴스를 찾아보니 뭐 음반과 비디오물과 게임물에 관한 법을 각각 따로 새로 만든다는 뉴스가 있던데 과연 실질적 검열이 폐지되는 법이 될지 아닐지 알 수가 없다. 한국에서 법을 ‘개정’한다고 해서 잔뜩 기대했다가 뚜껑 열어보니 ‘개악’인 경우가 어디 한두 번이었나.
● 넷
딴지일보와 인터뷰한 민주노동당 노회찬 사무총장이 말하길, “상영되지 못할 영화란 없다”라 했다. 과연 맞는 말이다. 사실 우린 이제까지 영등위를 비판하며, 검열제도를 조올라 씹으면서 큰 영화사가 만들고, 이름있는 배우가 출연하고, 뭐 때문에, 또 뭐 때문에 유명한 영화들만 취급했다. 단적으로 깐느영화제에서 상탄 영화도 몰라보다니 무식한 넘~ 이러면서 말이다. 하지만 삭제의 징그러운 촉수에 가장 많이 터치 당하는 건 우리가 흔히 ‘쌈마이’라고 부르는 싸구려 영화, 혹은 B급영화들이다. 혹은 인디 영화들이거나. 그럼 이 영화들은 삭제가 돼도, 검열을 당해도 괜찮다는 것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당대엔 쓰레기 영화라고 온갖 조롱의 대상이 됐던 에드 우드의 영화는, 어느새 영화광들의 절절한 욕망과 절망을 대변하는 대명사가 되고 말았다. 당대에 ‘포르노’라며 감독이 법정에 끌려간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감각의 제국>, 또 법정에 선 건 아니지만 하여간 논란이 됐던 베르톨루치 감독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지금 ‘걸작’ 소리 들으며 잘 먹고 잘 산다. (물론 우린 아직까지 제대로 된 화면의 두 영화를 ‘합법적으로’ 볼 수가 없다만.)
매체 자체도 쌈마이고, 그 쌈마이 매체 안에 온갖 인생과 우주가 들어있고, 쌈마이를 제대로 쌈마이로 끝까지 밀고 나가면 아아트가 되고, 쌈마이의 방향으로 한번 더 비틀면 B급영화가 되고 그 반대방향으로 한번 비틀면 예술영화가 되고... 영등위의 고상하신 분들이야 우아~한 영화들만 보시는지 몰라도, 그런 우아~한 영화들의 토양 역시 쌈마이 영화들임을... 스필버그도 마틴 스콜세지도 코폴라도 로저 코만 밑에서 영화를 배웠고 말이지. 피터 잭슨, 팀 버튼 초기 영화들 봐라. 쌈마이도 그런 쌈마이가 없다.
<누드 모델>이 심의를 무삭제로 통과한 게 ‘예술성을 인정받아서’ 그렇단다. 그럼 그 정도 수위와 빈도의 노출씬이 있는데 심의위원들 눈에 예술성을 인정받지 못하면 심의를 통과 못하는 건가? 쌈마이면 통과 못 하는 건가? 쌈마이를 즐기는 대한민국의 수많은 영화팬들은 어떡할 건데? 그 쌈마이 안에서 쪼물락 쪼물락 거리면서 진주를 만들어내는 숨은 마이다스들은 어떡할 건데? 진주를 꿰면 값비싼 진주목걸이가 된다. 그런데 플라스틱도 잘 꿰면 꽤나 예쁜 목걸이가 되고, 쇳조각도 잘 다듬어 부속물을 잘 달면 개성 넘치는 목걸이도 되고 귀고리도 되는 거 아니겠는가.(요즘엔 수공예라고 이런 게 더 비싸더라.)
영등위, 이거 정말 문제있다. 아무리 이 세상에 폭력적인 영화가 범람한들 영등위가 일반 국민들에게 휘두르는 검열의 칼날만큼 폭력적일까. 아무리 이 세상에 음란과 선정성으로 범벅을 한 영화가 판친다 한들 영등위가 ‘각 털들 가려’ 하는 것만큼 음란하고 선정적일까. 대한민국에서 가장 음란하고 가장 선정적인 곳, 그곳이 바로 영등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