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같은 상황 변화가 관객의 욕구에 영화자본이 호응했다는, 영화 외부의 경제적/산업적 요인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홍상수 역시 필모그래피가 길어질수록 그의 영화 특유의 '낯섬'과 '냉소'를 덜어가며 더 많은 관객들이 즐길만한 종류의 것으로 자신의 영화를 변화시켜왔다. 물론 이런 변화가 상업적 성공을 목표로 한 전략은 아닐 것이다. 그의 영화에 호의를 보이는 관객이 지식인이나 문인 혹은 (그 경계가 모호하긴 하지만) 영화 매니아들 집단에만 집중적으로 분포해있다는 사실은, 그의 가장 대중적인 영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개봉 이후에도 그다지 크게 변하지 않을 것 같다. 홍상수 영화는 여전히 이상하고 낯설며, 대중적 흥행을 위해 상업 영화가 조장하는 그 흔한 감동 같은 건 한 자락도 흘리지 않는, 건조하고 불친절한 영화인 것이다.
그렇지만 홍상수의 영화에서 변화의 징후는 분명 발견된다. 혹자는 홍상수의 영화가 "느긋해지고 밝아졌다"며 변함 없는 혹은 한층 견고해진 지지를 밝히기도 한다. 이런 변화는 인간 홍상수의 내면적 성숙이나 세계관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이도 있다. 홍상수의 영화의 매력들, 즉, 섬세한 구어적 언어감각, 영화형식/구조적 실험 등은 여전히 영화 속에서 빛을 발한다. 동시에 <오! 수정>에서 드러나기 시작한 변화의 징후들은 급기야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 와선 관객에게 농담-가령 문호와 헌준이 중국집 종업원에게 작업을 거는 장면-을 던지며 그의 영화에서 '유쾌함'을 느끼게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건 마치 홍상수가 그의 길지 않은 영화 이력 속에서 그의 주요한 영화적 모티프인 '반복과 차이'를 재현하고 변주하는 듯한 양상이다. 그렇다면, 홍상수는 무얼 '반복'하고 있고 또 어떻게 '차이'를 확대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런 변화는 정말 홍상수 영화를 '볼 만한 것'으로 진화시키고 있는가?
1. 반복
홍상수의 영화가 새롭게 혹은 낯설게 보였던 가장 큰 이유는 '일상성'에 있다. '일상성'은 영화의 소재 선택의 원칙이라기보다, 영화적 공간을 구성하는 방법론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가 집요하게 추구하는 영화의 리얼리티를 확보하는데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우리의 실제 일상이 그러하듯, 홍상수의 영화에는 뚜렷한 내러티브가 없다. 인과의 맺고 끊음이 불분명한 사건이 아무렇지도 않게 삽입되고, 등장인물들은 사건의 진행에 관계없는 일 근처에서 기웃거리기를 서슴지 않는다. 가령 <강원도의 힘>에는 바닷가에서 동요를 부르던 세 친구가 정확한 가사가 기억나지 않아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이 1분 가량 삽입되었다. <생활의 발견>에선 경수가 놀러간 선배 집에서 선배의 조카가 자동차의 문에 손가락이 끼어버리는 사건이 벌어지지만, 이 역시 경수의 이후 여행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홍상수 영화의 이런 느슨한 구조는 일상을 사는 우리의 경험과 인지적 측면에서 매우 유사하다.
실제로 우리의 삶에는 정해진 내러티브가 없으며, 일상의 수많은 사건들 속에서 사후적으로 그 중대함이 드러나는 사건들을 구별해내기란 불가능하다. 홍상수는 흡사 통계적으로 계산된 결과이기라도 하듯 유의미와 무의미의 사건들을 영화 속에 배치하여 실재 세계를 시뮬레이션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홍상수의 영화가 '낯선' 이유는 그의 영화적 사건들이 현실과 다르거나 작위적으로 구성되어서가 아니라, 다른 영화들이 영화 문법에 따라 자기완결적으로 구축한 영화 공간에 관객들이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며, 바로 그런 관습화된 관람태도가 파괴되고 영화가 현실에 한층 가까워지는 경험을 하기 때문이라는 점이 명백해진다. 이렇게 현실의 감각으로 영화 속에 재현된 이미지가 갖는 실재감은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갑작스런 살인씬에서 드러나듯 때로 강렬한 정서적 충격을 주기도 한다.
‘리얼리티’라는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홍상수는 영화의 기술적 측면에 많은 제한을 가했다. 즉, 영화가 관객의 감정을 조작하고 등장인물에 정서적으로 공감하게 만들기 위해 발전되어온 다양한 영화적 기교들을 포기한 것이다. 카메라는 롱 쇼트의 거리에서 고정된 위치를 유지하며 원쇼트 원씬으로 처리한다. <오! 수정> 이전의 영화에는 시점쇼트가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며, 클로즈업이나 패닝 등 최소한의 카메라 워크도 자제했다. 이를 통해 영화는 이중적인 효과는 얻게 된다. 즉, 순수한 관찰자의 입장에서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여 시각적/물리적 리얼리티를 제고할 뿐만 아니라,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객체로서 관객을 영화 속에 포획하여, 관객 일반이 느끼는 그 비루하고 폐쇄적인 일상의 감각까지 살려냄으로써 심리적 리얼리티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홍상수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또 다른 구성요소는 '언어에 대한 섬세한 감각'이다. 일상에서 금방 채취한 듯한 생생한 구어들은, 불쾌할 정도로 비관적인 홍상수의 영화에서 때로 유쾌한 흥취를 느끼게 한다. 홍상수 영화가 코미디라면 그건 촌철살인의 묘미를 선사하는 대사들 때문이다. <생활의 발견>에서 술에 취한 명숙이가 내뱉은 저 유명한 대사, "우리 어색한 거 깨게 뽀뽀나 할까요?", 혹은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헌준이 엑스터시의 순간에 내뱉는 "깨끗하게 해줄게" 같은 어이없고 때로 황당한 대사는 홍상수 영화에 비틀린 유머를 선사한다.
이렇듯 홍상수는 그의 영화에서 리얼리티의 극대화를 목표로 느슨한 내러티브와 절제된 카메라 워크로 구축한 영화적 공간에서 섬세한 구어적 감각의 언어를 구사하는 천박하고 속물적인 인간들이 거닐게 하며 정교한 형식적 실험을 완성해 나아가는 방식을 반복해왔다. 그러나 이런 경향은 최근작에 이르러서는 점차 변모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안이한 매너리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작가 홍상수의 전략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최근 영화들은 이전 영화들과 어떤 '차이'를 보이고 있는가?
2. 차이
앞서 홍상수 영화의 '낯섬'은 기존의 영화문법에서 벗어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영화 속에 재현하기 위한 선택이라고 논하였다. 그렇다면 홍상수는 현실의 반영을 포기하고 그의 영화를 동시대 인간들의 비루함과 자기모순과 염치불구의 성욕을 드러내는 일종의 '우화'로 만들기로 작정했단 말인가? 홍상수 영화의 리얼리티를 그런 단순 도식으로 이해하기엔 무리가 있다. 홍상수가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극영화를 찍는다는 사실은, 기계적 객관성을 유지하며 현실을 있는 그대로 필름에 옮기는 대신, 그가 목도한 현실의 본질을 영화 형식을 통해 재구성하여 관객에게 전달하는, 견자의 혜안과 사명을 지닌 예술가로서 자신을 규정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의 영화적 형식이 꾸준히 변해가고 또 우연히도 점차 덜 낯설어지는 것은 현실의 본질을 규명하기 위한 그의 근대적 기획이 시도하는 다양한 실험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홍상수가 드러내려는 현실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가 드러내는 현실의 본질은 눈여겨 지켜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3. 무의미의 발견
결국 홍상수의 영화가 일상성의 재현을 통해 드러내는 현실의 본질은 '우리의 삶이 비루하고 인간은 여건만 주어진다면 비열한 욕망에 몸을 맡기는 추하디 추한 동물이며, 타인과의 진정한 소통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적어도 <오! 수정> 이전의 영화들은 이런 내용을 말하고 있었다. 가만, 이거 새삼스럽지 않은가? 우리의 삶이 그러하고 인간이 그러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홍상수의 영화를 보며 낄낄대고 웃는 사람은 스크린 속에 재현되는 추태가 바로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다른 사람들도 다를 바 없다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다. 홍상수의 영화는 새로운 정보는 전혀 내놓지 않는다. 관객은 이미 알고 있는 세상사의 지식을 스크린을 통해 확인할 따름이다. 거기에 어떤 즐거움이 있다면, 그것은 숨기고 싶은 자신의 치부가 영화를 보는 타인과 자기 자신에 의해 공공연하게 조롱당하고 있다는 상황이 주는 매저키스틱한 즐거움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홍상수 영화를 보는 행위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삶의 지혜를 얻기 위해 극장을 찾는 관객은 없다. 홍상수는 뛰어난 작가적 감수성으로 축조한 리얼리티의 공간 속에서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현실의 모습을 낯설게 만들어 제시하며 우리의 삶이 얼마나 비루하고 너저분하며 지리멸렬한지 신랄하게 드러낸다. 프랑스 일간지의 평가대로 홍상수의 영화에서 "표현된 세계보다 더 보편적이고 더 직접적이고 그러니까 더 가깝게 느껴지는 세계는 없을 것이다." 이 농축되었지만 과장되지 않은 현실의 재현에 충격을 받은 어떤 관객이 자신의 삶을 좀 더 풍요롭게 만들도록 노력했다더라는, 바람직한-하지만 그다지 현실성은 없어 보이고, 또 홍상수의 의도도 아닐- 결과를 상상해볼 수는 있다. 하지만 그건 관객의 몫이다. 그런 착실한 효과를 기대하지 않더라도 홍상수의 영화는 여전히 볼 이유가 많았다.
홍상수의 영화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의 얘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가 친절해지고 낯익어지는 만큼 영화는 남의 이야기가 되어갔다. 영락없는 '음담패설'이 되어간 것이다.
심지어 그의 음담패설은 균형감마저 상실했다. <오! 수정>까지 홍상수 영화의 주인공은 남성과 여성이었다. 그러나 <생활의 발견>과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주인공은 남성이며, 영화는 그들이 겪는 섹스 무용담 혹은 후일담을 풀어놓을 뿐이다. 이전 영화에서 욕망의 주체로서 낯선 공간을 배회하던 여성들은 여성은 점차 남성들의 하릴없는 섹스 판타지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강원도의 힘>의 지숙과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선화를 비교해보면 그 차이는 확연하다. 좌절된 사랑의 회한으로 꺼이꺼이 울음을 터뜨리던 지숙과 달리 선화는 아무런 실존적 고민이 없는 캐릭터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성욕을 드러내는 모든 남자를 만족시키는 기능적 캐릭터일 뿐이니까. 어느 삶의 혹은 환상의 영역에서 저런 여성 캐릭터가 현실감을 갖는지는 자명하다. 윤락가나 섹스 판타지! 어느 평론가의 말과는 달리 선화라는 캐릭터는 홍상수의 영화에서 "여자가 남자를 추월"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음담패설의 나락으로 추락했음을 증명할 뿐이다.
공적이고 역사적인 차원을 거부하고 영화가 다루는 범위를 사적이고 개인적인 영역으로 환원해버린 후, 그 텅빈 서사의 공간을 뭔가 다른 미학적 원칙에 따라 채워나가는 것은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홍상수의 이전 영화들은 그 어려운 미션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나아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최근의 그의 영화들은 그 공간에 이상한 걸 채우려하는 것 같다. 세계를 비관적으로 바라보며 냉소를 흘린다면, 세상은 분명 비루하고 위선에 가득 차 있으니까, 납득할만한 태도이다.
하지만 느긋함과 유쾌함을 핑계로 공정하지도 않은 판타지를 채우려 한다면, 발견되는 건 홍상수 영화를 보는 행위의 무의미함뿐이다. 그런 홍상수 영화는 단지 불쾌한 코미디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