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을 계속 두드리면 처음에는 아무런 표시도 나지 않지만 그 충격이 오래 누적되면 언젠가는 내부 성질이 변해서 휘어지거나 아니면 부러져 버리게 된다. 한번 시위를 떠난 폭력은 눈으로만 볼 수 없을 뿐 언젠가 가시적인 형태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유아기의 성적 폭력을 가슴 속에 품고 살다가 성인이 되어 가해자를 찾아 살해한 어느 여인의 사례를 보아도 알 수 있듯 폭력의 연쇄고리는 결코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개인 간의 폭력이 이런 결과를 초래하는데 하물며 집단, 국가적 차원으로 이루어지는 내부 구성원의 갈등, 집단과 집단의 갈등을 통해 누적된 폭력의 산물은 얼마나 커다란 비극을 낳을 것인 지는 지난 현대사를 통해 우리가 익히 체험해 온 부끄러운 기억들이다. 부도덕한 정권의 체제 유지를 위한 불합리한 폭력들... 군사문화, 가부장제, 지역감정...... 같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당연하다는 듯 서로에게 행해졌던 증오와 살인 들은 결국 집단의 폭력이 개인의 의식 속에 끊임없이 누적되어 왔던 결과가 아닐까.
이 영화는 사회진보나 모순된 체제의 개선과 같은 켄 로치 류의 거대담론 전략을 택하기보다 희생자들 개개인의 비극을 담담한 어조로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분노나 울분보다는 어두운 화면 가득 배어나오는 우울함이 앞선다. 한발의 총성과 함께 영화가 끝나고 난 후에도 왠지 모르게 아직 끝이 나지 않은 것 같은 허탈감이 느껴지는 것은 영화 속 일본이나 우리가 눈뜨고 잠들 때까지 활보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나 그런 비극이 일어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기 때문인 것은 아닐른 지.
이러한 가슴 시린 화두를 던지는 문제작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결코 완벽한 작품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결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어떠한 암시나 복선 없이 관객의 뒷통수를 치는 급반전이나 무리하게 사용되는 플래시백, 그리고 시각효과에서 우위를 점하는 애니메이션 임에도 불구하고 스토리 진행을 등장인물의 대사에 너무 많이 의존하는 면등은 시나리오 구성면에서 분명 치명적인 결점이다. 실사영화의 테크닉을 그대로 답습하는 연출방식은 사실주의적 잣대로 보았을 때는 메리트일지 몰라도 애니메이션 특유의 상상력을 기대했던 관객들에게는 분명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 분명하다. 개인적으로도 꼭 이 영화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야 했을 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국가와 집단의 폭력이 미시적인 개개인의 삶을 어떻게 파탄으로 이끄는 지에 대해 이 영화 만큼 직접적으로 문제재기를 하는 영화가 있었는 가하는 물음을 던지는 것 만으로도 이 영화의 가치는 분명히 인정 받으리라고 확신한다. 같은 선상에서 비교는 어렵겠지만 '공동경비구역 JSA'가 궁극적으로 도달하려는 지점도 바로 이 지점이 아니었을까? 비록 역사적 특수성이나 민족애와 같은 가외요인 때문에 훨씬 큰 반향을 일으켰던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폭력에 억눌려 변질 되어가는 인간성을 회복하자는 메시지가 아닐까.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계기로 우리의 왜곡된 근현대사를 뼈아프게 자성할 수 있었고 일본 또한 그러한 시대사의 예외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기에 흥미로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