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페드로 알모도바르/출연 자비에르 카마라, 다리오 그랜디네티, 로자리오 플로레스
why did fail?
집착도 사랑이냐?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도 문제였지만, 이 영화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외쳤다. 일방적 '보살핌'을 숭고한 사랑으로 신비화하다니, 도대체 말이 된단 말인가. 다소 느끼하게(?) 생긴 베니그노가 발레를 전공하는 알리샤를 매일같이 훔쳐보던 것도 말이 좋아야 수줍은 남자지, 나쁘게 말하면 스토커다. 접근 불가능하던 예쁘고 신비한 그녀가 식물인간이 된 것이 그에겐 오히려 호재였을 것. 전담 간호사이니 합법적으로 매일 그녀를 씻기고 주무르고, 무성 영화 얘기 등을 들려주며(이건 좋은 건가?) 지극정성을 쏟는 베니그노. 야근도 도맡아 하며 밤낮으로 그녀를 보살피는 것을 보면 이런 사람도 없다 싶지만, 어디 사랑이 그렇게 단순한 것이던가. 상대방의 복잡다단한 내면을 모르는 상황에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순전히 '껍데기'만 좋아하는 거다. 게다가 투박하게 표현하면 '강간'해서 임신시켰는데 그녀와 결혼하겠단다.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혼자만의 흉포한 망상'을 '숭고한 사랑'이라고 우긴다고 생각했던지 관객들은 이 영화를 금방 아웃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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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뭘 모르는 말씀, <그녀에게>를 연출한 스페인의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어떤 사람이던가. 멜로 드라마의 틀 안에서 인간의 육체성, 욕망, 사랑과 성, 사회적 편견 등의 만만찮은 주제들을 편안하면서도 탐미적으로 풀어나가는 사람이 아니던가. 삶과 죽음 사이에 걸쳐진 알리샤.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귀찮아하는 이런 식물인간에 대해서 <그녀에게>는 특별한 방식으로 주목하고 있는 영화다. 바로 식물인간의 살아 있는 몸을 매개로, 사랑의 '육체성'을 표현하는 것.
그러니 베니그노를 이상한 사람으로 본다는 건 말이 안돼! 이렇게 <그녀에게>를 열렬히 지지하던 사람들은 마지막 장면에서 눈물을 펑펑 쏟았다. 알리샤가 베니그노가 들려줬던 <카페 뮐러>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너무나 감동적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베니그노를 연기한 하비에라 카마라는 이 비극적인 멜로 드라마를 훌륭하게 살려주는 슬픈 연인이었다.
영화 중간에 나오는 흑백무성영화 <애인이 줄었어요>도 빼놓을 수 없는 장면이다. 알모도바르가 직접 만든 이 7분 분량의 영화는, 손가락만한 크기로 줄어든 남자 주인공이 애완용 인형처럼 애인의 몸을 더듬다가 드디어 여인의 몸 안으로 들어가버리는 내용. 자궁 속으로의 퇴행이라는 남성 콤플렉스를 시각화한 이 장면은 알모도바르의 영화가 아니면 '절대' 감상할 수 없는 기막힌 유머다.
감독 민병천/출연 유지태, 서린, 이재은, 윤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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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얼은 뛰어나지만 이야기는 빈약하다.' 영화가 개봉되기 전부터 요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큰 소리로 떠들어댔던 이 천편일률적인 비판 때문일까. 제작 기간 5년, 순 제작비 75억원에 달했던 이 SF 영화는 텅빈 객석의 쓸쓸함을 견디지 못하고 홀연히 자취를 감추어야 했다. 도대체 R과 리아는 어떻게 만난 거야, R은 왜 저렇게 리아를 사랑하는 거야 등등 불만에 퉁퉁 부은 입술들로 포위당하더니 말이다. '로맨스'에 전후 설명은 필수. 그러나 이 영화엔 누군가의 지적처럼 열렬히 사랑하는 데 도대체 공감하기가 힘들다는 것. 리아가 스토리를 촉발시키는 요인인데도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뛰어나다고 평가받았던 비주얼에도 도사리고 있었다. 스토리도 비슷한데 군데군데 장면들은 아예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와 똑같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가, '옥의 티'도 가리는 마당에 설사 '오마주'라고 하더라도 용서할 수 없는 게 남의 것 베끼는 것 아닌가. 결국 이 영화는 무수한 영화 관계자들의 비아냥을 받더니, 관객들에게도 내침을 받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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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무슨 상관이야' 족이 발생했다. 그들은 먼저, 한국 블록버스터라고 하면 '액션이나 CG는 발전했지만 이야기는 약하다'고 평가하는 안일한 기자나 평론가들이 마구 짜증났다. 그러고는 <내츄럴 시티>의 앵글과 미장센에 홀딱 반해버렸으니, R과 리아가 물 위에 떠 있고 그 위로 무요가가 지나가는 장면, R이 자신의 집에서 창 밖으로 도시의 전경을 바라보는 장면, 빗속에서 R이 리아의 홀로그램을 외투로 덮어주는 장면 등 멋지고 환상적인 장면들이 얼마나 많으냐 말이다. 어르신들은 '뮤직비디오처럼 흘러가는 분위기'라고 비판하는 부분이 그들에겐 오히려 더 매력적이었다.
이 영화는 어느 평론가의 지적처럼 뮤직비디오의 스타일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 아니라 뮤직비디오에서 느껴지는 정서적 고조감을 지니고 있는 영화다. 이런 저런 허점도 많았지만 아무런 대사 없이도 묘한 아우라가 있다는 말씀. SF 영화에 대한 아무런 기반이 없는 우리나라에서 이만큼 할 수 있으면 나오라고 그래! 지지자들의 이런 박력있는 외침처럼 이 영화는 꽤 괜찮고 슬픈 영화다. 더구나 <박하사탕>, <오아시스> 등의 음악을 맡았던 이재진의 서정성 가득한 OST는 빼놓을 수 없는 멋거리다.
감독/ 타키타 요지로/ 출연 노무라 만사이, 이토 히데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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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선 <음양사 2>가 개봉되는 마당에 뒤늦게 한국 땅을 밟았던 영화 <음양사>. 총 제작비 10억엔, 흥행수익 30억엔을 거두었다는 이 영화는 불행히도 한국에선 '쪽팔리는' 결과를 맞았다. 적잖은 사람들이 얼마나 기대했던 작품이던가. 다른 건 몰라도 유메마쿠라 바쿠의 원작 소설을 오카노 레이코가 그림으로 옮긴 <음양사>는 만화 매니아들에겐 최고의 작품이니 말이다. 고아한 동양미와 일본의 신비주의, '요괴퇴치'라는 소재를 정적이면서도 명상적으로 녹여낸 소설과 만화를 봤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 영화의 개봉을 손꼽아 기다렸을 것. 하지만 뚜껑을 열고 보니 이게 웬일인가. 원작 소설을 가지고 생략에 생략을 거듭한 결과 지극히 단순해진 이 영화는 다른 것도 문제지만 특히 조잡한 특수효과로 사람들의 폭소(?)를 자아내고야 말았다. 곳곳에 출몰하는 저주받은 혼령들을 퇴치하는 장면, 아베노 세이메이 세력과 요괴 군단과의 대규모 전투씬 등은 10억엔이라는 막대한 제작비를 쏟아부었다는데, 당최 우리 눈엔 <우뢰매>였으니, 휘리릭 금방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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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안 보면 후회할 걸'이라며 힘주어 내지르는 목소리들도 있다. 바로 아베노 세이메이 역을 맡은 '노무라 만사이'에게 포옥 빠져버린 사람들. 그들이 침을 튀겨가며 열광해 마지 않는 노무라 만사이는 일본 전통 예술극인 광언(狂言)계의 스타다. 그가 출연한다는 것만으로도 일본 언론들이 일제히 흥행 대박을 점쳤을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그는 꽃미남은 아니지만 무척 독특한 분위기의 외모를 지녔다. 그가 자신의 영화 데뷔작인 <음양사>에서 광언으로 가꿔진 동작, 발성을 이용해 기품 있는 연기와 수려한 액션(아크로바틱 액션) 장면을 펼치니 영화의 조잡합마저 어느 순간 눈 녹듯이 용서가 된다. 엔딩 크레딧이 오르는 동안 그가 펼치는 멋들어진 안무(?)를 보시라. 오늘부터 당신은 노무라 만사이의 팬이다!
감독 볼프강 베커/출연 다니엘 브뤼흘, 카트린 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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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말 홀연히 개봉됐다 전국 관객 만 명도 채 들지 않은 채 쥐도 새도 모르게 자취를 감추었던 이 영화. 독일에선 625만 명이라는 경이적인 흥행기록을 세우고, 올해 독일 영화계에 파란 불을 켜 준 기특쟁이요, 2003년 베를린영화제에서 최우수 유럽영화상을 수상하고, 독일영화제에선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음악상 등 무려 9개 부분을 휩쓴 저력을 가진 영화. 더욱이 프랑스와 영국에서도 박스오피스 상위권에 오래도록 머물렀던 영화였건만, 도대체 왜 우리나라에선 그리도 비참한 흥행기록을 가지게 됐을까.
그건 이 영화가 순전히 '독일산'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아주 가끔씩 극장에서 독일영화가 개봉될 때면 어쩐지 매우 관념적이고 지루하며 어려울 거라고 생각되는 이상한 선입견이 발생한다. 그런데 이 영화는 제목부터가 모종의 정치적 색채를 띠고 있는 것. 안 봐도 지루하다고 생각되는 독특한 최면을 건 이 영화의 제목으로 인해 볼프강 베커 감독의 <굿바이 레닌>은 관객들에게 냉큼 굿바이 당해버렸다. 그러나 <파니 핑크>, <롤라런> 같은 멋지고 재밌는 영화들도 '독일산'이었다는 걸 기억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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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 <인생은 아름다워>를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만한 영화다. 어머니를 위해 동독의 몰락을 감추려고 새빨간(?) 거짓말을 하는 '알렉스'의 모습은 어린 아들에게 홀로코스트의 공포를 심어주지 않기 위해 장난스런 거짓말을 꾸미는 로베르토 베니니와 왠지 유사하다. 인간의 이상이 현실의 정치와 체제에서 어떻게 사그라드는지를 따뜻한 감성으로 담아낸 썩 괜찮은 영화.
<아멜리에> O.S.T를 담당했던 얀 티에르센이 들려주는 미니멀리스트적인 음악도 매력적이다. <굿바이 레닌>은 독일에서 동쪽을 뜻하는 '오스트(Ost)'와 향수의 '노스탤지어(Nostalgia)'가 결합된 '오스탤지어'(Ostalgia)라는 신조어를 낳았고, 이 영화 덕택에 동독산 오이피클과 초콜릿이 갑자기 인기를 얻는가 하면, 비웃음거리였던 동독산 트라반 승용차의 전시회가 개최되는 신드롬을 만들었다. 한번쯤 영화를 통해 그런 걸 구경해 보는 것도 재밌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