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퀴어 영화 10년의 역사를 돌아보는 퀴어영화제, ‘파고다 극장의 유언’이 3월달 열렸다. 하리수의 사회적 생명이 살고 홍석천의 사회적 생명이 죽었듯이 대형 극장은 살고 파고다 극장은 죽었다. 죽었다고 하기 보다 타살되었다고 해야 옳다. 홍석천의 사회적 생명을 우리가 죽였듯이 말이다. 파고다 극장은 20년간 퀴어들의 우울한 욕망과 오욕의 역사를 간직한 게토였다. 실존과 욕망의 해방 공간인 파고다의 유언은 닫혀있는 다른 공간에서 스크린에 보여주었다. ‘그 어느 누구도 차별 받아서도 안되며 함부로 차별 하지도 마라.’
매년 전세계적으로 약 150개의 크고 작은 동성애 영화제가 열린다. 그 중
‘미국계 미국인과 한국계 한국인이란 이따위 차별은 집어치우자. 무엇이 중요한가. 초점은 바로 백인 우월 주의를 거부하는 것이며 지금이 바로 그때다.’ 조의 별명은 여왕벌이다. 바이올린 없이 처음으로 카네기홀에 선 한국인이며 박세리 보다 TV에 잘 나오고, 각종 동성애 영화제 때 무대를 폴짝폴짝 뛰어다닌다. 그녀는 멋진 페미니스트다.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고 차별 받는 이들을 온 몸으로 껴안아 주기 때문이다. 만약 홍석천에게 평범한 게이 애인이 아닌 마가렛 조 같은 친구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퀴어영화제에서 방방 뛰며 날라다니는 연예인들은 왜 없었을까 아쉽다.
동성애 영화제는 이 팍팍한 호모포비아 세상 속에서 오직 살아갈 에너지인 자신의 정체성을 붙들고 그 뿌리가 생체로 뽑히지 않기 위해 발악하는 욕망들의 한 판 축제이다. 장구한 역사를 거슬러 흘러오는 지배적인 성의 정치적 도덕적 관습과 싸우는 이들의 신나는 몸짓이기도 하다. 불행한 건 서글픈 존재의 욕망조차 팔려지는 매체의 상품으로 전락된다는 사실이다.
나는 내 몸을 내 맘대로 할 권리가 있다
백 수십 개의 영화제 중 올 6월 가장 오래된 역사와 덩치가 큰 27회
그녀가 찍은 <선물>은 게이 커뮤니티와 일반 사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버그 체이서(bug chaser : HIV를 쫒는 사람)>를 다룬다. ‘선물’이란 에이즈 균을 말하는데, 명석하고 젊은 청년 도우그는 버그 체이서가 되어 중서부에서 샌프란시스코로 ‘묻지마.말하지마’ 파티 모임에 가게 되면서 그의 인생은 특별하게 된다. 배어백킹(barebacking : HIV 감염위험을 무시하고 의도적으로 콘돔 사용 없이 추구하는 섹스 행위)후 에이즈 보균자가 되면서 그가 느끼는 깊은 슬픔과 분노, 아픔 등을 심리적 사회적인 면에서 생생하게 보여준다.
심리 치료사 왈트 오데 박사는 에이즈 균이 에로틱하게 받아들여지는 현실에 대해 미국인 4명이 매 시간당 에이즈 보균자가 되며 이 들 중 소수는 스스로 원해서라고 말한다. 잡지 롤링스톤즈는 <버그 체이서>를 선정적으로 취재함으로써 비난을 받았지만 어째서 누구나 공포스러워하는 HIV감염자가 스스로 되고 싶어하는지 이해하기는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 지도 모른다. 뉴욕 타임즈에서 TV 배우 하베이 페어스테인은 미국의 일부 젊은이들에게 버그 체이서가 되는 것은 성인식처럼 쿨하고 기묘한 부정적인 성인의 세계로 들어가는 통과 의례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이것은 그 동안 제약 회사의 빗나간 상술과 콘돔을 끼면 에이즈가 예방된다는 에이즈 예방 정책의 실패로 지적한다.
엄청난 빌리언 달러를 벌고 있는 제약 회사의 광고 속에 감염자나 보균자 모델은 섹시하고 건강하며 특별한 광고 이미지를 팔아댄다. 또한 양성애자는 성적 취향의 다양성을 인정받는 것이 아닌 매체가 선호하는 상품의 재료로 전략했다. <선물>은 기존의 게이 영화처럼 에이즈 공포증으로 인해 절대 섹스를 하지 않겠다는 게이 코미디 로맨스인 <제프리>가 아니다. 균과 싸워대는 <필라델피아>의 톰 행크스도 아니며 수혈로 보균자가 되어버린 <굿바이 마이 프렌드>의 소년도 아니며 호모포비아 세상이 길러낸 몸에 대한 정당한 권리 행사조차 누릴 수 없는 일그러진 욕망을 가진 한 인간을 보여준다.
<선물>은 <델마와 루이스>나 <쥴 앤 짐>에서의 신나게 악셀레이터를 밟고 낭떠러지로 자살해 버리고 마는 영화 속의 이들처럼 배어백킹으로 생을 접고 마는 이들을 영화가 아닌 현실 속의 다큐멘터리로 보여준다. 그 지점에 우리는 서 있는 것이다.
그 때로부터 반 세기가 흘렀다. 잉마르 베르히만의 <페르소나(Persona)>, 피에르 피올로 파졸리니의 <테오라마(Teoreoma)>, 루이스 브뉘엘의 <세브린느(Belle de Jour)>, 끌로드 샤브롤의 <암사슴들(Les Biches)>, 루치노 비스콘티의 <베니스에서의 죽음(Morte a Venezia)>, 제임스 아이보리의 <모리스(Maurice)>등 많은 작품들이 동성애를 다뤄왔다. 그럼에도 달라진 것은 남녀란 성의 이분법을 고착화 시키며 막다른 골목으로 양성애자를 내 몬다는 것이다. 보이 조지는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게이는 섹스를 하지 사랑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했다. 남자의 동성애를 뜻하는 게이(gay)란 말은13~14세기 프로방스 지역의 언어인 'gai'에서 비롯된 고어이다. 원 뜻은 '기쁨'이라고 한다. 그 기쁨이 기쁨인 날이 오길 바란다.
커밍아웃은 에미넴의 노래를 듣기보다 만 배 어렵다
같은 성끼리는 집에서 하는 애널 섹스도 오랄 섹스도 죄라고 규정한 텍사스 주의 소도미(Sodomy) 법이 1960년 후로 미 대법원에 의해 뒤집어진 건 올해 2003년 6월이다. 아직도 텍사스 주 외에 플로리다, 아이다호, 유타, 버지니아 등 13개의 주가 비슷한 소도미법을 적용한다. 여자가 여자를 사랑하고 남자가 남자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죄로 규정한다. 그리고 이들이 사랑할 때 우리는 재수없는 에이즈 보균자들이라고 손가락질한다. 그러니 커밍 아웃을 한다는 것은, 가족이 아닌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곳에서 벽장으로부터 나온 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요구된다.
할리우드 내에는 커밍 아웃을 한 감독들이 있다. 블랙 유머와 사회적인 풍자를
작년이었던가. 이송희일 감독은 매체에 아무런 인터뷰도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자신의 영화나 인권과 상관없이 매체가 달아준 게이 감독이란 주홍 글씨에 매우 고문당하는 듯이 보였다. 그는 영화 감독이지 게이 감독은 아니다. 게이 감독이란 용어도 없다.
게이가 뜻밖의 기쁨이었던 것처럼 레즈비언이란 말은 무려 2500년 전 여성을 사랑한 그리스 시인 사포(Sapho)의 시에서 유래된 말이다.
그럼에도 왜 엠마 톰슨이 결혼했을까. 그건 안젤리나 졸리가 양성애자이면서 어떻게 남편과 결혼하고 사냐는 질문과 같다. 디카프리오가 게이이고 비공식적인 커밍아웃한 적도 있지만 그는 공식적으로 커밍아웃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할리우드 배우들 사이에는 너무도 흔한 가십거리이고 이들은 다시 그 가십을 먹고 산다. 따지고 보면 아무리 공적인 연예인들이지만 ‘넌 남자니까 여자를 애인으로 둬야 해. 넌 여자니까 꼭 남자 애인을 둬야 해’ 그렇게 요구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기나 한가. 마치 ‘넌 게이니까 사랑은 곤란하고 섹스만 해’라는 무식한 강요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