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도 슬슬 끝물. 아침저녁 나절이면 피부를 간지럽히는 선선한 바람이 반갑긴 하지만, 이대로 흘려보내기엔 아무래도 아쉽다. 늦게나마 본격적인 휴가철에 비해 부쩍 한산해진 바닷가에서 소금기 어린 바닷바람을 들이마셔 볼까, 그렇지 않으면 친구들과 시원하게 맥주 한 잔 들이키며(여기서 “미성년자는 콜라”라는 훈육 멘트를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는 교육적인 무비스트였다) 흘러가는 여름에 아듀를 고할까. 독서의 계절이라고 서점에 진열된 책무더기에도 갑작스레 눈길이 간다.
그리고 이쯤 해서 소싯적 정치경제 교과서에 등장해 우리의 머리를 심히 아프게 했던 단어 하나가 떠오른다. 기회비용. 이것저것 끌리는 일이야 많지만 알뜰살뜰한 우리, 늘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지향하지 않을 수 없다. 말만 꺼내지 말고 대안도 제시하라고? 물론 그런 심려는 붙들어 매두셔도 좋겠다. 이 여름과 그냥 아듀하기 서운한 영화팬들을 위해 광주국제영화제(GIFF 2003)라는 풍성한 축제가 기다리고 있으니.
GIFF 2003은 “시네필(영화 마니아), 부활을 외쳐라!”라는 슬로건 아래 22일 야심차게 포문을 연다. 올해로 3회 째를 맞는 새내기인터라 부산이나 부천에 비해 인지도는 떨어지지만, 내용 알차기로 영화팬들 사이에 이름 높은 영화제. 올해는 8월 22일부터 31일까지 광주극장, 씨네시티, 엔터시네마를 비롯한 광주내 각 상영관에서 개최된다. 정부의 지원으로 예산이 두 배 이상 늘어난 데다 상영작도 100여 편으로 예년에 비해 크게 늘어 한층 풍성해졌다는 후문.
촉박한 일정과 예산문제로 송X교 찜쪄 먹을 캠페인걸은 미처 고용하지 못했지만 재미와 뿌듯한 즐거움 아울러 안겨줄 최고의 선택 GIFF, 무비스트가 강력추천! 노다지 찾아 빛고을로 훌훌 떠날 시네필들을 위해 여기 보물지도도 한 장 선사한다. 이름하야 차표 한 장과 더불어 손에 쥐고 갈 GIFF 핵심가이드. 각 섹션 대표주자들만 추리고 추려 엄선했다.
▶개, 폐막작
<봄여름가을겨울그리고봄>(개막작) 감독: 김기덕/한국/106분
<그날>(폐막작) 감독: 라울 루이즈/프랑스/105분
영화제의 엔딩을 장식할 폐막작 <그날>은 지난 전주영화제 때 다큐로 잠깐 우리와 만난 적 있는, 하지만 여전히 낯선 칠레 출신 라울 루이즈 감독의 작품으로 2003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바 있던 기이한 코미디물이다. 보통 사람들의 시선으론 당최 이해가 되지 않는 구석이 부지기수인, 타로와 점성술을 보면서 하루를 때우는, 리비아를 축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영화는 주최측의 말을 빌리자면 “연극적 형식이 포함된 초현실의 코미디”쯤으로 분류될 수 있다. 어쨌든, <안달루시아의 개>와 <욕망의 모호한 대상>으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초현실주의의 거장 루이스 부뉘엘의 스타일의 계보를 잇는 감독의 작품이니만큼 기대해도 좋을 듯싶다.(서대원)
▶ 월드 시네마 베스트<팜므 파탈> 감독: 브라이언 드 팔마/미국/110분
그 중에서도 특히 히치콕으로부터 절대적 영향을 받았음을 주저 없이 작품으로 시인한 <캐리>, <미션 임파서블>, <스네이크 아이즈>의 브라이언 드 팔마의 최신작 <팜므 파탈>은 우리가 애타게 기다려온 영화다. 제목에서도 느낄 수 있듯 <팜므 파탈>은 필름 누아르의 분위기를 예의 그만의 히치콕 스타일 안에서 능수능란하게 펼친 영화로 데이비드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많이 겹치며 연상되는 작품이다. 1천만달러의 다이아몬드를 빼돌리다 동료들로부터 쫓기는 처지가 된 한 여인이 자신과 똑같이 생긴 존재를 대면하기 시작하면서 기기묘묘한 미궁의 사건으로 빨려 들어간다는 영화는 안토니오 반데라스와 <엑스맨>시리즈의 레베카 로미즌 스테이모스가 등장해 더더욱 흥미를 더한다. (서대원)
▶영 시네마<빅터 바르가스> 감독:피터 솔렛 /미국,프랑스/88분
특히, 기존의 방식을 벗어나 자신만의 독창성과 작가성을 지켜낸 가운데 완성된 영화들을 망라함으로써 현재 각국에서 벌어지는 독립적인 영화 만들기의 또 하나의 경향을 보여준다. 뉴욕 맨하튼의 이스트 사이드를 배경으로 한 피터 솔렛 감독의 <빅터 바르가스>는 미국 인디펜던트 영화이면서도 프랑스의 까날 플러스와 공동 제작된 독특한 제작 배경을 갖고 있다. 작년 깐느국제영화제의 주목할만한 시선 폐막작으로도 선정된 바 있으며 피터 솔렛 감독이 1999년에 만들어 동 영화제 씨네 파운데이션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던 < Five Feet High and Rising >에서 12살의 성장기를 연기했던 소년 소녀 배우들이 3년이 지나 <빅터 바르가스>에도 그대로 출연, 성장 영화가 담고 있는 미묘한 느낌을 잘 전달한다. 또, 스포츠 소재의 발랄한 청춘 영화 <아이키>를 들고 직접 광주를 찾는 거장 이마무라 쇼헤이의 아들 덴간 다이스케 감독과의 대화에 참여해 보는 것도 시네필의 재충전에 도움이 될 듯. (구인영)
▶논픽션 시네마<로스트 인 라만차> 감독: 케이스 풀톤, 루이스 페페/ 미국,스페인/93분
그리고 <로스트 인 라만차>의 경우, 테리 길리엄의 야심작 <돈키호테>를 촬영하는 카메라가 돌아가는 시점부터 시작, 한 편의 영화가 무너지는 과정까지를 제프 브리지스의 나레이션으로 볼 수 있는 보기 드문 '언메이킹' 필름으로, 영화의 제작 과정에 대한 가감없는 논픽션을 제공한다. 올해 깐느영화제에서 상영되었던 제임스 카메론의 다큐멘터리 <심연의 유령(Ghosts of the Abyss)>과 같은 작품과 더불어 그동안 신화화되었던 영화 만들기 자체를 탈신비화하는 의미도 발견할 수 있을 것. (구인영)
▶조앙 세자르 몬테이로, 모리스 피알라 추도상영
<신의 코미디> 감독: 조앙 세자르 몬테이로/포르투갈, 프랑스/163분
이 섹션에서 특별히 놓쳐서는 안될 작품으로 조앙 세자르 몬테이로의 <신의 코미디>를 꼽지 않을 수 없다. 베니스 영화제 은사자상을 수상했던 <노란 집의 추억>에 이어 사회와 타협하지 못하는 인물 조앙 데 데우스를 다시 등장시킨 몬테이로의 95년 작. 관객에게 말을 거는 감독의 화법은 낯설지만 매혹적이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일하는 조앙은 끊임없이 여성들에게 찝적대고, 그 때문에 여자들 중 한 명의 아버지는 복수를 위해 칼을 들고 그를 찾아오기까지 한다. 독특하고 지적인 섹스코미디라는 평가를 받은 이 영화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이 해 최고의 걸작’이라는 칭호를 붙이기 주저하지 않았다. (임지은)
▶일본 액션영화
<살인의 낙인> 감독: 스즈키 세이준/일본/93분
특히 폭력의 미학으로 통하는 스즈키 세이준의 대표작 중 한 편인 <살인의 낙인>은 필견을 요하는 작품. “외국에서 돌아온 킬러가 넘버원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라이벌을 차례로 죽여나간다”는 줄거리로, 플롯 자체는 단순하지만 파격적인 스타일 때문에 대번에 최고의 문제작이자 하드보일드의 진수로 자리매김 했다. <살인의 낙인>에 얽힌 유명한 일화 하나. 이 “영문도 모를 영화”를 보고 화가 난 닛카츠 사장은 스즈키 세이준을 해고한다. 분노한 팬들은 자발적으로 ‘스즈키 세이준 공동대책위원회’를 결성해 이에 맞섰고 분쟁은 결국 재판으로 이어졌다. 승소하긴 했지만 결국 영화계에서 추방되다시피 한 감독은 향후 10년 간 영화를 만들 수 없었다. 한편 이 작품은 짐 자무쉬, 쿠엔틴 타란티노, 왕가위를 비롯한 걸출한 후대 감독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쳐, 특히 짐 자무쉬는 <살인의 낙인>을 토대로 그의 영화 <고스트 독>을 만들기도 했다. <고스트 독>에서 배수관으로 마피아를 살해하는 장면과 <살인의 낙인>의 살인 장면을 직접 비교해가며 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 (임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