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의 ‘찰리의 진실’이 아닌 이 ‘영화의 진실’이 무엇인지 궁금한 당신을 위해 일단, 고백부터 한 가지. 달리 말하면 <찰리의 진실>을 보기 전에 염두해야 될 점, 혹은 우리가 오해하는 것들. 요컨대, 우리가 별다른 필터링 과정 없이 바로 연상해내는 ‘조나단 데미 감독=<양들의 침묵>’이라는 무거운 인상의 항등식, 가급적이면 지워낼 것. 기존의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사에서 제작한 로맨틱 스릴러물 또는 강탈영화의 장르적 컨벤션, 기대하지 말 것. 박중훈이 분한 캐릭터의 성격과 비중도를 함부로 재단하지 말 것.
조나단 데미 감독의 <양들의 침묵>은 영화 역사상 가장 지적인 범죄자 렉터박사를 창조해낸 역작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뜻하지 않게 그의 전작들에 대한 평가는커녕 어떤 영화가 있었는지조차 <양들의 침묵>의 떳떳한 위세와 무게감에 짓눌려 접할 수가 없었다. 알고 보면 그는, 음악에 대한 다큐, 로맨틱 코미디, 민감한 사회문제를 끌어안은 작품, B급 스타일의 영화 등 특정한 장르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영화의 경계를 넘나든 감독이다. 그러므로 조나단 데미가 <찰리의 진실>과 같은 ‘형식’의 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영화의 낯선 형식이 어떻게 활용되었냐에 대한 미심쩍은 시선은 있을 수 있어도.
아시다시피, <찰리의 진실>은 오드리 햅번이 주인공으로 나오고 스탠리 도넌이 연출한 63년도 작 <샤레이드>를 리메이크 한 작품이다. 하지만 영화는 원작과 다소 동떨어져 있을 뿐만이 아니라 이 보물찾기 놀이의 과정을 낯익은 형식대신 낯설은 방법으로 보여준다. 상당히 다층적으로 영화를 자유롭게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왕가위의 <중경삼림>, 이명세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 그 외 수많은 누벨바그 시대의 필름에 오마쥬를 바치는 스타일의 영화라고 감독은 <찰리의 진실>을 말하고 있다. 이외에도 가이 리치의 일련의 강탈영화도 겹쳐진다. 작품 속의 다국적인 배경이나 인종들도 생경한 느낌을 자아내는 데 한 몫 거들고 있고. 결정적으로 <찰리의 진실>이,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는 표현방식에 있어, 개운치 않게 와 닿는 주요한 요인은 일본인 후지모토 탁의 카메라 움직임과 위의 영화들에 기반한 감독의 편집방식 때문이다.
<양들의 침묵>은 물론 <싸인>, <식스 센스>에서도 촬영을 맡았던 그는, 전과는 달리 이번 작품에서는 다양하고 현란한 카메라 워킹을 선보이고 있다. 시종일관 귀가 휘파람을 불 정도로 흥겨운 노래에 카메라 역시 끊임없이 덩실거린다. 동시에 카메라는 맥아리 없고 순진한 내러티브로 보이기 싫어서인지 삐딱하게 인물들을 바라보기도 하고, 의외의 순간에 저속촬영을 사용하며 과장된 클로즈업을 잊을 만하면 시도하곤 한다. 따라서 후지모토 탁이 전작들에선 콘트라베이스와 같은 나지막하고 육중한 울림으로 카메라를 연주했다면, <찰리의 진실>에서는 경쾌하고 즉흥적인 라이트 재즈와 같은 기타 연주를 시연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카메라 기법이 조나단 데미의 시공간을 비약적으로 점프하는 컷, 그리고 과감한 불연속적 편집스타일과 협연을 이룬다. 그럼으로써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극단적으로 갈리는 평가를 내릴 가능성이 농후하다. 산만하게 또는 신선하게. 이도 저도 아니면 두 느낌이 화학작용을 일으켜 또 다른 무언가가 도출될 수도 있을 것이고.
원작 <샤레이드>는 이야기보다 뉴튼이 분한 오드리 햅번과 월버그가 분한 캐리 그랜트의 캐릭터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던 클래식이다. 특히, 영화 속에서의 오드리 햅번은 <샤레이드>의 모든 결함을 무마시킬 수 있을 정도로 레지나의 고혹적 아름다움을 마음껏 발산시켰다. 이에 비한다면 <찰리의 진실>은 내러티브와 그것을 노출시키는 스타일에 대하여 더 많은 고민을 한 듯하다. 캐릭터에 있어서는 오드리 햅번이 그랬듯 탠드 뉴튼이 훌룡하게 배역을 소화해냈다. 안타깝게도 월버그는 입체적인 인물묘사를 해야 함에도 평면적인 연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미국의 저명한 영화 평론가인 로저 에버트 역시 레지나 역에 오드리 햅번만한 배우도 없었지만, 탠드 뉴튼을 대신 할 만한 연기자도 없다고 호평을 했다.
사실, <찰리의 진실>이 우리에게 매력적으로 다가 설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두말 할 것 없이 박중훈 때문이다. 그간 할리우드는 유색인종인 동양배우을 활용하는 데 있어 전반적으로 액세서리 이상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특수 첩보원 이일상으로 분하여 나오는 박중훈의 캐릭터는 패배주의적인 관점일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의미있는 역할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역시 조연급 이일상 역을 무리 없이 보여주고 있고, 반전을 효율적으로 이끌어내는 데에도 긴요한 인물로 자리매김돼 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와 박중훈의 팬이라고 조나단 데미 스스로가 말했듯, 영화 속에서는 권용운과 박중훈의 추격씬, 그리고 억수 같이 쏟아지는 비 속에서의 엔딩 결투 신이 조금 비틀어져 재현되고 있다.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인상적인 장면(특히 우리에게는)으로는 엔딩과 엔딩 크레딧부분. 박중훈 특유의 넉살 좋고, 보는 이가 절로 기분 좋아지는 그만의 큼직한 미소가 양껏 스크린에 투사돼 나온다.
<찰리의 진실>은 돈을 둘러싸고 발생하는 일들을 담은 영화이다. 그러기에 인간들의 추악스런 면면을 들추며 무겁고 진중하게 나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감독은 여러 장르를 뒤섞으며 역동적이고 발랄한 로맨틱 스릴러물로 목표점을 잡아 영화를 관장시켜 나갔다. 말하자면 <찰리의 진실>은 우리가 별다른 저항없이 내재화시킨 할리우드 영화의 틀 안에서 끊임없이 탈주를 감행하며 전에 경험하지 못한 이미지들의 묶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특성이 작품의 분위기를 혼란스럽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있어 장애물로 쓰여질 수 있다. 새로움에는 늘 산고가 뒤따라 오듯이 말이다. 허나, 영화적 완성도를 떠나 형식적 스타일의 낯설음이 그러한 시선에 절대적 힘을 실어주었다면 그건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문제이다.
우리 배우 박중훈이 나오는 할리우드 영화니 꼭 보러 가야겠다는 다짐, 분명 그릇된 생각은 아니다. 하지만 이왕이면, 획일화되고 구획화된 영화만을 주로 생산하는 할리우드에서 개런티 비싼 배우들과 일급감독을 초빙해 좀처럼 그들의 토양에서는 나올 수 없는, 새로운 움직임을 담은,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난 그 영화가 보고 싶다, 는 마음을 가지고 극장으로 향함이 더 그럴싸하지 않을까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