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으니 아니다 싶은 분들은 주저 말고 왔던 길로 나가 주시길...
영화 <하얀방>은 시작부터 기이하다. 기괴스러운 문자들이 굿판에 맞추어 춤을 추듯 초반 크레딧을 누비며 보는 이들의 시선을 잡아먹는다. 정원을 힘겹게 걸어 정문에 도착한 우리들은 이 영화의 문이 열리는 순간, 오프닝 크레딧에 이어 맞닥뜨리기 원치 않는 혼란스러운 광경을 다시금 목도하게 된다. 임신한 지 꽤 오래된 듯한 한 여인네를 무참히 짓밟는 한 남자의 발. 이 씬에서 당신은 히치콕의 사이코 욕실살인 장면을 떠 올리게 될 것이다. 그것 외에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란 싸늘한 느낌의 바닥과 벽, 그리고 볼 수는 없지만 보는 것 이상으로 예리하게 가슴팍에 파고드는 기구한 여인네의 아비규환적인 절규뿐이다.
<하얀방>은 이렇게 짐짓 자극적이고 묵직한 이미지들을 다급하게 늘어트려 놓은 후 숨을 돌리기 위해서인지, 우리에게 얘기를 건네며 말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영화가 풀어놓는 이야기들은 쉽사리 받아들이기 힘든 초현실적인 것들이다. 일본 영화 <링>을 떠올리면 한층 이해하기가 수월할 것이다. 다만, 비디오가 아니라 인터넷 사이트다, <하얀방>은.
시간이 흘러가도 영화의 미스터리한 부분의 무게는 줄어들기는커녕 가일층 더해간다, 하지만 영화는 중반부를 넘어오면서 갑작스럽게 노선을 변경함으로써 그 공포의 근원을 수면위로 노출시킨다. 그럼으로써 <하얀방>은 스스로 영화적 긴장감을 유발시키기 위해 끌어들여와 도구로 쓴 ‘인터넷 사이트’에 관한 부분은 속임수(맥거핀)에 불과한 기제라고 고백하게 된다.
<하얀방>은 언 듯 보기에 <텔미 섬씽>, <피어닷컴>, <폰>과 유사해 보인다. 아니, 유사하다. 하지만 공포영화라는 장르의 한계상 이런 측면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관심 있게 봐야 될 것은 영화가, 자신의 주제와 소재를 어떤 식으로 전달하고, 그 방식이 얼마만큼이나 오싹하고 흡인력 있게 목표지점까지 달려 오냐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얀방>은 분명, 패기 있게 출발은 했으나, 중간 지점을 넘어서는 숨이 차서 그런지 숨을 고르는 순간들이 군데군데 눈에 띄어 다소간 맥이 빠진다. 이 지점에서 위의 세 개의 공포영화보다 더욱 확실하게 영화적 맥락이 서로 닿아있는 <링>과 비교해보는 수고스러움은, 영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최상의 방법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전언했듯 <링>과 <하얀방>은 비슷한 구석이 있다. 모성애를 유독 강조하는 면이나 공포의 매개물로 ‘비디오와 인터넷 사이트’라는 미디어를 택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이것들로 인해 여주인공들이 저주에 휘말려 일정한 시간을 두고 그 마수와 사투를 벌인다는 점도 그렇다. 하지만 이 두 영화가 극명하게 갈리는 점이 있다. <링>은 비디오를 통해 한 여자의 억울한 한을 섬뜩하게 그려냄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비디오라는 매체를 상징으로 현대인들이 얼마나 미디어에 전염 중독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도 분명 짚고 넘어가고 있고, 인간의 보려는 욕구가 타인에게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함의도 있다. 하지만 <하얀방>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인터넷 사이트가 아니다. 임창재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은 ‘낙태’이다. 크게는 낙태를 사회적 이슈로 만들고 배태해낸 불균형적인 사회구조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 점은 그의 전작 단편 <눈물>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고, <하얀방> 또한 후반부로 치달을수록 이러한 사실을 명확하게 부각시킨다. 그러기에 영화는 다른 공포영화들과는 달리 일순간을 휘어잡는 오싹함은 상당히 절제되어 있는 편이고, 이기적인 사회구조를 고발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다소 격하게 느껴질 정도로 교육적이며 노골적이다.
<하얀방>은 심령 호러라는 장르의 영화이자 ‘기획영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실험영화 쪽에서 적지 않은 기간 동안 적을 둔 임창재라는 감독의 의지와 사고가 상업영화라는 틀 안에서도 여실히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뚝심 있는 영화이다. 물론, 정준호는 워낙이 공사다망한 관계로 별반 주목 받을 만한 캐릭터로 분하여 연기를 펼치지 못했기에(이 점은 영화의 완성도를 까먹는 데 있어 지대한 역할을 했다.), 영화자체를 독보적으로 이끌고 나간 이은주의 영화라고도 볼 수 있다.
결국, <하얀방>은 윤종찬 감독의 <소름> 도입부를 빌려와 <링>의 방식으로 얘기를 풀어나가다, 후에는 감독 자신의 속내를, 조금은 도식적이지만, 진하게 토해낸 기이한 공포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