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름의 하고 많은 구덩이 중 하나로 남자가 숨어든다. 이내 한명, 또 한 명 비집고 들어오기를 반복한다. 옆 마을 사람들은 다 죽어갔다는 둥 마을이 통째로 불탔다는 둥 오가는 이야기는 무시무시한데 이상하게 웃음이 비집고 들어온다. 영화는 이런 식으로 죽음과 묘한 웃음을 공존시키면서 비감을 증폭시킨다. 제주도 사투리를 귀로 듣고 표준어 자막으로 의미를 확인하는 신기한 경험은 웃음과 서정을 동시에 유발한다. 영화는 진짜 사람들의 살 내음을 풍기면서 무겁게 접근하지 않는 유연함이 정서의 폭을 넓힌다. 일제 강점기와 징용을 모두 견뎌냈지만 또다시 피난길에 올라야 하는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동굴을 찾아 나선다. 전쟁의 위협에서도 살아남은 사람들이니 또 한 번의 피난길 또한 일상처럼 받아들여졌다. 당장 눈앞에 목도한 죽음보다는 내일을 말하는 이유다. 허리 펴고 앉기도 힘든 동굴 안에 모여 앉은 사람들은 생사보다는 집에 두고 온 돼지, 노모를 걱정한다. 걱정은 실랑이로 번지다 어느새 웃음으로 잦아들고 담소가 된다. 곧 닥쳐올 비극의 소용돌이를 모른 채 삶을 이야기하는 모습은 서글픔을 극대화시킨다.
교과서에 실리지 않은 탓에 스무 살이 넘어 마주한 실제 사건의 증언과 기록은 우리가 알지 못하던 홀로코스트였다. <지슬>은 충격과 공포를 재확인시키는 데 의무를 두지 않았다. 흔히 말하는 이데올로기나 프로파간다로서의 기폭제로 이해하는 건 무용한 일이다. 이 끔찍한 역사의 기록을 두 눈으로 목도하고도 우리가 만나는 건 사건이 아닌 사람이다. 영화는 무고하게 죽어간 주민들만이 아니라 흔들리는 눈동자로 총구를 겨누는 군인들의 표정까지 포착한다. 이미 죽은 사람들을 반백년이 지나 다시 살려낸 이유는 여기에 있다. '신위(神位)', '신묘(神廟)', '음복(飮福)', '소지(燒紙)' 네 개의 소제목으로 감싸 안고 넋을 위한 제의를 치른다. 이 씻김굿에서 영혼을 달래는 음식은 지슬(감자의 제주 방언)이다. 지슬이 갖는 식물성은 모든 배고픈 사람들의 끼니가 되고 눈물이 된다. 노모는 혹시나 자신을 찾아올 아들을 위해 품속에 감자를 숨기며 죽어가고, 잡혀온 처녀에게 연민이 깃든 군인은 감자를 건네러 갔다 총을 맞는다. 피로 물든 동굴을 지나면 야속하게도 산등성이는 아름답기만 하다. 여인의 곡선처럼 그려지는 제주의 오름은 들끓는 분노 앞에서 무력하고도 처연하다.
피가 흘렀던 지난날의 이야기를 대중영화의 소재로 가져온 영화들은 많았다. <지슬>은 역사적 사건을 가져온 게 아니라 직접 그 속으로 들어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죽이고 죽어간 이들이 모두 피해자이자 위무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다. 지금 이 순간처럼 생생하게 들려오던 이야기가 결국은 위무를 위한 제사였다는 사실은 마지막 시퀀스 소지(燒紙)에서 확인된다. 생명이 날아간 모든 신체 위에 영혼을 모셔온 신위를 불태우면서 현재가 개입한다. 그래서 들끓기보다 벅차오르고 서글프다. 영화가 이토록 강렬하고 아름다운 고통을 줄 수 있었나. 끝내 위무하고 치유하고 울린다.
2013년 3월 22일 금요일 | 글_프리랜서 양현주(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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