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역할에 회의를 느낀 랄프는 모두에게 사랑받는 길은 스스로가 영웅이 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결국 ‘다고쳐 펠릭스’를 이탈, 카트레이싱 게임인 ‘슈가 러시’에 불시착하게 된다. 랄프의 이탈로 평화롭게 유지되던 게임 세상의 균형도 깨진다. 특히, 랄프가 사라지는 바람에 운행이 중단된 ‘다고쳐 펠릭스’는 폐기처분될 위기에 놓인다. 펠릭스와 동료들은 비로소 랄프의 중요성을 체감한다.
오락실 영업이 끝나자, 게임기 속 캐릭터들이 살아 움직인다? 어딘가 익숙한 풍경이다. 주인이 자리를 비우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던 장난감들. 맞다. <토이 스토리>를 오락실로 옮겨 놓으면 <주먹왕 랄프>와 비슷한 모양새가 된다. <토이 스토리> 속의 장난감들은 ‘주인이 자신과 더 이상 놀아주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다. <주먹왕 랄프>의 게임 캐릭터들도 처지는 비슷하다. ‘사람들이 자신의 게임에 동전을 투입하지 않으면 어쩌나’ 긴장하며 살아간다. 인간의 유희를 위해 존재하는 이들에게, 사람들의 관심은 목숨과도 같다. 슬픈 숙명이다.
<주먹왕 랄프>가 품고 있는 건 비단 <토이 스토리>뿐이 아니다.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악당이 진짜 영웅으로 성장한다는 점에서 드림웍스의 <메가마인드>가 읽힌다. 게임 캐릭터들이 멀티탭으로 연결된 전선을 따라 ‘게임 센트럴(캐릭터들이 퇴근 후 모이는 휴식처)’로 이동한다는 설정에선 <몬스터 주식회사>가 떠오른다. ‘무대 위의 악당’이라는 점에서 송강호의 <반칙왕>까지 가면 너무 멀리 간 걸까? 그러니까 <주먹왕 랄프>의 이야기 자체는 그리 신선한 게 아니란 말이다. 누가 디즈니 애니메이션 아니랄까봐, 교훈도 명징하다. 세상에 중요하지 않은 존재는 없다,가 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 되겠다.
그러나 한순간도 스크린에서 눈을 뗄 수 없다면, 그건 아기자기한 캐릭터들과 그 캐릭터들을 실감나게 형상화해낸 출중한 CG, 그리고 CG가 구현해낸 캐릭터들이 선사하는 과거의 향수 덕분이다. <주먹왕 랄프>에는 80년대에 유행했던 오락실 게임 캐릭터들이 대거 등장한다. 과거 오락실 게임의 대명사였던 ‘스트리트 파이터’ 속 켄과 춘리를 필두로 ‘백팩’의 클라이드, ‘소닉 어드벤처’의 소닉, ‘슈퍼 마리오’의 쿠파 등 추억의 게임 캐릭터들이 “응답하라 80년대!”를 외친다. 과거 오락실에서 좀 놀아봤다고 자부하는 어른이라면 동심의 세계로 돌아간 듯한 추억을 선물 받을 게 분명하다. 역시 대세는 복고다.
(덧붙이기)
1. <주먹왕 랄프>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52번째 작품이다. 하지만 드림웍스와 픽사의 향기가 진하게 느껴진다. 픽사의 최근작 <메리다와 마법의 숲>에서 드림웍스와 디즈니의 그림자가 느껴졌던 걸 생각하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확실한 건, 디즈니/픽사의 합병 이후 점점 기존 스튜디오가 지니고 있었던 고유의 개성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쉽다. 당신도 아쉽지 않은가?
2. 디즈니/픽사의 합병이 가져다 준 좋은 점이 있기는 하다. <주먹왕 랄프>가 시작되기 전, 2D 흑백애니메이션 <페이퍼맨>이 상영된다. 이건 픽사 스타일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주먹왕 랄프>보다 <패이퍼맨>에게 더 마음을 빼앗겼다. 페이퍼로 만든 종이비행기가 뉴욕 남녀의 사랑을 이어준다는 이야기. 아날로그풍의 핸드드로잉이 더해져 따뜻함이 배가된다. 본 영화를 압도하는 단편이라니!
2012년 12월 20일 목요일 | 글_정시우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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