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내 이름은 칸>의 이해를 돕기 위해 <포레스트 검프>를 소환하는 일은 그만둬도 좋을 성 싶다. 어떠한 목표를 위해, 사랑하는 이를 위해 한 남자가 미국을 횡단한다는 외양을 제외한다면, 두 영화의 간극은 영화 속 두 주인공이 앓고 있는 아스퍼거 증후군(자폐증)과 지적장애 사이만큼이나 커 보인다. 그건 한 개인의 역사를 미국의 현대사에 능수능란하게 교차시켰던 <포레스트 검프>에 비해 <내 이름은 칸>은 주인공 칸(샤룩 칸)이 왜 그토록 대통령을 만나야했는지에 대한 정서적 울림은 물론 납득할만한 정치적 답변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도의 흥행배우 샤룩 칸이 연기한 칸은 비록 자폐증을 앓고 있지만 천재적인 지능의 소유자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평탄한 삶을 위해 “세상엔 좋은 행동을 하는 좋은 사람과 나쁜 행동을 하는 나쁜 사람이 있을 뿐, 차이점은 없다”고 가르친다. 어머니가 죽고, 동생이 살고 있는 미국으로 건너 간 칸은 헤어디자이너 만디라(까졸)에게 한 눈에 반하고 결국 결혼에 골인한다. 그러나 인종차별이 엄연한 ‘9.11 테러’ 이후 미국사회는 그녀의 아들과 함께 단란한 가정을 꾸려가던 칸을 가만 두지 않는다. 그래서 칸은 미국의 대통령을 만나고자 대륙을 횡단하고자 한다.
발리우드식 로맨스 영화여도 좋을 법했다. 아니, 칸의 어린시절을 거쳐 만디라와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기까지를 그린 중반까지는 분명 경쾌한 인도풍 음악을 양념으로 버무린 달달한 로맨스와 칸의 사회적응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내 이름은 칸입니다. 난 테러리스트가 아니다”라며 미국 대통령을 찾아가는 오프닝부터, <내 이름은 칸>은 미국의 현 사회현실을 반영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다. 그리고 중반 이후, 인종차별적 시선에서 잉태된 아이의 죽음이 등장하는 순간, ‘포스트 9.11 시대’를 맞아 ‘다문화 사회에서 소수자, 약자로 살아가기’란 주제를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한다.
의아한 건, 호흡과 정서다. 중반까지의 분위기와 심각함과 휴머니티로 일관하는 후반부는 심각할 정도로 괴리돼 있다. 165분에 달하는 원 편집본이 궁금해지는 지점이다. 사실 전하려는 메시지도 어리둥절하다. 모슬렘들의 테러를 막고, 태풍에 휩쓸린 시골마을의 복구에 열심히 던 그가 아내를 위해 ‘흑인’ 백인 대통령을 만나려는 행위는 미국 시민으로서의 충성서약 같아 보일 지경이다. ‘9.11 시대’에 더없이 흉흉해진 시선을 받아야하는 이민자들에게, 특히 ‘착한’ 이슬람교도들에게 필요한 일종의 ‘인증’ 말이다. 그 만큼 캐릭터도, 사건들도 평면적이고 단선적이다. 그렇게 정치(精緻)하지 못한 방식으로 복잡다단한 사회와 정치를 기술하는 건 지루한 동어반복이기 십상이다. 안타깝지만, <내 이름은 칸>이 발리우드식 로맨스영화에서 멈춰섰다면 좋았을 이유다.
2011년 3월 22일 화요일 | 글_하성태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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