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티네>(1993) 당시만 하더라도 극중 야쿠자들은 함께 휴가를 즐기기도 하고 동료 조직원의 복수에 목숨을 거는 등 소위 ‘야쿠자의 도(道)’라고 할 만한 것들이 존재했다. 그런데 <아웃레이지>가 묘사하는 2000년 이후의 야쿠자들에게는 의리 따위 돈 앞에서는 개만도 못한 것으로 전락하며 위아래 할 것 없이 배신이 판을 친다. 또한 상납에 안주하던 시스템에서 벗어나 이제는 직접 카지노도 운영하고 조직 내부에 변호사를 거느리는 등 낭만파 야쿠자의 세계는 자기 이익에만 눈이 먼 ‘양아치’들에게 자리를 내준 지 오래다. 이렇게 야쿠자의 도가 파산 지경에 이르다보니 <아웃레이지>의 야쿠자 개인들은 하나 같이 무식하고 잔인하게 묘사될 따름이다.
야쿠자 소재와 거리를 둔 채 십년 넘게 방황을 거듭하던 다케시를 다시금 이 세계로 불러들인 것은 급변하는 야쿠자 상(像)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올해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서의 최초 공개 당시 격렬한 찬반 논란이 일었던 것 역시 이 때문이었다. ‘급변하는 야쿠자의 시대상을 담은 결과 vs 악취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잔인함‘으로 나뉜 논쟁이었는데 부산에서 영화를 본 후 개인적으로는 후자의 입장을 지지하는 쪽이다. 영화의 형식을 대변하는 잔인한 표현 방식에 불만은 없지만 문제는 그것이 뒤로 갈수록 어떻게 하면 더 잔인하게 보일까에 초점을 맞추는 까닭에 과잉으로 치닫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아웃레이지>에 대한 지지를 끝까지 망설이게 만드는 결정적인 이유다.
<그을린> 부산영화제 최고 영화
앞서 언급한 네 편의 영화가 화제작이었다면 지금 소개하는 드니 빌뇌브 감독의 <그을린>은 개인적으로 평가하는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의 최고 작품이다. 서울을 떠나기 전, 그리고 부산에서 만난 기자와 평론가 중 대다수가 다른 건 몰라도 <그을린>은 꼭 보라고 추천했을 정도다. 그래서 봤고, 안 봤으면 후회했을 만큼 훌륭한 영화였다. 캐나다 영화라고 소개가 됐지만 <그을린>은 더 정확하게는 퀘벡 영화다. 영어가 아니라 불어로 대화가 이뤄지고 여기에 아랍어가 중간 중간 끼어든다. 언어로 촉발된 혼돈은 종종 바벨탑 신화를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그을린>은 현대판 바벨탑 신화라고 할만하다. 언어가 아닌 지금 아랍(레바논 내전이라고 추정된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격한 종교 충돌 및 그에 따른 복수의 혼돈이 야기한 비극적 가족사가 펼쳐지는 까닭이다.
그런데 이 영화가 고발하는 전쟁의 참혹함은 전장을 배경으로 삼지 않는다. 메마른 아랍의 사막, 아니 혹독한 폭력이 휩쓸고 간 죽음의 대지에서 이 영화는 출발한다. 라디오 헤드의 ‘You And Whose Army?’(영국의 이라크 파병 이후 톰 요크가 토니 블레어를 비판하기 위해 만든 곡으로 유명하다.)가 흐르면서 전쟁 병기로 길러지는 아이들의 모습을 비추며 오프닝을 여는 <그을린>은, 그러니까 이 아이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어떻게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가, 를 추적해 들어가는 영화(로 보인)다. 안 그래도 오프닝이 끝나면 주인공 남매가 공증인을 통해 어머니의 유언이 담긴 편지를 전해 받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 편지를 보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한데 남매에게는 지금껏 비밀에 부쳐둔 아랍에 남겨진 또 하나의 아들을 찾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평생을 자식을 돌보는데 무관심했다고 생각한 아들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다. 반면 딸은 어머니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는 기회라며 이를 받아들인다.(언제나 남성들은 타인을 이해하기보다 적대감을 취한다.)
<그을린>에 ‘위대한’이라는 수사를 붙일 수 있다면, 주인공 남매의 어머니가 전쟁 와중에 잃어버린 아이를 찾기 위해 평생을 바치고 결국엔 화해의 전도사로서 역할을 다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대개의 전쟁영화들은 ‘고발’의 형태로 전쟁의 참상을 드러냄으로써 만족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을린>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지금 이 세상의 평화는 화해가 우선돼야 한다는 사실에 방점을 찍는다. 결국 아랍에 남겨둘 수밖에 없었던 아들과 캐나다 퀘벡의 남매가 조우하는 장면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인류는 종교, 인종, 나라 등 모든 것을 초월해 인간이라는 한 핏줄로 엮어있음을, 그래서 이제는 우리 서로 화해하고 사랑하자는 것을 절실하게 역설한다.(결국 극중 남매의 어머니가 남긴 편지는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 남긴 것에 다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가 캐나다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전쟁의 당사자가 아니면서 전쟁이 야기한 비극을 정면에서 다뤘다는 것, 그만큼 전쟁의 피해가 전 세계적으로 폭넓게 퍼지고 있음을 웅변한다. 그래서 <그을린>에 대해 ‘미래의 고전으로 자리 잡을 문제적 걸작’이라는 부산국제영화제의 표현은 그리 과장된 것이 아니다. 영화를 감독한 드니 빌뇌브는 (최소한 나에게는)앞으로 기억해야할 이름이다.
2010년 10월 26일 화요일 | 글_허남웅(영화 칼럼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