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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만난 영화들 (2)
부산국제영화제 | 2010년 10월 26일 화요일 | 허남웅 이메일

오랜만의 야쿠자 영화인만큼 <아웃레이지> 속 야쿠자들도 세대교체의 급물살을 탄다. 그런데 이곳이 조직 세계이기는 하나 도덕과 윤리, 그리고 법률의 손아귀에서는 멀찌감치 벗어나 있다 보니 정상적인 방식으로 세대교체가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소나티네>(1993) 당시만 하더라도 극중 야쿠자들은 함께 휴가를 즐기기도 하고 동료 조직원의 복수에 목숨을 거는 등 소위 ‘야쿠자의 도(道)’라고 할 만한 것들이 존재했다. 그런데 <아웃레이지>가 묘사하는 2000년 이후의 야쿠자들에게는 의리 따위 돈 앞에서는 개만도 못한 것으로 전락하며 위아래 할 것 없이 배신이 판을 친다. 또한 상납에 안주하던 시스템에서 벗어나 이제는 직접 카지노도 운영하고 조직 내부에 변호사를 거느리는 등 낭만파 야쿠자의 세계는 자기 이익에만 눈이 먼 ‘양아치’들에게 자리를 내준 지 오래다. 이렇게 야쿠자의 도가 파산 지경에 이르다보니 <아웃레이지>의 야쿠자 개인들은 하나 같이 무식하고 잔인하게 묘사될 따름이다.

야쿠자 소재와 거리를 둔 채 십년 넘게 방황을 거듭하던 다케시를 다시금 이 세계로 불러들인 것은 급변하는 야쿠자 상(像)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올해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서의 최초 공개 당시 격렬한 찬반 논란이 일었던 것 역시 이 때문이었다. ‘급변하는 야쿠자의 시대상을 담은 결과 vs 악취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잔인함‘으로 나뉜 논쟁이었는데 부산에서 영화를 본 후 개인적으로는 후자의 입장을 지지하는 쪽이다. 영화의 형식을 대변하는 잔인한 표현 방식에 불만은 없지만 문제는 그것이 뒤로 갈수록 어떻게 하면 더 잔인하게 보일까에 초점을 맞추는 까닭에 과잉으로 치닫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아웃레이지>에 대한 지지를 끝까지 망설이게 만드는 결정적인 이유다.
기타노 다케시의 폭력 묘사는 고요한 순간 찰나적으로 펼쳐지는 촌철살인의 미학이 그 정수였다. 하얀 백사장 위로 흘러내리는 붉은 핏줄기(<소나티네>) 혹은 평온할 것만은 같은 해변의 푸른 하늘 위로 탕하고 울리는 한 발의 총성(<하나비>) 등이 기타노 다케시의 폭력 세계를 매력적인 그 무엇으로 만들어주는 요소였다. 그런데 <아웃레이지>는 제목처럼 ‘난폭하게’(outrage) 밀어붙이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정작 과도한 묘사가 형식을 덮어버리는 경우가 되고 말았다. 올 초 한국을 방문했던 일본 문화청 문화 부장이자 영화평론가인 데라와키 켄은 최근 10년 동안의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에 대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멍청하다’는 표현을 썼다. <아웃레이지>가 공개된 지금에도 그 평가는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야심차게 준비한 기타노 다케시의 야쿠자 복귀작은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에 그친 것이다.

<그을린> 부산영화제 최고 영화

앞서 언급한 네 편의 영화가 화제작이었다면 지금 소개하는 드니 빌뇌브 감독의 <그을린>은 개인적으로 평가하는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의 최고 작품이다. 서울을 떠나기 전, 그리고 부산에서 만난 기자와 평론가 중 대다수가 다른 건 몰라도 <그을린>은 꼭 보라고 추천했을 정도다. 그래서 봤고, 안 봤으면 후회했을 만큼 훌륭한 영화였다. 캐나다 영화라고 소개가 됐지만 <그을린>은 더 정확하게는 퀘벡 영화다. 영어가 아니라 불어로 대화가 이뤄지고 여기에 아랍어가 중간 중간 끼어든다. 언어로 촉발된 혼돈은 종종 바벨탑 신화를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그을린>은 현대판 바벨탑 신화라고 할만하다. 언어가 아닌 지금 아랍(레바논 내전이라고 추정된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격한 종교 충돌 및 그에 따른 복수의 혼돈이 야기한 비극적 가족사가 펼쳐지는 까닭이다.

그런데 이 영화가 고발하는 전쟁의 참혹함은 전장을 배경으로 삼지 않는다. 메마른 아랍의 사막, 아니 혹독한 폭력이 휩쓸고 간 죽음의 대지에서 이 영화는 출발한다. 라디오 헤드의 ‘You And Whose Army?’(영국의 이라크 파병 이후 톰 요크가 토니 블레어를 비판하기 위해 만든 곡으로 유명하다.)가 흐르면서 전쟁 병기로 길러지는 아이들의 모습을 비추며 오프닝을 여는 <그을린>은, 그러니까 이 아이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어떻게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가, 를 추적해 들어가는 영화(로 보인)다. 안 그래도 오프닝이 끝나면 주인공 남매가 공증인을 통해 어머니의 유언이 담긴 편지를 전해 받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 편지를 보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한데 남매에게는 지금껏 비밀에 부쳐둔 아랍에 남겨진 또 하나의 아들을 찾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평생을 자식을 돌보는데 무관심했다고 생각한 아들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다. 반면 딸은 어머니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는 기회라며 이를 받아들인다.(언제나 남성들은 타인을 이해하기보다 적대감을 취한다.)
여기서부터 <그을린>은 오빠를 찾아 레바논으로 떠나는 딸의 여정과 엄마의 과거를 교차하며 이들 가족사에 숨겨진 전쟁의 상흔을 쫓는 형식을 취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태생적으로 미스터리의 구조를 취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관객의 관심을 끌기위한 궁여지책의 오락적인 목적이 아닌 나도 모르는 새 몸속에, 핏속에, DNA속에 스며든 전쟁의 흔적을 끌어내기 위한 구조라는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는 오프닝에서 비친 아이들이 그 자신의 의지로 어린 나이에 군인으로 길러지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다만 그럼으로써 사랑보다 증오를, 소통보다는 폭력을, 결국 화해가 아닌 전쟁을 접하면서 성장하고 이것이 다음 세대에도 그대로 되풀이될 거라는 사실이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그렇기 때문에 폭력의 시대, 전쟁 통인 세상에서 아이를 낳고 기른다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일이고 숭고한 일인 것이다.

<그을린>에 ‘위대한’이라는 수사를 붙일 수 있다면, 주인공 남매의 어머니가 전쟁 와중에 잃어버린 아이를 찾기 위해 평생을 바치고 결국엔 화해의 전도사로서 역할을 다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대개의 전쟁영화들은 ‘고발’의 형태로 전쟁의 참상을 드러냄으로써 만족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을린>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지금 이 세상의 평화는 화해가 우선돼야 한다는 사실에 방점을 찍는다. 결국 아랍에 남겨둘 수밖에 없었던 아들과 캐나다 퀘벡의 남매가 조우하는 장면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인류는 종교, 인종, 나라 등 모든 것을 초월해 인간이라는 한 핏줄로 엮어있음을, 그래서 이제는 우리 서로 화해하고 사랑하자는 것을 절실하게 역설한다.(결국 극중 남매의 어머니가 남긴 편지는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 남긴 것에 다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가 캐나다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전쟁의 당사자가 아니면서 전쟁이 야기한 비극을 정면에서 다뤘다는 것, 그만큼 전쟁의 피해가 전 세계적으로 폭넓게 퍼지고 있음을 웅변한다. 그래서 <그을린>에 대해 ‘미래의 고전으로 자리 잡을 문제적 걸작’이라는 부산국제영화제의 표현은 그리 과장된 것이 아니다. 영화를 감독한 드니 빌뇌브는 (최소한 나에게는)앞으로 기억해야할 이름이다.

2010년 10월 26일 화요일 | 글_허남웅(영화 칼럼리스트)    

1 )
dukeyoko
piff 언젠가 꼭 한번 가볼꺼야~~   
2010-10-29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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