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된 사나이>는 유괴라는 사건이 한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을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작품이다. 사건을 일목요연하게 압축한 앞의 오프닝은, 그러한 의도를 꽤나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오프닝 후 드러나는 만신창이가 된 조영수의 얼굴은, 8년이라는 세월동안 그가 겪었을 고통의 무게를 스크린에 고스란히 투영시킨다. 하지만 아쉽게도 여기까지다. 딸을 유괴했던 그놈 최병철(엄기준)이 다시 나타나면서 영화는 주인공의 행동묘사에 천착하기 시작한다. 그와 함께 주인공의 깊고 넓은 심리묘사는 빠르게 마른다. 죄의식과 구원이란 보다 넓은 함의로 나아갈 수 있었던 소재가, 살인자와 추격자라는 단선적인 구성으로 대치돼 버리는 것이다. 얄팍해진 감정묘사 속에서 스릴러 특유의 긴장감이 시들해져 버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이보다 더 큰 아쉬움은,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너무나 많은 기시감들이다. 영화는 <그 놈 목소리>를 빌려 달리다가, <세븐 데이즈>를 곁다리에 걸치고, <복수는 나의 것>을 품고 막을 내린다. <밀양> <올드보이>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파괴된 사나이>가 가장 빚지고 있는 건, <추격자>다. 남자 배우 투톱이 사이코패스와 추격자라는 관계를 맺고 움직인다는 설정은 물론, 여러 장면들이 <추격자>가 일궈놓은 뼈대 안에서 움직인다. 차량 접촉사고로 마주하게 되는 <추격자>의 엄중호(김윤석) 지영민(하정우)처럼, 주차 시비를 계기로 조우하는 영수와 병철의 첫 만남이 하나의 예다.
여러 약점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이 이 영화에 환호한다면, 이는 김명민이라는 배우가 지닌 엄청난 신뢰 때문일 거다. 다행히도 김명민의 연기는 이번에도 실망을 안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하얀거탑> <베토벤 바이러스>가 그의 연기 마지노선을 높여놓고 말았으니, 충족감이 전보다 덜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여기에는 매력적이지 못한 캐릭터의 잘못이 크다. 특히 범인을 향해 칼을 들게 되는 주영수가 한 때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외쳤던 목사였다는 설정을 살리지 못한 건, 영화가 김명민이라는 배우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 패착이다. 동시에 김명민 개인으로서도 아쉬울 대목이다. 배우라는 존재는, 감독이 자신을 100% 활용해 주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이니까. 김명민의 필모를 살펴보면, 그의 분신들은 항상 영화보다 드라마에서 더 빛났다. 드라마 캐릭터 못지않는 인물을 영화에서 만나기가, 김명민에게는 왜 이리 어려운지 모르겠다.
김명민보다 사이코패스 엄기준의 오싹한 눈빛에 눈길이 더 오래 머무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엄기준 역시 캐릭터의 함정에 빠져 큰 힘을 발휘하지는 못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함정 역시 기시감이다. <파괴된 사나이>의 최병철은 <추격자> 지영민에게서 자유롭지 못하다. 나쁜 짓이라고는 모르고 살았을 것 같은 선한 표정, 극한의 상황에서 되려 침착해지는 성격, (화장실에서의)처참한 살해 방법까지 지영민과 흡사하다.
<파괴된 사나이>를 통해 다시금 느끼는 거지만, 복습이라면 이제 충분하지 않나 싶다. <추격자> 이후 3년. 그 동안 너무나 많은 스릴러 영화들이 <추격자>를 복습하며 나왔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복습 중일지 모르겠다. 복습을 꼼꼼히 한다고 해서 나쁠 건 없다만, 독창성이 배제된 복습은 복습이 아니라 반복일 뿐이다. 지금 충무로에는 예습의 중요성을 절감케 하는 영화가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아주, 절실하게.
2010년 6월 28일 월요일 | 글_정시우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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