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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범람의 시대에 시를 묻다 <시>
| 2010년 5월 12일 수요일 | 허남웅 이메일


* 주의! 결정적인 스포일러를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미추(美醜)의 배드민턴 운동

<시>는 이창동 감독의 다섯 번째 영화다. 다만 이 영화가 대중에게 어필하는 관심사는 <만무방>(1994) 이후 연기 활동을 중단했던 ‘왕년의 은막 여신’ 윤정희의 15년 만의 출연에 맞춰져있는 모양새다. 문희, 남정임과 함께 1세대 여배우 트로이카를 형성하며 1960년대 한국영화 황금기의 주역으로 활약했던 그녀가 <시>에서는 주름살 자글자글한 할머니로 등장하는 것이다.

그녀가 맡은 역할은 이혼한 딸 대신 중학교에 다니는 외손자 욱이(이다윗)를 맡아 키우는 할머니다. 아니 ‘양미자’다. 미자는 동년배 할머니들과 달리 외모도, 생활도 꾸미기를 좋아한다. 자신의 삶도 멋들어지게 치장하려는 생각에 시 강좌를 신청한 그녀는 한편으로 남모를 사연에 고통스럽기도 하다. 생계비 걱정에 중풍 걸린 강노인(김희라)의 간병인 생활 중이고 말할 때 명사를 깜박 잊어버리는 알츠하이머 초기 증상도 겪고 있다. 그 때문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미자는 시상을 떠올리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때마침 욱이가 성폭행 사건에 연루되었음을 알게 되고 시를 통해 자살한 여중생을 위로하기로 마음먹는다.

이창동 감독은 애초 시나리오 초기부터 윤정희를 염두에 두고 <시>를 작업해 온 것으로 알려진다. 윤정희는 1960~70년대를 풍미했던 스타이자,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의 아내와 같은 화려한 이미지로 각인되어 왔지만 지금은 주름살이 더 돋보이는 나이다. 이창동 감독의 표현을 빌리자면, 윤정희는 희로애락을 품은 감정의 등고선이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주름살”로 만개한 배우다. 그러니까 <시>는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과 그 수면 아래 침전한 감정의 그늘을 모두 아울러 삶을 들여다보는 영화다. 윤정희는 극중에서 누구의 할머니, 혹은 누구의 엄마가 아니라 미자, 그것도 자신의 본명(그녀의 이름은 ‘손미자’다)으로 출연한다. 이는 그녀의 젊은 시절 화려한 여배우 생활과 그 후의 평범한 생활인의 면모가 <시>가 드러내려는 삶의 궁극적인 모습과 들어맞기 때문이다.

<시>에서 미자의 경우로 드러나는 삶은 미와 추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배드민턴공에 다름 아니다. 실제로 극중 미자와 욱이는 종종 배드민턴을 치는데 너무나 일상적인 모습치고는 둘 사이에 맺어진 관계가 심상치 않다. 몸을 움직이는 것이 여간 힘든 게 아닌 ‘할머니’와 장난 치 듯 공을 넘기는 ‘손자’, 이혼한 딸과 손자를 위해 희생할 줄 아는 ‘어른’과 자기밖에 모르는 ‘아이’, 어깨를 가누기 힘든 ‘늙은 육체’와 성욕이 왕성한 ‘젊은 육체’, 그리고 성폭행 사건에 연루된 손자 때문에 혼란스러운 ‘미자’와 그것이 뭐 별일이라는 듯 매사가 시큰둥한 ‘욱이'까지, 영화는 이 둘 사이를 왕복하는 관계의 포물선을 이어붙이면 삶이라는 하나의 원이 만들어진다고 말한다.(심지어 배드민턴을 치는 이들 옆에서 동네 아이들은 훌라후프를 돌리고 있다!)

시는 삶의 위로

미자는 요람에서부터 무덤 (바로 직전)까지, 아이와 할머니의 시기를 모두 경험한, 이제는 삶보다 죽음이 더 가까워진, 인생의 희로애락을 모두 경험한 인물이라 할만하다. 그래서 극중 미추의 삶을 모두 전시하는 건 그녀가 유일하다. 예컨대, 미자는 몸을 가누지 못하는 강노인의 간병에 아무런 불평도 없어 보인다. 그렇게 선할 수가 없다. 하지만 욱이의 사건을 접한 이후 강노인을 대하는 그녀의 마음은 예전 같지 않다. 더군다나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남자 구실을 하고 싶다”는 강노인의 청을 매몰차게 거절했던 미자는 마음을 바꿔 욱이의 사건을 무마할 위자료를 벌기 위해 조건을 걸고 성관계를 갖는다. 선하게만 보이던 미자가 이 순간만큼은 그렇게 위악적일 수가 없다.

이창동 감독 특유의 건조한 연출 특성상 두 노인의 정사 묘사에는 다른 장면과 마찬가지로 어떤 강조나 꾸밈이 없다. 그러나 관객이 느끼는 감정적 반응으로 보자면, 마치 망치로 내려찍듯 제시되는 미자와 강노인의 정사에는 실은 인생이란 이런 것이라는 이창동 감독의 삶에 대한 태도가 엿보인다. 삶은 미와 추를 왕복하는 진자 운동이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눈물을 알아야 웃음을 알 수 있고, 더러움을 알아야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는 것, 궁극적으로 고통을 알아야 산다는 것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을 <시>는 미자의 경우를 통해 보여준다.

이는 미자를 비롯해 시 강좌를 신청한 학생들이 시를 쓰는데 있어 어려움을 겪는 상황과 연관을 맺는다. 미자는 시상을 찾다가 벽에 부딪히자 수업을 맡은 김용탁 시인(김용택 시인이 연기했다.)에게 “시상은 어떻게 해야 찾을 수 있나요?”라고 질문한다. 이에 대해 김용탁 시인은 “시상은 찾아오는 게 아니라 찾아가는 거예요. 찾아가서 달라고 사정해도 줄까 말까입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러면서 수강생들에게 한 명씩 앞으로 나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말해볼 것을 제의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이 말하는 화양연화(花樣年華)는 가장 고통스러웠던 경험과도 일치한다. 더 정확히는 과거의 아름답고 행복했던 순간을 기억하며 지금의 고통을 위무하고 있음이 밝혀지는 것이다.

시는 곧 위무이고 삶을 긍정하는 위로이며 인생에 대한 성찰이다. 그래서 극중 김용탁 시인의 표현대로 “시는 쓰는 게 힘든 게 아니라 시를 쓰려고 마음먹는 것이 힘들다.” 나의 삶이든, 남의 인생이든 그것을 응시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우선적으로 불편함을 전제한다. 고통까지도 껴안아야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강좌 시간 자신의 인생을 발표하는 장면에서 극중 인물들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영화 연출에 있어 인물이 카메라를 눈여겨보는 구도는 웬만해선 금기시되는 장면에 해당한다. 영화가 가진 환상성의 경계를 넘어 현실에 개입함으로써 관객을 불편하게 만든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이창동 감독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객들로 하여금 불편함을 정면에서 맞닥뜨리게 한다. 관객은 미자의 시선에서, 그녀의 감정에 이입해 <시>를 보게 되는데 다시 말해 이 둘의 시선은 동일시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미자가 극중에서 응시해야 하는 불편함은 무엇일까. 당연히도 외손자 욱이의 성폭행이다. 그녀가 시를 배우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위로하는 대상을 필요로 한다.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 그 대상은 성폭행 가해자로 정상적인 학교생활이 어려워진 욱이가 되어야할까, 아니면 그로 인해 불편함을 겪는 미자, 그녀 자신이 되어야 할까. 이창동 감독은 미자가 시를 창작하는 과정을 통해 성폭행 피해자인 여중생을 위로하는 과정을 담는다.

‘본다’의 윤리적 태도

이창동 감독은 데뷔작 <초록물고기>(1997)부터 <밀양>(2007)까지 우리가 불편해할 진실과 대면하는 영화를 만들어왔다. <박하사탕>(2000)에서는 비극적인 한국 현대사를, <오아시스>에서는 교도소에서 막 출소한 인간말종 남자와 중증뇌성마비장애인 여자의 사랑을, <밀양>에서는 신의 존재에 의문을 던지는 아이 잃은 엄마의 사연을 끝까지 밀어붙이며 관객을 정신의 탈진 상태로 이끌었다. <시> 역시 다르지 않다. 시가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하는 시대, 이 영화는 제목에서부터 불편함을 내포한다. 시를 읽지 않고 쓰지 않는다는 것은 곧 고통에 대해 뭔가를 느끼거나 성찰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요즘 세태의 속성과 다르지 않다. 이 영화에서 ‘본다’는 행위는, 그래서 더더욱 중요하게 작용한다.

다만 <초록물고기>부터 <오아시스>까지 본다는 행위의 대상이 구체적인 형태를 띠었다면 <밀양> 이후로 이창동 감독은 보이지 않는 것의 대상화, 즉 비가시성의 가시화를 추구하는 듯하다. <밀양>에서는 신의 존재가 그러했다면 <시>에서는 당연히 시가 추구하는 것, 바로 삶 속에 담긴 의미를 통한 위로다. 시를 쓰는데 어려움을 겪던 미자가 시상을 떠올리는 결정적인 계기는 성폭행 피해자인 여중생의 죽음이다. 미자는 가해자인 외손자 욱이를 껴안는 대신(배드민턴을 치던 미자는 형사에게 검거되는 욱이를 의도적으로 모른 척 혹은 아예 의식하지 못한다.) 피해자 여중생을 위무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때부터 여중생의 살아생전 마지막 발자취를 쫓기에 이르는데 그것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라기보다 성폭행을 당한 이후 자살의 순간까지 그녀가 겪었을 심적 고통을 공유하려는 미자의 감정적 후체험에 가깝다.

<시>에서 말하는 ‘본다’는 행위의 진짜 의미는 속마음을 헤아린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시의 본질은 사건을 서술하는 눈이 아니라 사건에 반응하는 감정을 이해하는 성찰의 눈 속에 존재한다. 그것은 이창동 감독의 영화적 세계의 본질과 맞닿아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창동 감독이 보여주는 카메라의 윤리학, 그는 늘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을 최대한 진실하게 전달하기 위해 연출의 주안점을 뒀다. 로케이션 촬영, 비전문배우의 기용, 핸드헬드 카메라는 영화가 다루는 대상과 그 대상이 풍기는 분위기를 있는 그대로 재생하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영화의 윤리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영화의 윤리적 태도는 카메라를 작동하는 서술 주체, 즉 감독에게 있다.

이와 관련해 죽음을 다루는 이창동 감독의 미묘한 영화적 태도는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시>는 미자가 여중생의 심정에 동화되어 마지막 가는 길을 겹쳐놓되 그들의 죽음만큼은 굳이 묘사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죽음을 드러내는 것과 드러내지 않는 것 사이의 고민이 존재한다. 그중 이창동 감독은 <시>가 취하고 있는 윤리적 태도는 후자와 결부한다. 물론 <시>는 물에 떠내려가는 여중생의 시체를 보여주며 충격적으로 시작한다. <밀양>도 그렇지만 <시>에서도 아이들의 죽음이 영화의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하는 것은 그만큼 이창동 감독의 이 세상을 바라보는 견해를 드러낸다. 하지만 그 죽음은 뒤로 갈수록 소멸한다. 아름다움만을 알던 미자가 욱이의 사건으로 고통을 느끼고 시를 통해 여중생을 위로하는 과정은 <시>가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의 변화와 맥락을 함께 한다.

<시>는 이 시대에 대한 믿음, 인간에 대한 희망을 여전히 긍정‘하려’ 한다. 시를 통한 죽음의 위로라는 철학적인 주제를 다루면서 이창동 감독은 종국엔 윤리에 대해서도 ‘질문’한다.(<시>의 영문 제목은 ‘poem'이 아니라 ’poetry'다. 완성된 형태의 시가 아니라 시의 형태로 다가가는 상태를 지시한다!) 자극적인 이미지 범람의 시대는 윤리마저도 희박하게 만든다. 시는 자극과 거리가 먼 예술이지만 대신 인간을 성찰하고 위로한다. 시는 역설적으로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그 무엇이다. <시>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 미자의 시선에서 진행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엄밀히 말해 범죄를 저지른 건 손자인 욱이지만 할머니 미자는 가해자의 위치에서 고민하고 행동한다.)

이창동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사람들은 영화에서 뭔가를 느끼거나 성찰하는 것을 원치 않는 것 같다.”라는 요지의 말을 했다. 이창동의 작품이라면 영화를 시로 대치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영화는 삶을 반추하는 도구다. 우리가 애써 외면하는 것에 카메라를 들이대지만 대신 최대한 윤리적 태도로 입각해 접근한다. 눈을 자극하는 이미지는 없지만 마음을 건드리는 울림이 있고 답이 없는 대신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영화 <시>다. 이제는 우리가 시를 쓸 차례다.

2010년 5월 12일 수요일 | 글_허남웅(칼럼리스트)    

25 )
kwyok11
이창동 감독의 작품이라면 역시~~   
2010-05-13 08:05
ggang003
기대되요^^   
2010-05-12 22:50
qhrtnddk93
서정적인 영하네요   
2010-05-12 22:45
ooyyrr1004
이창동 감독의 신작 시~   
2010-05-12 22:04
loop1434
기대   
2010-05-12 15:13
kisemo
잘봤어요~   
2010-05-12 15:12
picaroon23
보고싶어요 ㅠㅠ   
2010-05-12 13:07
ldh6633
잘봤어요~   
2010-05-12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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