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졌다시피 <하녀>는 故김기영 감독의 1960년 동명작품에서 시작된 영화다. 덜 알려졌지만, <하녀>는 <화녀>(1971) <화녀82>(1982)까지 김기영 감독 본인에 의해 두 번 리메이크됐다. 그리고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김기영 감독은 <하녀>시리즈의 완결판인 <악녀>를 준비하다가 불의의 화재로 세상을 등졌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 2010년판 <하녀>는 원작의 세 번째 리메이크 작품이다. <악녀>가 나왔다면 탄생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반대로 <악녀>를 대신하는 작품일 수도 있다. 어떤 관점에서든 김기영이 아닌 다른 창작자에 의해 리메이크된다는 건, 흥미롭다. 창작자인 임상수로서는 영광인 동시에 부담스러운 일이다. ‘잘해봤자 본전’일 수 있는 작품에 뛰어들었으니 용감한 일이기도 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새로운 <하녀>는 원작과 비교하면 파격성도 기괴함도 아우라도 많은 것이 쳐진다. 하지만 임상수 개인의 자장 안에 두고 읽는다면? 그렇다면 얘기는 조금 달라진다. 적어도 이 영화는 임상수의 의도 안에서는 뚝심 있게 펼쳐진 신세계다.
2010년판 <하녀>는 원작의 기본 골격만 유지했을 뿐, 대부분이 새롭게 구축됐다. 원작의 팜므파탈 하녀가 백치미 넘치는 하녀 은이(전도연)로 옷을 갈아입었고, 여성들에게 휘둘리던 나약한 주인은 자본주의의 특혜를 입은 나쁜 남자 훈(이정재)으로 변모했다. 이 과정에서 주도권은 하녀에서 주인에게로 역전됐다. 중산층의 허위의식을 자근자근 씹던 원작의 칼날은 1%의 가진 자들에게 방향을 틀었다. 영화가 건네는 첫 충격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관객은 더 많은 기회가 주어졌다고 생각되는 이 시대가 결국은 허상이라는 불편한 진실과 마주해야 한다. 계급 없는 사회라고? 웃기지 마라. 가진 자들이 남의 영역마저 꾸역꾸역 집어 삼키는 사이, 중산층은 몰락했다. 은이가 그렇다. 본인 소유의 아파트도 있고 대학도 다닌 이 여자는 스스로의 의지로 하녀가 된다. 김기영이 까발리려했던 중산층의 허위의식? 그러한 허위의식조차 이 여자에게는 없다. 아니, 자신의 계급을 혼동하는 일이 허위의식이라면, 이 여자는 그것이 지나쳐 패배의식이 됐다. 무서운 자기애의 상실이다. 본인 밥그릇만 챙겨도 될 텐데, 굳이 있는 자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무서운 하녀 근성이다.
이러한 세상에서 주인은 극소수다. 하녀만이 넘쳐난다. 영화에서 1차적으로 포착되는 하녀는 은이와 훈의 집안일을 오래 총괄해 온 늙은 하녀 병식(윤여정)이지만, 훈에게 거머리처럼 붙어있는 어린 아내 해라(서우)와 장모도 하녀이긴 마찬가지다. 이는 섹스에서도 드러난다. 아내와 섹스 하는 훈의 모습은 사랑을 나누는 자의 몸짓이 아니라, 무언가를 굴복시키려는 포획자의 다름 아니다. 아내는 그런 남편을 충족시키고자, 임신 중인데도 고군분투(?)한다. 영화에서 그녀가 하는 임산부 운동이 아이가 아니라, 남편을 위한 운동으로 읽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이가 하녀처럼 구는 이 상황에서 하녀이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가장 오래 하녀로 산 병식이다. 그녀는 유일하게 자신의 마음을 내 보이는 자다. 은이가 몸으로 자신을 항변할 때, 해라가 남편의 외도를 알면서도 눈 질끈 감고 모른 척 할 때, 장모가 사위의 독설 앞에서도 비굴하게 조아릴 때, 늙은 하녀만은 “지금 이게 뭐 하는 짓들이냐!”고 훈계를 한다. 관객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 준다. 그렇다면, 병식은 이 사회에 숨 쉴 공기를 불어넣는 인간인가? 여기에 이 영화의 또 한 번의 비틀기가 있다. 옳은 척 하지만, 그녀야말로 상류층에 기생해서 가장 성공한 자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옮겨 다니는 박쥐같은 인물이다. 훈에게 붙었다가, 해라에게 붙었다가, 급기야 힘없는 은이에게도 붙는다. 은이에게 뜯어먹을 건, 양심. 그녀는 은이를 두둔하며 자신의 죄악을 씻으려 한다. 아마, 관객들이 병식에게 가장 큰 감정의 동요를 느낀다면, 이는 오늘 날 우리의 내면이 병식과 가장 닮았기 때문일 거다. 그래서 뜨끔하다. 뜨끔해서 불편하다. 불편해서 조롱당한 느낌도 든다.
(마지막 내용이 있습니다. 읽는다고 해도 관람에는 큰 지장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래도 원하지 않으시면 이 부분은 패스해 주시길)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오프닝과 엔딩이다. 원작이 에필로그에서 여태까지의 내용이 허구였다는 ‘액자식’ 봉합으로 뒤통수를 친다면, 임상수의 <하녀>는 오프닝과 엔딩의 교묘한 대구와 은유로 관객의 마음을 친다. <하녀>의 오프닝으로 돌아가 보자. 도시의 한 유흥가와 사람들을 덤덤히 비추던 카메라는 투신하는 여자를 냉정하게 담는다. 그런데 비정한 카메라 시선보다 더 차가운 건, 투신한 여자를 대수롭지 않게 바라보는 사람들의 반응이다. 그 속에 은이도 있다. 은이 역시 잠시 놀라지만 이내 잊는다. 내 일이 아니니까. 내 사람이 아니니까. 그리고 마지막. 투신한 여성의 분신은 은이에게로 전이된다. 억울한 그녀는 그녀 나름의 방식으로 훈의 가족을 향해 복수를 행한다. 하지만 세상이 그랬듯, 은이가 초반에 그랬듯, 이 괴이한 집안의 사람들도 그녀의 행동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왜? 고작 하녀일 뿐이니까. 그녀가 없어도 하녀 할 사람은 세고 셌으니까. 아닌 게 아니라, 영화가 마지막으로 담는 풍경은 새로운 하녀들로 채워진 훈이네의 평범한 일상이다. 과연 은이라는 인물이 존재했었나 싶을 정도로 아무렇지 않은 일상. 이게 바로 우리가 사는 지금의 사회임을 영화는 말한다. 은이로서는 ‘아더매치(아니꼽고 더럽고 매스껍고 치사하다)’를 외칠 일이다. <하녀> 시나리오를 집필하다가 하차한 김수현식 표현으로 하자면 ‘부셔버리겠어!’ 쯤 될 것 같다.
2010년 5월 11일 화요일 | 글_정시우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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