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타>의 성공으로 3D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자리 잡는 분위기다.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들은 잇따라 3D 영화 제작을 발표하고 나섰고, <스타워즈> <타이타닉> 등이 3D로 재개봉하기 위해 새 단장에 들어갔다. 촬영을 끝내고 개봉을 앞두고 있던 <타이탄>은 3D로의 전환을 위해 개봉 일을 늦추는 초강수까지 꺼내 들었다. 영화뿐 아니다. TV·게임 등의 시장에는 3D 산업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전쟁이 이미 시작됐다. 먼저 깃발을 꽂는 사람이 임자라는 듯 신천지를 잡기 위한 혈투가 한창이다. 이처럼 3D는 영화 제작방식은 물론, 3DTV 시장과 관련 산업의 지형도를 빠르게 변화 시키고 있다. 하지만 신기술에 매료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게 있다. 바로 배우들에게 닥칠 생존 방식의 변화다. 3D 영화나 3DTV의 등장은 배우들에게는 그네들의 터전이 뒤집어지는 걸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에게는 낙후된 곳을 보다 좋게 보수하는 ‘리모델링’일 수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삶을 터전에서 쫓겨나게 하는 ‘재개발’ 바람과 같을 수 있다. 자연스럽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이와 그렇지 못한 이의 경쟁력 격차가 벌어질 것이고, 살아남는 자와 도태되는 자가 생길 것이다.
새로운 환경은 배우들에게 어떤 영향을 줬나
새로운 환경이 배우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가를 영화사는 1930년대에 이미 증명한 바 있다. 1930년대 유성영화의 출현은 무성영화 배우들에게 적지 않은 타격을 안겼다. 새로 도입된 시스템 안에서 목소리가 기존 이미지를 배반한다고 여겨진 배우는 퇴출됐고, 대사 전달에 미흡함을 보인 배우의 인기는 하락했으며, 흥선대원군처럼 신기술의 도입을 반대해 입을 걸어 잠근 배우는 오래 살아남지 못했다. 특히 슬랩스틱코미디의 대가 찰리 채플린, 버스터 키튼이나 ‘무성영화 최고의 여성스타’ 메리 픽퍼드, 릴리언 기시에게 유성영화의 출연은 재앙과도 같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갈고 닦아 놓은 유산들이 박제 된 채 박물관으로 직행되리라는 걸 직감했다. 결국 버스터 키튼은 무성영화의 종말과 함께 ‘아듀’를 고했다. 메리 픽퍼드, 릴리언 기시 등도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할리우드의 조연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찰리 채플린은 달랐다. 초반 유성영화 시스템 도입에 김구라 뺨치는 독설을 날렸던 그는, 대사를 풍자의 도구로 적극 활용하며 인기를 이어나갔다. 그레타 가르보 역시 허스키한 음색을 자신의 장점으로 승화시키며 새로운 시스템 안에서 자신이 살아남는 법을 일찍이 터득한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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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D 시대가 원하는 배우상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새로운 3D 환경은 어떤 배우에게 더 유리하게 작용할까. 일단, 현장의 입체감을 보다 생생하게 전달하는 3D 환경에서는 글래머러스한 몸매의 여배우나, 근육 탄탄한 ‘몸짱’ 배우들이 인기를 끌 공산이 크다. 스파르타 전사 300명의 복근(영화 <300>)이 스크린을 가득 채우고 있다고 상상해 봐라. 섹시미의 대명사 스칼렛 요한슨과 메간 폭스, 김혜수 등을 3D로 만나는 건 또 어떤가. 사람들은 3D를 접할 때, 화면 속 피사체가 최대한 입체감 있게 보이기를 기대한다. 볼륨감 있는 미인들이 피부미인을 밀어내고, 스크린과 안방극장의 최강자로 떠오를 요지가 다분하다는 얘기다.(조금 다른 분야이긴 하지만) 이러한 분위기는 성인물 시장에서 이미 감지되고 있다. 보다 사실감 있는 러브 씬, 보다 입체감 있는 여배우를 보고 싶어 하는 늑대들의 수요가 3D 기술과 맞아 떨어지며 성인물 시장을 3D의 한 가운데로 몰아넣고 있다. 지금이야 이런 욕구를 에로 시장이 보다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분위기지만, 그 열풍이 메인스트림으로 침투하는 것도 그리 멀어 보이지는 않는다.
한편 3D 환경 속에서는 운동신경이 뛰어난 젊은 배우들이 좀 더 각광받을 여지가 크다. 이는 단순히 현재 제작 중인 3D 영화 대부분이 배우의 움직임을 많이 요구하는 액션과 SF 등의 장르에 치중 됐기 때문만은 아니다. 카메라 구도가 달라지는 3D 안에서는 배우들의 동선들 역시 변화를 요구받는다. 인물들 사이 거리도 입체로 보이기 때문에 액션 장면을 찍을 때, 때리는 척만 하는 어설픈 발차기는 바로 들통 난다. 배우들 간의 액션 합이 더 정교해 져야 하는 환경이기에 운동 신경이 좋은 배우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는 건 충분히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다.
이는 반대로 3D가 나이 많은 중년 연기자들에게 제약을 줄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특히 해리슨 포드(68), 브루스 윌리스(55), 실베스타 스탤론(64) 등이 아직도 멋진 뜀박질과 폼나는 무술실력으로 노익장을 과시하는 할리우드와 달리, 50-60이 되면 주인공 아빠나, 이웃집 아저씨역으로 밀려나는 우리나라 중년 연기자들에게는 큰 위협이다. 그들에게 3D는 ‘3D(Three Dimensions)’가 아니라, ‘위험하고(Dangerous), 더럽고(Dirty), 어려운(Difficult) 3D’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예전과 달리 40대에도 전성기를 구가하는 배우(설경구, 이병헌, 김윤석 등)들이 많이 생겨나기는 했지만 그들이 나이 50에도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꾸준한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3D 환경을 맞는 배우들의 고민과 자세
하지만 새로운 환경에 배우들이 어떻게 적응해야 할 것인가를 가리기에 앞서 배우들이 고민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그네들의 위상 문제다. 일각에서는 3D가 일반화되면 배우들의 위치가 위축되거나, 경외감이 줄어들 것이란 이야기가 나온다. 영상 혁명으로 인해 기술적인 부분이 더 부각되다보면, 상대적으로 배우들의 연기 비중이 낮아질 것이란 시각이다. 실제로 3D 돌풍을 이끈 <아바타>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라고 했지, 샘 워싱톤의 <아바타>라고 말하지 않았다. 심지어 지난달 2일 발표된 아카데미 후보 명단에서 <아바타>는 작품상, 감독상, 미술상, 촬영상, 편집상, 음악상 등 9개 부문에 이름을 올렸지만, 출연 배우는 그 누구도 호명되지 못했다. 파란 옷을 입은 나비족들이 심사위원들에게는 실제 배우보다 CG에 기댄 디지털 배우로 더 크게 인식 된 것인데, 1년간 세트장에서 뛰고, 싸우고, 고함지르며 ‘집 나가면 개고생이다’를 체험한 샘 워싱톤으로서는 “감독만 기억하는 이 더러운 세상!”이라고 울부짖고 싶을 일이다.
사실, 디지털 배우의 연기가 간과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반지의 제왕>에서 가장 사랑 받는 캐릭터인 골룸만 보더라도, 전 세계 사람들은 “My precious(마이 프레셔스)”를 외치는 골룸만 기억하지, 골룸을 연기한 배우 앤디 서키스에 대해서는 얼굴조차 잘 알지 못했다. <폴라 익스프레스> <베오울프>에 디지털 배우들이 등장했을 때도 실제 배우들의 연기는 중요성 있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인간 배우와 3D 캐릭터 간에 이질감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바타>는 다르다. 앞선 영화들이 사용한 모션 캡처가 사람의 움직임을 잡아내는데 그쳤다면, <아바타>가 도입한 이모션 캡처는 배우 눈동자의 움직임과 눈썹의 미세한 떨림, 근육의 움직임 등 감정(emotion)까지 미세하게 잡아낸다. 어디까지가 CG이고, 어디까지가 실제 배우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시각적 체험이 그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디지털 배우를 바라봐 온 기존 시각에 의문을 던진다. 영화배우의 개념과 범위에 대한 새로운 확립의 필요성을 시사하기도 한다. <아바타>의 성공으로 이모션 캡처 기술을 이용한 영화들은 앞으로도 많이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점이 그네들에게는 굉장히 의미 있는 순간임을 배우들은 알아야 한다. 자신들의 노력을 충분히 보상받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배우들 스스로가 이를 알릴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넋 놓고 가만히 있다가는 본인의 복제인 디지털 배우에게 도리어 종속되는 일이 발생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2010년 3월 9일 화요일 | 글_정시우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