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의 제왕> <킹콩>으로 익숙한 피터 잭슨이 5년 만에 신작을 내놨다. 중간 중간 제작자로 이름을 보이긴 했지만 직접 감독을 했다는 점에서 기대가 크다. 하지만 기존과는 다른 스타일의 영화라 다소 의아하다. 14살에 살해당한 수지 새먼의 이야기를 다룬 <러블리 본즈>는 슬프면서도 경쾌하고 안타까우면서도 따뜻한 원작의 정서를 잘 살리고 있다. 1994년작 <천상의 피조물>과 비슷한 뉘앙스라는 예상도 있었지만, 자극적인 소재보다는 감정 그 자체를 따라가는 순수함이 돋보인다.
14살 소녀 수지 새먼(시얼샤 로넌)은 생일날 받은 카메라로 주변의 모든 것을 사진으로 남기는 꿈 많은 소녀다. 어느 날 학교에서 짝사랑하던 레이로부터 고백과 함께 데이트 신청을 받은 수지는 들뜬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옆집에 살던 하비(스탠리 투치)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한다. 수지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는 아빠(마크 월버그)와 엄마(레이첼 와이즈)를 비롯한 가족들은 하루하루를 힘들게 지내고, 가족에 대한 안타까움과 첫사랑과의 약속, 살인자에 대한 분노로 세상을 떠날 수 없는 수지는 이승과 저승의 중간 지대에 머물며 괴로워한다.
<러블리 본즈>가 막 개봉했을 때, 미국과 영국 등 영어권 나라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피터 잭슨은 스펙터클에 어울리나, 라는 섣부른 판단을 하려는 찰나, 이 영화가 지닌 동양적인 정서를 발견했다. <러블리 본즈>는 살인자에 의해 무참히 살해됐지만,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갈 수 없어서, 첫사랑과의 데이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살인자에 대한 분노로 인해 차마 저 세상으로 갈 수 없는 소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억울한 죽음으로 차마 이승을 떠날 수 없는 수지는, 원한 가득한 귀신이라는 동양적인 아이템과 사뭇 닮아 있다. 이승으로 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수지가 화자로 등장한다는 것 역시 그러하다.
수지는 영화 전반부에 죽음을 당한다. 살인마에 대해 분노하지만, 공포와 두려움으로 인해 ‘자신의 죽음’이라는 현실에 대면하지 못 한다. 그러면서 자신을 잃은 후 피폐해진 가족을 보며 가슴 아파 한다. 수지를 끔찍이 사랑했던 아빠는 살인범을 잡기 위해 생업도 포기하고, 엄마는 이 모든 혼돈을 이겨내기 위해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도 한다. 가족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완전히 저승으로 떠나지 못한 수지는 다양한 방법으로 가족들과 교감한다. 장미꽃, 촛불의 흔들림, 남동생의 꿈 등 막연하지만 서로를 인지할 수 있는 방법으로 가족의 주변을 맴돈다. 그리고 첫사랑 레이의 곁도 쉽게 떠나지 못한다.
<러블리 본즈>는 현실 세계는 물론 이승과 저승의 경계 공간도 중요한 비중으로 등장한다. 객관적인 판타지가 아니라, 수지의 기억에 기인한 장소들은 환상적인 그래픽과 함께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하며 수지의 감정을 대변한다. 특히 아빠와 함께 만들던 병 속의 배나 수지가 찍은 사진, 금고, 모자, 촛불 등 여러 소품들이 수지의 죽음과 현재 상황을 전하는 상징적인 장치로 사용된다. 의미를 내포한 오브제의 등장이나 수지가 있는 공간의 환상적인 모습은 웨타 스튜디오에 높은 비주얼적 완성도를 보여준다.
영화는 살인 사건과 살인범이라는 스릴러적인 요소를 갖추고는 있지만, 살인범을 잡는 것에 큰 비중을 두지는 않는다. 물론 후반부에 수지와 가족들의 교감으로 인해 살인범 하비에게 점차 다가가는 과정은 긴박감이 넘치지만, 탐정 수사물과 같은 스타일은 아니다. 마지막 순간, 범인의 응징 모습 역시 <러블리 본즈>가 갖고 있는 특유의 동양적인 정서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인데, 하비는 수지와 비슷한 형태로 죽음을 맞이한다. 마치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천벌’의 미국식 버전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장르적인 느낌보다는 영화가 갖고 있는 감성에 더욱 충실한 이유다.
<러블리 본즈>의 풍성한 감정들은 배우들의 연기력 덕분이기도 하다. <어톤먼트>로 강한 인상을 남긴 시얼샤 로넌은 여전히 괄목할 만하며, 딸을 잃은 부모를 연기하는 마크 월버그와 레이첼 와이즈는 깊은 슬픔을 훌륭하게 표현한다. 할머니로 등장하는 수잔 서랜든은 다소 분량이 애매하긴 하지만 특유의 이미지를 남긴다. 무엇보다 돋보이는 사람은 살인마 하비를 연기한 스탠리 투치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게이 에디터로 나오기도 했던 그는 이번 영화에서 침착하면서도 서늘한 살인마 역을 뻔뻔하게 잘 해낸다.
이 영화는 그동안 할리우드에서 보여준 피터 잭슨의 작품과는 성향이 다르다. 하지만 원작의 감상적이고 환상적인 느낌을 고스란히 영화로 옮겨왔다. 살인이라는 ‘사건’에 치중하지 않고, 그 일을 겪으며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춘 이야기 역시 흥미롭다. 특히 살해된 소녀가 전체 이야기를 끌고 가는 구성은 쉽게 보지 못한 형식이다. 죽은 자와 산 자의 교감, 여하튼 다시 살아가야 하는 산 자들의 운명과 모든 것에 미련을 버리고 온전한 죽음으로 가는 죽은 자의 감성들이 영화에 절절히 묻어 있다.
2010년 2월 18일 목요일 | 글_김도형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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