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의 재구성> <타짜>를 만들었던 최동훈 감독이 신작을 공개했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시절부터 판타지 사극에 관심이 많았던 최동훈 감독은 100억 원대의 제작비를 투입해 색다른 영웅 이야기, <전우치>를 완성했다. 술과 여자를 좋아하고 자기 멋대로 도술을 남발하는 장난기 가득한 히어로라는 점에서도 독특한데, 꽃미남 강동원을 비롯해 김윤석, 임수정, 유해진, 백윤식, 염정아, 송영창, 주진모, 김상호 등 연기라면 한 가닥씩 하는 배우들이 대거 출연해 더욱 관심을 모은다.
조선 시대, 전설의 피리 ‘만파식적’이 요괴에게 넘어가 세상에 혼란이 오자, 신선들은 최고의 도인인 천관대사(백윤식)와 화담(김윤석)에게 요괴를 잡아들이고, 만파식적을 둘로 나누어 보관하게 한다. 하지만 화담은 세상을 지배할 욕망에 사로잡혀 만파식적을 혼자 차지할 계략을 꾸미고, 천관대사의 망나니 제자 전우치(강동원)는 계략에 말려들어 누명을 쓰고 그림 속에 봉인된다. 500년이 흐른 어느 날, 세상에 요괴가 출몰하자 신선들은 그림 속에 봉인된 전우치를 꺼내 요괴를 잡게 한다. 하지만 전우치는 새로운 세상이 마냥 신기해 사고만 치고 다니고, 과거에 연정을 품었던 서인경(임수정)을 다시 만나 연정을 이어간다. 그러던 중 만파식적의 행방을 좇던 화담이 다시 등장하고, 전우치는 세상의 평화를 위해 화담에 맞선다.
<전우치>는 조선시대 실제 인물인 전우치를 주인공으로 한 작자 미상의 고전소설 ‘전우치전’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수퍼히어로 영화다. 소설 ‘전우치전’은 도술을 써서 부패한 관리들을 괴롭히고, 그들의 돈으로 어려운 백성을 돕는다는 점에서는 ‘홍길동전’과 비슷하지만 주인공 캐릭터에서 차이를 보인다. 전우치는 성격이 불같고, 화를 잘 참지 못하며,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들을 골려주는 등 악동기질이 다분하다. 최동훈 감독은 이런 전우치의 성격을 영화에 적극 반영했다. 탐관오리를 벌하고 백성을 이롭게 하는 교과서적인 영웅이 아닌, 대의보다는 사사로운 감정에 충실하는 개인적이고 장난기 가득한 캐릭터에 초점을 맞췄다.
수퍼히어로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히어로의 활약 과정이다. 사소하게는 개인적인 복수나 거창하게는 지구를 지키기 위해 악당과 싸우는 히어로는, 몇 번의 위기를 맞기도 하지만 결국은 강력한 악을 물리친다는 중심 줄거리를 갖고 있다. 이러한 기본 뼈대에서 주인공의 캐릭터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수퍼맨이나 밤마다 부모의 복수를 위해 나서는 배트맨, 첨단 기술을 적용시킨 아이언맨 등 히어로의 성격에 따라서 영화는 그 방향이 정해지고 주변의 에피소드를 생성한다. 그런 차원에서 강동원이 연기한 ‘전우치’는 매력적이다. 정의를 위해 싸우는 고리타분한 영웅이 아니다. 장난을 좋아하고, 술과 여자를 밝히고, 하고 싶은 대로만 하고, 대의보다는 자기의 기분에 따라 행동한다.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는 이기적인 인물이 아니라면 이런 캐릭터는 영화적으로 활용 폭이 넓다. 아무리 멋대로 굴어도 결국 사건은 해결할 테니까.
매력적인 주인공 캐릭터는 좋았지만, 전체적으로 너무 많은 주변 인물이 등장해 구심력을 잃은 모습도 보인다. 도인에서 자신의 욕망에 사로잡혀 악행을 저지르는 화담이나 전우치와 함께 다니는 개인간 초랭이까지는 자기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 외 전우치 다음으로 많은 분량을 소화하는 세 명의 신선이나 전우치를 위험에 빠뜨리는 서인경, 까탈스러운 여배우, 전우치의 스승, 현대에 나타난 두 요괴, 빨간 머리 여인 등등 너무 많은 캐릭터가 영화 속에 퍼져 따로 놀고 있다. 자유롭게 방목된 캐릭터들이 후반에 정리되지 못한다는 점이 아쉽다. 여러 인물이 다양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그 밀도가 약해 끈끈한 맛이 없다.
최동훈 감독은 이야기를 치밀하게 만드는 구성력이 장점이다. 앞뒤의 사건들이 유기적으로 맞물리면서 사방으로 퍼져있던 사건들이 하나의 줄기로 모여들어 결과를 도출한다. 복잡하게 얽혀있던 이야기들의 인과관계가 드러나면서 해소의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하는 식이다. <전우치> 역시 이러한 스타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해결의 실마리가 되는 단어나 문장이 중간 중간 등장해 결국 마지막 순간에 퍼즐이 맞춰진다. 하지만 <전우치>는 미스터리한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에 이러한 방식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건의 치밀한 인과관계보다는 호쾌한 액션과 유쾌한 캐릭터에 치중했어야 했다.
<전우치>는 디테일한 이야기 구성보다는 신명나게 즐길 수 있는 액션이 더 필요했다. 물론 전우치와 요괴가 맞서는 장면들이나 화담과의 대결 장면 등에서는 적절한 CG와 와이어 액션이 볼거리를 준다. 특히 조선시대에 담벼락을 넘나들며 벌어지는 요괴와의 대결이나 현대의 도로에서 펼쳐지는 액션은 흥미진진하게 시선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후반부 CG의 완성도는 매끄럽지 못하며, 영화 촬영장에서 벌어지는 마지막 결투 장면도 끝날 듯 끝날 듯 끝나지 않는 다소 긴 싸움을 이어간다. 또 조선시대 사람인 전우치가 현대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에피소드들도 디테일한 재미를 주지 못한다.
<전우치>는 독특한 소재를 나름의 방식으로 풀어낸 ‘한국형’ 수퍼히어로 영화다. 나름대로의 재미를 주긴 하지만, 뭔가 확실한 방점을 찍기에는 부족함도 보인다. 강동원을 내세운 전우치 캐릭터는 분명 매력적이나, 그를 둘러싼 주변의 캐릭터들은 어딘지 모르게 허둥댄다는 느낌이다. 이야기 역시 전반부와 후반부를 이어주는 구조 자체는 안정감이 있지만, 와이어와 CG로 무장한 수퍼히어로 영화로서의 볼거리는 그닥 신통치 않다. 게다가 136분이나 되는 시간은 불필요하다는 느낌이 없지 않다.
2009년 12월 16일 수요일 | 글_김도형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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