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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안내! 우주적인 창의력의 자전과 공전
더 문 | 2009년 11월 25일 수요일 | 민용준 기자 이메일

오랜 과거부터 인간들은 달을 통해 미래를 읽고, 현재를 파악했다. 영원을 누릴 듯 이글거리는 태양과 달리 순간을 견디지 못할 듯 위태롭게 이지러지다 차오름을 반복하는 달은 그만큼 신비롭되 불길한 것이었다. 1969년, 닐 암스트롱이 달에 첫 발을 디딘 이후로도 그곳은 여전히 낯선 영역이다. 환형의 굴레를 끊임없이 돌고 도는 달을 향한 인류적 호기심이 신비에서 실리로 변모했을 뿐, 그 구체는 여전히 인류의 상상력을 자극할 만큼 미지수의 창작적 자원량을 보유한 미지의 영토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Where are we now?)” 단순하듯 심오한 질문을 던지는 자막으로부터 미끄러져나가듯 이어지는 낮은 음성의 내레이션은 화석에너지를 사용하며 다양한 불협화음에 시달리던 인류가 달의 표면에서 채취한 청정원료 ‘헬륨3(HE3)’를 대체에너지원으로 삼아 새로운 질서를 이뤘다고 전한다. 궁극적으로 이는 그 모든 성과가 전세계 자원소비량 70%를 차지하는 에너지를 조달하는 ‘루나 산업(Lunar Industries LTD)’에 의해 이뤄졌다는 의미를 전하기 위한 것과 같다. 그리고 기업광고에 가까운 그 도입부 영상이 묘사하는 거대한 변화는 인류의 머리맡에 놓인 달에서 시작된 것이다.

마치 덩그러니 버려진 것처럼 놓인 달 기지에서 홀로 헬륨3를 채취해 지구로 보내는 작업을 도맡은 샘 벨은 계약기간이 종료되어 가족을 만나는 날만 손에 꼽은 채 하루하루를 버틴다. 유일한 동료라 할만한 인공지능 컴퓨터 거티(케빈 스페이시 목소리)가 종종 말동무가 되어주기도 하지만 체온이 느껴지지 않는 컴퓨터를 통해 외로움을 달래기란 불가능한 노릇이다. 하지만 그 긴 시간도 어느덧 계약 만료 예정일을 앞두고 있다. 2주가 지나면 자신을 태우고 지구로 갈 수송선이 도착할 것이고 곧 사랑하는 아내와 입을 맞추고 자신의 딸도 안아줄 수 있다. 그런 어느 날, 월면 작업차를 타고 자원채취 현장에 순찰을 나간 샘 벨은 충돌사고를 겪게 되고 이로부터 영화는 조금씩 예측할 수 없는 궤도로 들어선다.

<더 문>은 범인류적 진전을 피력한 그 동영상의 실체 속에서 살아가는, 혹은 살아가던 한 남자에 대한 사연을 그리는 SF영화다. 달에서 채취한 에너지를 지구로 전달하는 달 기지 ‘사랑(Sarang)’에서 3년의 계약기간 동안 홀로 그 모든 작업을 도맡는 샘 벨(샘 록웰)에 관한 드라마다. 지구의 중력에 속박된 이상 결코 볼 수 없다는 달의 뒤편에 대한 비밀이 흥미를 끌지 못하는 것만큼이나 전인류의 편의를 위해 홀로 달에서 외로운 작업을 펼쳐가는 샘 벨의 삶 또한 고립된 비밀처럼 그 누구도 짐작할 수 없는 타인의 고독한 현실에 불과한 것이다.

달이라는 미지의 영토에 현대문명의 이기를 착륙시켜 완성한 SF영화 <더 문>은 광활한 우주의 한 점과 같은 달 표면을 독점하기엔 너무도 작은 존재인 한 남자의 광활한 고독을 담은 모노드라마다. 회상이나 영상의 동원과 같은 간접적 방식으로 등장하는 캐릭터를 배제한다면 직접적으로 스크린에 노출된 시공간에 등장하는 인물은 단 한 명에 불과한 <더 문>은 그만큼 정적이지만 좀처럼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작품이다. 엄밀히 말해서 달 기지에 홀로 남아 전인류를 위한 에너지 공급에 중책을 맡고 있다는 샘 벨의 상황은 언뜻 봐도 비상식적이다. <더 문>의 우주는 샘 벨의 정서적 고립을 묘사하기 위해 장치된 광활한 감옥이다. 오로지 단 한 명의 배우가 등장하는 <더 문>에서 달은, 더 넓게 우주는, 궁극적으로 휴머니즘과 멜로를 전달하기 위해 고안된 광활한 모노드라마의 무대다.

일차적으로 묵묵히 일상을 견뎌나가는 인물의 고독을 담담하게 응시하던 영화는, 이차적으로 그 인물을 둘러싼 삶의 실체를 가볍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관객의 시야에 들이밀며 본질적 물음에 접근해나간다. 광활한 우주의 깊은 어둠처럼 평온한 고독을 유영하던 영화는 예상치 못한 상황을 전개하며 이를 대면한 인물의 심리적 공황을 긴장으로 달궈나간다. 마치 대기권에 돌입하며 대기와 마찰하는 우주선의 표면과 내부의 온도가 다른 것처럼 인물의 공황적 심리 밖에 흐르는 차분한 공기를 평등하게 포착함으로써 감정적 역설을 이끌어낸다. 관객은 <더 문>에서 그 거대한 우주를 채우고도 남을만한 고독의 만료를 기다리던 남자의 운명이 행성의 소멸처럼 덧없이 사라질 것이며 그 고독이 끝없이 팽창되는 우주적 너비의 운명과 같은 것임을 눈치채게 될 것이다.

가스와 먼지처럼 형체가 불분명한 연민을 자아내던 샘 벨의 고독은 창작자가 연출한 충돌적 상황을 빌미로 이야기적 자전력과 공전력을 얻어 단단한 감정적 형태를 완성하고 전달해낸다. 샘 벨을 연기하는 샘 록웰의 연기는 <더 문>의 자전력의 기반이 되어 관객의 몰입을 당기는 인력이 되고 창의적인 발상과 전개는 공전력의 기반이 되어 거대한 감정적 은하계를 이룬다. 공기가 없어 소리가 발생할 수 없는 우주의 적막 속에서도 저마다의 자전 궤도와 공전 궤도를 지닌 행성들의 화음이 존재하고 있음을 귀로 확인하는 것과 같이 황홀한 경험적 진경을 전달한다.

결국 도입부의 물음은 여운적 답변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인간은 과연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가라는 대의적 진리를 떠올리기 위한 발사대나 다름없다. 심오한 질문과 달리 답변은 명확한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배제하지 않는 삶. 결국 무음의 우주에서 살아남아 유음의 지구로 돌아간 샘 벨은 비로소 삶에 대한 선택권을 얻고 인생에 대한 진리를 깨닫는다. 적막한 무음의 대지에서 번잡한 소음의 대륙에 내린 샘 벨은 그렇게 긴 시간의 고독 끝에 제 삶을 찾아나갈 것이다.

무엇보다도 <더 문>은 최근 개봉된 <디스트릭트9>과 마찬가지로 소재에 대한 응용력과 이야기에 대한 창작력의 자산적 가치를 증명하는 작품이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비롯해 지난 SF영화들의 흔적들이 곳곳에서 배어 나오는 <더 문>은 창조보다도 발굴의 가치를 설득하는 참신한 결과물이다. ‘사랑’이라는 한글로 표기된 달 기지의 이름이나 성조기와 나란히 놓인 태극기가 발견되는 우주복은 분명 국내 관객에게 특별한 감상을 부여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 배려가 인상적인 건 그것이 단순히 얄팍한 생색내기에서 비롯된 이벤트가 아니라 자발적인 애정과 관심을 고스란히 보존하는 선물이라 이해될 만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문>을 통해 대한민국에 애정을 표현한 던칸 존스는 무려 데이빗 보위의 아들이다. 어쩌면 그는 <더 문>에 진심을 담아 국내 관객들과 조우하길 원한 것이 아니었을까. 관객이 그 진심에 답할 의무는 없겠지만 적어도 <더 문>을 완성한 던칸 존스의 재능이 그 진심을 빛낸다는 점에서 <더 문>은 분명 국내 관객에게 보다 특별한 작품으로 기억돼도 좋을 만한 가치를 지닌 작품임에 틀림없다.

2009년 11월 25일 수요일 | 글: 민용준 기자(무비스트)




-샘 록웰을 위한, 샘 록웰에 의한, 샘 록웰에 대한, 우주 모노드라마.
-달의 저 편, 그 신비한 상상에 더해진 창의적 발상과 효율적 고안.
-자본의 낭비가 필요없는 경제적 아이디어. 저예산 고효율 SF.
-달 기지 이름은 '사랑', 우주복에 박힌 태극기. 팔이 안으로 굽을 만한 특별한 선물.
-그러니까 <더 문>을 만든 던칸 존스가 데이빗 보위의 아들이라오. 이거슨 명품 가문?
-등장인물이 하나 뿐인, 아니, 둘, 아니 셋? 암튼 일단 배우는 한 명 밖에..
-다소 적막하고 정적인 흐름. 물론 심심하다는 말은 아니고..
29 )
kisemo
잘봤어요   
2010-03-07 10:43
scallove2
잘봣습니당   
2010-02-05 21:31
iamjo
완전 기대   
2009-12-06 20:03
nada356
뭔가 색다른 영화일듯.   
2009-12-02 15:29
kbk59863
소재는 신선해보이네요   
2009-12-01 18:40
iamjo
기대   
2009-12-01 10:53
biophysics86
보고싶네요   
2009-11-30 08:05
river12424
지루할거같은데   
2009-11-30 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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