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로만 보면 <마이 시스터즈 키퍼>는 올해의 가장 뜨거운 영화가 될 소지가 다분하다. 유전자 선별에 의해 태어나는 아기를 의미하는 맞춤아기는 생명의 존엄성 논란으로 현대 의학계의 가장 뜨거운 감자. 맞춤아기로 태어난 아이가 부모를 고소한다는 이야기의 <마이 시스터즈 키퍼>는 이런 논란을 현실화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디 피콜트의 동명소설(국내에서는 ‘쌍둥이별’로 출간)을 바탕으로 한 영화는 원작의 수위를 낮춰 사회적, 윤리적 화두를 애잔한 가족 드라마에 녹인다.
‘맞춤아기와 그 아이의 부모고소’라는 한줄 시놉시스대로 영화는 초반에 안나의 출생과 성장과정 그리고 안나가 제 몸의 권리를 찾기 위해 변호사를 찾아가는 이야기를 함축해서 보여준다. 안나는 승소율 91%라는 변호사 캠벨에게 언니를 위해 해야 했던 수술과 입원기록물을 보여주면서 부모를 고소하겠다고 당차게 말한다.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에게 몸의 일부를 내줘야했다는 안나의 이야기는 관객을 설득하기에도 충분하다. 하지만 이내 집에 돌아와 안나가 목격하는 장면은 언니 케이트가 피를 토하고 있는 모습이다. 영화는 두 장면을 이어붙임으로써 안나의 가족이 윤리적 딜레마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관객에게 던진다.
맞춤아기로 태어났지만 한 인간으로서 갖는 안나의 정당한 권리와 동생의 희생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케이트의 생명 그리고 끝까지 자식을 포기할 수 없는 엄마의 고통 앞에서는 누구의 손도 들어주기 힘들다. 영화가 의도한 것 역시 관객이 한쪽 편에서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초반에 도발적인 기세로 맞춤아기 소재를 사회적 이슈로 끌고 가는 듯 했던 영화는 안나의 가족사 안으로 파고든다. 안나의 입장을 대변하던 시점이 케이트, 엄마 사라, 오빠 제시로 옮겨가며 영화는 케이트의 발병으로 각 가족에게 일어난 감정과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여기에 플래시백은 효과적인 장치가 되어준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플래시백은 같은 상황에 놓였으나 다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가족의 절박한 마음을 드러내 보인다. 안나가 변호사 사무실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 사라와 브라이언이 안나를 낳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 의사의 진단과 달리 케이트가 15년 이상을 살 수 있었던 이유 등이 설득력 있게 나열된다. <노트북>(2004)으로 멜로적 감성을 인정받았던 닉 카사베츠 감독은 특수한 상황에 놓인 가족을 애잔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반전은 반전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귀결로 보인다.
그렇다고 과감하게 윤리적 화두를 던진 원작의 날카로움이 완전히 무뎌진 것은 아니다. 할리우드의 주요 메이저사가 제작한 영화답게 할리우드 엔딩으로 끝을 맺지만 영화는 맞춤아기와 더불어 의학계, 종교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안락사 문제까지 수면에 올린다. 소재와 화법과 감성이 다소 비약적으로 얽혀 있는 영화의 틈을 메우는 것은 진정성이다. 삭발, 노 메이크업으로 출연한 배우들과 실제 병원에서 촬영하며 암에 걸린 환자들의 심리와 생활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담으려한 제작진의 노력은 영화에 리얼리티를 덧입힌다.
문제의식과 감동, 두 마리의 토끼를 잡기 위해 매진한 영화의 노력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성과물을 내놓는다. 영화는 눈물과 함께 생각의 여지를 남긴다. 하지만 역시 유전자 선별과 맞춤아기는 만만찮은 소재가 아니다. 영화는 최대한 균등한 시선으로 절박한 상황에 놓인 가족의 이야기를 그리지만 민감한 소재로부터 새로운 시각이나 깊은 성찰을 끄집어내진 못한다. 하지만 이는 비단 감독의 역량 탓만은 아닐 것이다. 안나의 가족이 안고 있는 것은 2 시간 안에 해결하기에는 복잡한 현대과학의 딜레마가 아닌가.
2009년 9월 8일 화요일 | 글: 하정민(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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