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도쿄의 지하철 안. 야심한 시각이라 승객이 드문드문 한 지하철 안에 한 소녀가 앉아있다. 양 갈래 머리가 여느 소녀와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맞은편 텅 빈 자리를 응시하는 얼굴에는 평범한 소녀의 것이라 할 수 없는 살기가 흐른다. 소녀의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눈치 챘는지 한 남자가 주춤주춤 자리를 옮긴다. 소녀가 뒤를 따르고 남자의 발걸음은 빨라진다. 남자가 뒤를 돌아 소녀의 핏기 서린 눈동자와 직면하는 순간 어느 새 소녀의 손에 들린 일본도는 남자의 몸을 정확히 반으로 가른다.
소녀의 정체는 뱀파이어 헌터 사야(전지현). 인간과 뱀파이어 사이에서 태어난 사야는 ‘협회’라는 비밀단체로부터 인간의 모습으로 숨어 사는 뱀파이어들을 찾아 없애라는 비밀임무를 부여받아 수행중이다. 협회와 사야가 다음 타깃으로 삼은 곳은 미군공군기지에 있는 고등학교. 전학 온 첫날부터 사야는 학생으로 위장한 뱀파이어들을 발견하고 처단한다. 같은 반 친구 앨리스(앨리슨 밀러)은 살해 장면을 목격하면서 사야와 뱀파이어족의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사야는 뱀파이어들을 차례차례 처단하면서 인간과 손잡은 진짜 이유,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뱀파이어의 수장 오니겐(고유키)에 대한 복수를 향해 맹렬히 달려간다.
<블러드>는 <공각기동대>(1995) <이노센스>(2004)로 세계적인 거장의 반열에 올라선 오시이 마모루의 ‘블러드 프로젝트’ 중 하나인 소설 <블러드: 더 라스트 뱀파이어-야수들의 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블러드 프로젝트는 오시이 감독이 소녀 뱀파이어 ‘사야’의 이야기를 소설, 애니메이션, 게임으로 제작한 것을 일컫는다. (<킬빌>의 교복을 입고 철퇴를 휘두르는 소녀 고고는 쿠엔틴 타란티노가 사야를 모델 삼아 창조한 캐릭터다) 애니메이션 <블러드: 더 라스트 뱀파이어>와 TV시리즈 <블러드 플러스>가 각각 2000년, 2005년에 제작돼 평단과 대중의 찬사를 이끌어냈다. 프랑스 감독 크리스 나흔과 한국 배우 전지현, 일본 배우 고유키, 이탈리아 배우 앨리슨 밀러 등 다국적 스태프가 동원된 영화 <블러드>는 블러드 프로젝트를 통해 제작된 최초의 실사영화다.
하지만 영화가 소설과 애니메이션을 경배해 마지않았던 팬들의 열광을 재현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야의 행위에만 초점을 맞춘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피범벅인 액션에서 시선을 돌릴 틈을 주지 않는다. 쉬지 않고 찌르고 베고 사지를 절단하는 통에 오프닝의 강렬함도 순식간에 휘발된다. 스토리와 캐릭터 역시 액션만을 위해 기능하는 듯 <블러드>는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설명도 생략한다. 낭자한 유혈 속에 사라진 것은 스토리와 캐릭터뿐 만이 아니다. 혼혈 뱀파이어를 통한 시대적 은유와 정체성 고민 같은 소설의 테마 역시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다고 액션이 영화적 쾌감을 충분히 채워주는 것도 아니다. 홍콩의 대표적 무술감독 원규가 참여했다고는 하나 달리고 휘두르기만 하는 액션의 상상력은 스토리만큼이나 빈곤하다. 감정도 사고도 없는 액션의 나열은 결국 액션의 쾌감마저 반감시킨다.
‘원톱’으로 영화를 이끌어나가는 전지현은 여전히 교복이 잘 어울리고 영어 연기도 썩 나쁘지 않다. 하지만 영화는 사야에게서 일본도를 휘두르는 교복 소녀 이미지만을 차용했듯이 배우 전지현의 앳된 여전사 이미지만을 가져왔을 뿐이다.
2009년 6월 11일 목요일 | 글_하정민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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