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한대수가 '물 좀 주소 목 마르요'라고 걸걸한 목소리로 부르짖었을 때 물은 저항과 자유의 상징이었다. IMF의 터널을 통과하고 신자유주의체제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대한민국 하에서 물의 상징에 대한 답? 초등학생에게 물어봐도 뺨맞기 십상인 바로 그 돈, 돈이다. <물 좀 주소>는 구창식을 중심으로 한 저 네 인물의 삶이 어떻게 돈, 아니 빚의 굴레에 속박되어 돌아가는지를 그린다. 장르?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과 <오아시스>의 조감독 출신인 홍현기 감독이 선택한 장르는 의외로 사회파 드라마가 아닌 블랙 코미디다.
누구는 구창식, 곽선주, 조을상, 심수교의 관계를 단순한 먹이사슬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잊으면 안 되는 것은 이들 모두는 현재 분명히 하층계급이라는 사실이다. 조을상은 한때 중산층 아니었냐고? 대한민국에서 중산층은 하층계급의 계급성을 탈각시키기 위한 허울 좋은 수사로 기능해왔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된다. <물 좀 주소>가 보여주는 이 빚의 사슬 구조는 아무리 치열하게 살아도 헤어 나올 수 없는 하층계급끼리의 악다구니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똑같이 빚을 졌어도 자신이 받을 빚을 담보로 유예를 받는 피사장이 후반부 단란주점에서 일하는 곽선주에게 돈을 뿌리는 장면을 집어넣은 것이 바로 그런 증거다.
<물 좀 주소>에서 냉소의 기운은 좀체 찾아 볼 수 없다. 구창식이 '조폭스러운' 사채업자들에게 쫓기는 기본 전제에서 보이듯 대체로 유머러스하게 모든 상황을 풀어나간다. 돈을 받으러간 심수교가 구창식의 쪽방에서 소주를 나눠 마시고 나란히 누워 잠드는 장면 또한 비슷하다. 무엇보다 40살 구창식이 22살 곽선주에게 연정을 느끼는 로맨스 부분 중 판타지를 두 장면이나 삽입할 만큼 분위기를 중화시키려 노력한다. 그건 감독이 이들에게 보내는 애정 어린 시선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빚 받을 생각은커녕 오히려 곽선주에게 돈을 꿔주는 구창식이나 그런 구창식에서 끊임없이 학생이라고 놀림 받는 심수교나 누구하나 모진 인간이 없다. 특히나 주인공 구창식은 먹먹한 상황 앞에서도 오히려 여유와 웃음을 잃지 않는다. 그건 영화의 성격과 정확히 일치한다. <물 좀 주소>는 빚이라는 괴물과 맞닥뜨린 채로 웃고 우는 인물들을 다독이는 인정 희극에 가깝다.
축소된 인간군상극으로 볼 수 있는 <물 좀 주소>는 네 인물의 동선만으로도 한국사회의 '꽤나' 여러 밑바닥을 건드린다. 그러나 영화는 현실을 좀 더 냉정하게 파고들기보다 인물들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현실을 버텨내야 하지 않겠느냐고 위무한다. 물론 이들을 궁지로 몰아넣기도 한다. 조폭들에게 독촉을 받은 구창식이 조을상의 딸 결혼식장에 찾아가 돈을 받고자 행패를 부리는 장면은 눈물샘을 자극할 만큼 처참하다. 그 보다 좀 더 구창식과 세 인물을 극단으로 밀어 붙인 <물 좀 주소>는 금새 그들을 구원해 준다. 그것이 비루한 현실에서의 탈출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도, 감독도 잘 알고 있다. 그건 어쩌면 경쾌하게 편곡되어 노동자들 곽선주가 부르는 엔딩 크레딧의 '물 좀 주소'처럼 1970년대와 달라진 혹은 만연한 신자본주의에 대한 자기 위무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구창식과 심수교는 죽지 않고 살아남아 오늘도 여전히 채권추심을 하러 다니는 중이니까.
2009년 6월 5일 금요일 | 글: 하성태(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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