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는 대한민국에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종류의 정치스릴러다. 일단 충무로에서 정치스릴러는 금기다. 지금 유일하게 이런 종류의 장르를 건드리는 건 <살인의 추억>의 봉준호가 유일하다(강우석이 소싯적에 만든 정치영화는 세인들의 기억 저편에 사라져 버린 지 오래다). 두 번째 기자의 양심과 활약을 다룬다. 우리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여배우의 죽음, 그에 관련된 리스트, 그리고 이를 둘러싼 권력게임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우리의 보수 언론은 너무너무 힘이 세다. 더욱이 "국가 안보의 민영화"라는 민감한 미국 정치가의 치부를 건드린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는 매우 '핫'한 소재들과 정직한 주제 의식을 탑재한, 부러워할 만한 정치스릴러 되겠다.
시작은 단순 강도로 보이는 두 건의 살인사건이다. 하지만 이게 그리 간단하지 만은 않다. 그 사건 직후 전도유망한 정치가 스티븐(벤 애플렉)과 은밀한 관계를 맺었던 보좌관이 의문의 지하철 사고를 당한다. 미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스캔들은 그러나 스티븐의 대학 동창인 워싱턴글로브의 베테랑 기자 칼(러셀 크로우)의 취재로 그 음모가 한 꺼풀씩 벗겨지기 시작한다.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는 로맨틱 코미디의 명가로 유명한 영국의 워킹타이틀이 정치스릴러에 재도전한 영화다. 시드니 폴락과 니콜 키드먼, 숀 펜이란 최상의 패를 들고도 흥행과 비평 모두 쓴맛을 봤던 <인터프리터>이후 꽤나 절치부심한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BBC의 인기 TV 시리즈를 영화로 옮기며 '본'시리즈와 <마이클 클레이튼>의 토니 길로이를 각본으로 영입했고, 다큐멘터리 출신으로 <라스트 킹>으로 연출력을 인정받은 신예 케빈 맥도널드를 의욕적으로 기용했다. 이안과 <색, 계>와 <브로크백 마운틴>을 함께 했던 촬영 감독 로드리고 프리에토의 꽉 짜인 영상도 나무랄 데 없다. 이러한 제작진이 있었기에 이다지도 화려한 출연진이 가능했을 터. 맞대결을 펼친 러셀 크로우와 벤 에플렉, <노트 북>의 레이첼 맥아담스와 <더 퀸>의 헬렌 미렌, 그리고 숀 펜의 아내인 로빈 라이트 펜에 이르는 세대를 아우르는 세 여배우까지 어디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는 완벽한 캐스팅이다. 악역을 맡은 노회한 정치가 역의 제프 다니엘스나 카메오 출연한 제이슨 베이트먼 또한 반가운 얼굴이다.
'웰메이드 스릴러'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는 객석에 앉은 이후 시계를 찾아 볼 여력이 없이 2시간의 러닝타임이 훌쩍 흘러간다. 그건 영화의 속도감과 함께 건드리고 있는 토픽이 촘촘하게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살인사건을 진상을 파헤치는 기본 얼개 외에도 칼과 인터넷판 신참 기자 델라의 기자로서의 활약상과 갈등이 적절히 배치되어 있다. 여기에 워싱턴 정가의 정치 스캔들과 "전쟁을 돈벌이로 여기는 장사꾼" 들에 대한 비판, 칼과 스티븐의 아내 앤과의 위태로운 관계와 클라이막스의 반전까지 꽉 짜인 플롯의 위용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원작도 원작이지만 공동각본을 담당한 토니 길로이가 어디까지 관여했는지 궁금해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무심한 듯 '쿨'하게 할 일을 다 해내는 칼 역의 러셀 크로우를 위시해 배우들의 연기 또한 튀는 구석 없이 드라마에 녹아들어갔다.
그러나 이 모든 잔재미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집중하는 것은 기자 정신과 정도를 걷는 언론상에 닿아 있다. "편집장을 믿지 말라"는 좌우명 아래 동물적 본능을 가지고 살인사건을 파헤치는 칼의 활약상은 영웅적인 면모보다 신문기자의 이상향을 그리고 있다. 칼은 좀 더 빠르고 원색적인 기사를 가지고 장사를 하길 원하는 편집진에 맞서야 하고, 가십으로 점철된 인터넷판과 싸워야 하는 형편이다. 그래서 영화는 편집장과 신참기자 델라와의 관계에 일정부분을 할애한다. 미디어의 속성과 현실을 가감 없이 그리면서도 진중하게 제 갈 길을 가는 칼의 활약을 통해 언론이 지향해야 하는 바까지를 설파하는 것이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파헤친 것으로 유명한 실제 기자들을 카메오 출연 시켰다거나, 엔딩 크레딧에 윤전기서부터 신문이 인쇄되는 과정을 삽입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러니까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는 워터게이트 사건을 파헤쳤던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의 언론 윤리 의식을 21세기에 되살리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물론 지적할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립할 수밖에 없는 미디어와 정치권력을 칼과 스티븐의 우정과 연적관계로 녹인 탓에 클라이막스의 반전이 급작스럽게 느껴진다거나 민영 군사업체 '포인트콥'에 대한 묘사가 용두사미 격으로 전락한 것을 들 수 있다. 또 몇 일간의 긴박한 사건을 쫓아가는 탓에 인물들이 스테레오 타입화 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과적으로 배분되고 조율된 각본과 빈틈없는 편집은 이를 상쇄시키기에 충분해 보인다. 무엇보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면서도 언론의 윤리의식에 관한 주제의식을 끝까지 놓치지 않았다는 점은 칭찬해야 마땅하다. 이러한 주제의식과 결합됐을 때 할리우드의 고전적인 내러티브가 진정으로 빛을 발하는 법이다.
2009년 4월 28일 화요일 | 글_하성태(무비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