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는 유태인에게만 아픈 기억이 아니다. 독일인들에게도 기억에 떠올리기조차 싫은 악몽의 장소이다. 지난 60여 년간 홀로코스트를 다룬 무수한 영화들은 나치에 발가락이라도 걸쳤던 이들의 변론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모든 초점은 유태인의 슬픔과 비탄에 맞춰졌고 그 어떤 경우에도 피해자의 아픔을 거둔 채 진행되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자면 유구한 인류 역사에서 홀로코스트는 일부분에 불과하다. 중국공산당의 티베트 학살과 스탈린이 정적을 상대로 벌인 참살과 아프리카 흑인들에게 가해진 끝없는 박해의 역사만 봐도 그렇다. 숫자상으로 월등하다고 논박할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유태인들은 선조의 피를 수단으로 삼아 독일인의 참회와 배상과 죄책감을 끊임없이 독려하고 독촉하며 다른 한편으로 대가를 수확해왔다는 점에서 그나마 행복한 민족이다. 때문인지 나는 로만 폴란스키의 <피아니스트>가 칸의 패자에 등극했을 때, 홀로코스트 영화는 이제 그만! 이라고 외치고 싶었을 정도였다. 홀로코스트의 상품화는 더 이상 놀랄 일이 아니다.
물론 나치의 만행을 옹호하거나 변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한) 독일인들만큼 박해의 역사에 대한 혹독한 대가를 치룬 민족도 드물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적은 배상으로 너무 단기간에 죄를 씻고자한 일본에 비해 독일의 경우는 오히려 너무 많은 대가를 치러 왔다는 얘기다. 게다가 이스라엘의 끝없는 요구에도 불구하고 자칫 반기를 들라치면 네오나치로 몰리기 십상인, 아직도 히틀러와 바그너를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는 것이 21세기 독일국민의 정서다. 이처럼 홀로코스트에 대한 독일인의 자기반성은 현재진행형이다.
역사의 소용돌이에 발 디딘 나약한 개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사람마다 다르기 마련일 테지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그 시대를 살아온 개인의 삶의 가치만큼은 인정해줘야 마땅한 일일 터. 그러나 피해국가 입장에서는 지나칠 정도의 민족주의에 매달려 개인을 국가에 복속시켜버리곤 했다. 공적기록에 사적 기억이 침투할 여지를 주는 순간 역사적 진실이 훼손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의 종반, 어린 시절 아우슈비츠에 있었던 그러나 지금은 명사가 된 유태인 여성은 당시 나치에 복무했던 주인공의 유품을 받아든다. 그 표정과 태도가 어찌나 도도하고 당당한지. 하지만 나는 그 지점에서 쾌재를 불렀다. 한 때 아우슈비츠 경비원이었던 안타까울 정도로 무지하고 순진한 어느 여인의 사적 진실과 홀로코스트라는 거대한 역사의 무게가 수평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사적 비밀과 기억의 가치를 그려낸 영화, 케이트 윈슬렛의 열연과 스티븐 달드리의 세밀한 연출이 돋보였고 올해 내가 본 영화 중 최고인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영화는 ‘다비드별의 눈물’ 이 ‘홀로코스트’와 이별을 연습할 때라고 말하고 있었다. 진실로 그럴 때가 되었다.
2009년 4월 2일 목요일 | 글_백건영 편집위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