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살인>은 철저하리만치 야심이 없어 보인다. 한국 최초 ‘탐정추리극’이란 점을 마케팅 포인트로 내세웠지만, 장르에 대한 철저한 이해나 성실함 혹은 작가적 야심도 드러내질 않는다. 의아할 정도다. 그런데 또 상업 영화에 대한 기대 심리를 배반할 정도의 빈약한 완성도는 아니다. 어쩌면 배반감은 바로 거기서 발생한다. 장르에 대한 기대와 달리 영화의 야심이 다른 지점으로 향하고 있다는 점 말이다.
얘기는 이렇다. 탐정 홍진호는 우연히 시체를 ‘줍게 된’ 의학도 광수(류덕환)가 살인범을 찾아 달라는 의뢰를 받아들인다. 물론 돈 때문에. 연이어 비슷한 수법의 연쇄살인이 일어나고, 두 ‘짝패’는 함께 사건을 파헤쳐 나가다 좀 더 거대하고 추악한 범죄의 실체에 다가서게 된다. 이렇게 요약하자면 더 할 나위 없는 탐정물의 내러티브가 전개를 예상해 봄 직 하다. 그러나 <그림자 살인>은 예상과는 조금 다른 길을 간다. “관객이 즐겁게 볼 수 있는, 관객보다 반 박자 앞서가는 템포”의 탐정물을 만들었다는 박대민 감독은 꽉 짜여진 구조나 논리, 반전을 들이댈 생각이 없어 보인다. 영화는 그저 물 흐르듯 단서를 나열하고, 몇몇 등장인물을 조합해 낸 뒤 기어코 예상하고 싶지 않던 종류의 결론에 다다른다. 그 도정에 몇 몇 액션 시퀀스와 나이 차 많은 탐정과 조수가 주고받는 개그가 배치된다. 그런데 이 전개가 그저 허허실실 흘러간다는데 문제다. 긴장감이나 치밀한 논리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굳이 탐정이란 캐릭터가 필요했을까. 셜록 홈즈부터 소년 탐정 김전일까지, 에르큘 포와로부터 제시카 할머니까지. 무릇 우리가 탐정의 활약상을 보는 이유는 그들의 비범함 때문이다. 그들은 모는 무심한 듯 시크하거나 괴팍한 성격을 가졌거나 우리 같은 범인들은 범접하지 못할 경탄할 만한 추리력을 자랑한다. 심지어 곧 개봉할 <용의자 X의 헌신>의 유카와는 논리적인 과학적 사고를 통해 범인을 잡아내는 천재 물리학 교수다. 관객이, 독자가 탐정물에서 보고 싶어 하는 그 무엇이 현실에서 접하지 못할 두뇌 게임이란 사실은 자명하다. 하지만 <그림자 살인>이 지향하는 바는 다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탐정이란 직업을 가진 ‘캐릭터 드라마’에 가까워 보인다. 핵심은 홍진호의 개성이 드러나지도 그럴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다는데 있다. 그렇다고 이제는 그리 낯설지 않은 구한말을 배경으로 했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다. 우리는 이미 ‘조선판 CSI’ <별순검>의 등장을 목도한 바 있다.
홍진호를 깊숙이 들여다보자. 아낙네들 불륜 현장이나 들추고, 미국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을 기대에 부풀어 있는 홍진호는 전직 순사다. 애석한 것은 홍진호가 무능의 극치를 보여주는 순사부장 오영달(오달수)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는데 있다. 적당히 게으르고, 적당히 인간적이며, 약간은 긴장감이 풀려있다는 측면에서 영화 외적으로 관객들에게 웃음을 전달하는 오달수와 황정민이 연기 포인트도 비슷해 보인다. 더욱 중요한 점은 오영달의 반대편에서 수사를 전개하는 탐정 홍진호가 하는 일이라고는 고작 하필 범죄 현장에 도착한 순간 등장한 범인을 쫓는다거나, 매력적이지만 정체가 불분명해져버린 조력자 사대부 발명가 순덕의 도움을 받는 일뿐라는데 있다. 어쩌면 홍진호는 탐정이 아니라 좀 더 명석한 흥신소 직원이 아니었을까 의심이 들 정도다.
탐정 캐릭터가 빈약하니 추리의 쾌감이 빈약한 것은 당연지사. “치밀하게 머리싸움을 하는 스릴러”를 원하지 않았다는 박대민 감독의 변을 인정하더라도, 최소한의 등장인물로 개연성을 조합해내는 <그림자 살인>의 구조는 미안하지만 ‘제시카의 추리극장’ 수준이다. 추리물임을 인증하기 위한 단서들의 조합은 개연성을 위한 개연성으로 보일 뿐이다. 과정이 빈약하니 후반부 밝혀지는, ‘그림자 살인’과 제목과 ‘공중곡예사’라는 가제에서 유추해 볼 수 있는 반전과 범인의 정체 또한 맥이 풀리는 형국이다. 이를 위해서 영화는 때깔 좋은 액션신과 황정민의 코믹한 연기, 그리고 후반부의 정체모를 정의감에 기대고 있지만, 영화는 이미 갈 길을 잃어버린 후다. 특히나 우리가 한 번도 마주해보지 못했던 사대부 발명가 순덕이란 캐릭터를 허비해 버린 건 두고두고 아쉽다. 제작진의 바람대로 2편이 나오거나 스핀오프를 만들 기회가 주어진다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림자 살인>의 야심은 분명 토종 탐정 캐릭터를 탄생시켰다는데 만족해야 할 듯싶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한국 관객들의 입맛을 고려해 액션과 개그를 곁들이고, 후반부에 진중한 분위기까지 덧씌웠다. 이미 높아질 대로 높아진 관객들의 눈높이에 맞추고자 세트와 미술에도 공을 들인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대한 분노인지, 권력자에 대한 심판인지, 직업 정신의 발로인지 불분명한 탐정과 의학도의 강렬한 분노를 공을 들여 잡아낸 후반부는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어 보인다. <그림자 살인>은 ‘탐정추리극’이란 장르의 장점을 일찌감치 포기해 버리고, 곁가지 설정에 더 욕심을 보였다. 아무리 좋게 해석해도 익숙할 대로 익숙한 할리우드의 형사 버디물의 변형일 뿐이다. 단지 시계를 과거로 되돌렸을 뿐인. 그래서 더더욱 <그림자 살인>은 관객들의 반응이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 영화다.
2009년 3월 26일 목요일 | 글_하성태(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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