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첫 출간 이후 2억 부의 판매고를 이루며 이제는 전설이 된 토리야마 아키라의 만화 ‘드래곤볼’이 실사화돼 세계 최초로 한국 관객들에게 찾아왔다. 영화는 계왕신과 마인 부우 등이 등장하는 장대한 원작의 분량 가운데서 초반부, 그 중에서도 극히 일부의 설정만 빌려온다. 여색(女色)을 밝히는 무천도사(주윤발)와 발명에 능통한 부르마(에미 로섬), 손오공과 장차 러브라인을 형성할 치치(제이미 정) 같은 기본 캐릭터들의 설정은 그대로 빌려오지만, 원작 차용의 범위는 캐릭터들의 설정만 빌려올 뿐 원작의 스토리와는 별개의 스토리라인을 구성한다. 일례로, 보름달이 뜨면 괴물원숭이로 변하는 사이어인의 피를 이어받은 손오공의 특징은 영화 후반부에서 비틀린 설정으로 변형된다. 원작의 초기부터 나오는 크리링과 천진반은 영화에선 배제된다. 영화 속 신룡의 CG를 본다면 <디 워>(2007)의 후반부 용 CG 그래픽이 얼마나 탁월했나 하는 것을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제임스 왕 감독이 동양계이고, 원작이 서양보다는 동양에 치중하는지라 동양적 내음이 물씬 풍기는 영화 속 분위기 가운데서 한국인 혹은 한국계 배우(박준형과 제이미 정)의 비중이 높다는 점은 분명 이채롭다. <스피드 레이서>(2008)에서 단역으로 단지 몇 시퀀스에만 등장했었던 박준형은 이 영화의 조연으로 세계 관객들에게 얼굴 알리기를 적극적으로 시도할 전망이다. 재미교포였기에 능숙한 영어 구사가 가능했던 박준형은 이번 야무치 배역을 통해 부르마와 잠시 동안 애정전선을 형성한다.
원작 캐릭터들이 즐겨 애용하던 공격 방식인 에네르기파를 영화로 빌려오기 전에 기(氣)라는 개념을 먼저 제시하되, 이 용어를 영어로 재개념화하지 않고 'ki'라는 고유명사 그대로 독음한다. 7개의 드래곤볼이 모이면 드래곤볼을 모은 사람에게 어떤 소원이든 신룡이 들어준다는 설정을 제외하곤 원작과는 차별화된 전략을 구사하는 시놉시스는, 손오공의 연대기를 통해 다음과 같은 함의를 내포한다 - 고등학교 안에서 미운오리새끼였던 손오공이 무천도사를 통한 장풍 연마를 통해 악의 화신 피콜로와 대적할 수 있을 정도로 업그레이드 된다는 설정은, 하이틴 무비에서 흔히 관찰 가능한 주인공의 정신적 성장담과 난세를 평정하는 신화 속 영웅담 두 가지를 동시에 아우르는 겸상이다.
하지만 영화는 원작의 범주권 안으로 안착하길 거부하고 독창적인 시나리오의 세계로 입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 매력적으로 보이진 않는다. 천하제일무술대회를 통해 진정한 실력의 자웅을 겨루면서 무술대전 상대방과 우정을 쌓는다는 원작의 설정을 설령 관객이 모른다 할지라도 영화 속 이야기가 부실시공 되었음은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출연하는 영화 속에서 자신만의 존재감을 발산하던 두 배우, 주윤발과 에미 로섬은 이 영화의 캐릭터를 덧입음으로 고유한 질감을 상실한 지 이미 오래다. 악당인 피콜로의 존재감은 위압적이라기보단 상투적이며 각 캐릭터들의 사연 혹은 디테일한 심적 동인의 연출에 대해선 인색하다. 그렇다고 액션에 포커스를 맞춰서 영화의 액션이 독창적이거나 현란하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다. 모두 어디서 본 듯한 기시감을 유발하게 만드는 액션 시퀀스의 점철이다. 신룡의 존재 의미가 이리도 허무하다면 굳이 애써서 드래곤볼이라는 타이틀을 붙이지 않았어도 될 성 싶다. <트랜스포머>(2007)의 엔딩 시퀀스처럼 이 영화에서도 속편을 암시하는 시퀀스가 나오긴 하지만 차라리 속편을 제작할 바엔 이번 편에서 종료되는 것이 여러 모로 현명한 판단이 아닐까 싶다.
2009년 3월 12일 목요일 | 글_박정환 객원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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