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주의자인 월트 코왈스키에게 작금의 현실은 개탄할만한 변화의 연속이다. 젊은이들은 날이 갈수록 무례해지고 예의는 점점 씨가 말라간다. 게다가 자신이 사는 동네엔 그 예의마저 가르치기 힘든 이방인들의 유입이 넘쳐난다. 그는 가치관과 환경의 변화에 민감하다. 젊은 세대의 무례함을 혐오하고 피부색이 다른 이민족들의 유입을 경계한다. 자신의 일생이 투영된 ‘포드’의 1972년산 ‘그랜 토리노’를 아끼는 그에게 ‘도요타’에서 근무하고 일제차를 운전하는 아들과 그 내외는 탄식할만한 현실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자식들에게 아버지의 존재란 대화가 껄끄럽지만 한낱 물려받을 유산이 남아 있는 삭막한 관계에 불과하다. 어린 손녀조차도 할아버지의 재물을 탐내고 사후 처리를 묻는다. 이웃에 입주한 동양인들 역시 그에게 야만인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월트가 상종할 수 없는 족속이라 믿었던 새로운 동양인 이웃은 그의 시니컬한 삶에 예기치 못한 새로운 계기들을 마련한다.
어느 날 저녁, 동양인 양아치 갱단의 난입으로 벌어진 이웃의 소란에 월트가 개입한다. 결국 총구를 들이밀고 그들을 물리친 월트는 이웃의 감사와 함께 거듭되는 사례를 얻지만 그것이 이타심에서 비롯된 행위가 아님을 스스로 잘 아는 월트에게 호의는 버겁기만 하다. 그러나 그 후로 월트가 우연한 계기로 이웃의 소녀 수(아니 허)를 한차례 더 구하게 되고 두 사람은 말문을 트는 사이로 발전한다. 이로 인해 수는 자신의 남동생 타오(비 뱅)를 월트에게 접근시키고 두 사람의 친분이 형성된다. 부인과 사별한 뒤, 자식들과 괴리된 채 홀로 살아가는 월트의 고독은 개인주의적 사회의 산물에 가깝다. 세대의 교류가 불필요한 세계 속에서 아버지 세대는 쓸쓸히 늙어간다. 반면 동양인 이웃엔 살가운 가족주의적인 풍요로 가득하다. 두 집안의 문화적 대비만으로도 대조적인 이미지가 형성된다. 그 차이는 월트의 편견을 일깨우는 상대성으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월트의 허전함을 자극하는 무언의 구실로 더욱 강하게 작동한다. 동양인 남매는 월트의 강한 편견을 넘어설 수 있는 예외적인 호의를 가능케 한다. 젊지만 의외로 예의 바르며 이방인이지만 무례하지 않다. 편견을 넘어 인간적 호의가 발생하고 소통이 가능해진다. <그랜 토리노>는 그 지점에서 본격적인 시동을 건다.
<그랜 토리노>는 어느 완고한 보수적 노인의 존엄한 결정을 비추기 위한 영화다. 자신의 우직한 신념을 키로 삼아 인생에 시동을 걸며 외길을 주행하던 월트가 그 시동을 유지한 채 새로운 길로 들어서서 펼치는 마지막 레이스를 숭고하게 묘사한다. 그는 결코 자신의 편견을 후회하거나 그로 인한 지난 과오를 참회하지 않는다. 다만 그 신념의 확신이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는 것이 정당한가를 판단할 뿐이다. 월트가 유색인종과 젊은 세대를 찌푸린 눈초리로 바라보는 근거는 사실 어떤 면에서는 합당하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예의가 없고, 존중을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월트의 문제의식이 단순히 그들에 현재를 힐난하기 위한 수단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는 그런 광경을 방조하거나 야기시키는 풍경 너머의 근본을 향해 인상을 찌푸린다. 전통을 중시하지 않는 부모를 둔 자식들은 예의를 잃어가고, 이방인의 사회에 편입되어 어울리지 못한 채 겉도는 유색인종들은 비뚤어진 폭력의 연대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다.
월트는 그 모든 표면적 문제로부터 타오를 격리시킴으로써 그를 이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시키려 한다. 하지만 문제는 쉽지 않다. 그 근본을 해결하지 않고선 결코 극복할 수 없는 문제의 너비를 깨닫기 시작한다. 그리고 점차 어떤 결심을 굳혀나간다. <그랜 토리노>의 결말은 종교적 영험함에 다다를 정도로 엄숙하고 장엄한 이미지와 메시지를 전파한다. 그러나 <그랜 토리노>는 그 위대한 결말에 도달하기까지 만만찮은 위트가 발견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월트가 내뱉는 촌철살인의 독설은 사실 욕쟁이 할머니의 그것처럼 살갑다. 독설로 포장된 위트에 가깝다. 이는 영화를 보는 내내 객석을 들었다 놓는 유희로 소화된다. 한편 <그랜 토리노>를 지배하는 대단한 박력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월트, 엄밀히 말하자면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눈빛과 표정만으로도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장악하고 제스처와 구체적 행위를 더하는 것만으로 씬의 공기를 변화시킨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자신의 얼굴만으로 씬을 지배한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 이후로 4년 여 만에 스크린에 등장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자신의 인생 전반을 통해 벌어들인 내공의 깊이와 너비를 스크린에 고스란히 투영한다.
의심할 여지없이 완전한 모양새를 구축한 연출력 역시 관건이다. 기복 없이 구획이 명확한 플롯과 감정적 빈틈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유연한 내러티브의 흐름은 <그랜 토리노>의 완벽한 행열을 이룬다. 이완과 긴장을 오가는 인물 간의 관계가 희극과 비극의 팽팽한 구도를 완성한다. 우직한 스토리텔링과 함께 세심하게 진전되는 캐릭터의 구도와 심리적 양상이 너비와 깊이를 함께 구축한다. 계산적인 정공법이라기 보단 경험적인 방식의 이야기 세공력이 빛을 발한다. 단순한 제스처의 반복이 거대한 복선으로 장착되고 미약하게 감지되곤 하던 어떤 암시가 거대한 전율로 확장된다. 계산적인 동시에 감각적인 양식으로 보좌되는 플롯과 내러티브의 구축은 <그랜 토리노>의 주제를 보필하기 위해 마련된 탁월한 부속품들이다.
(스포일러라 직접적으로 언급할 수 없는) <그랜 토리노>의 결말은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종결하는 <그랜 토리노>는 어느 보수주의자의 깊은 혜안을 담고 있다. 월트는 문 앞에 성조기를 내걸 만큼 애국심이 대단한 인물이다. 그런 그에게 개인주의적인 젊은 세대는 지독한 이기주의로 이해되며 타민족의 활발한 유입은 국가주의적 결속을 해치는 무분별한 난입으로 이해될만한 것이다. 지독한 편견은 그 자체로 혐오스러운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가 단순히 개인적 악의로서가 아닌 전체적인 존속을 위한 고민으로서 그런 편견을 유지하고 지탱해나간다는 방식이 중요하다. <그랜 토리노>는 단순한 문제제기의 수준에서 시동을 꺼버리지 않고 그 해결점이 모색될만한 지점을 가리키며 새로운 주행방식을 설득시킨다. 월트의 ‘그랜 토리노’가 단순히 그의 지난 자부심을 위한 전시물이 아닌 미래의 새로운 주인을 위해 물려지는 산물로서 거듭날 때 <그랜 토리노>는 새로운 시대를 배려하는 대안적 정책으로 거듭난다. 아메리칸 드림을 지나 전세계 인종의 전시장이 된 오늘날의 미국이 더 이상 백인들의 전유물이 될 수 없음을 뼈저리게 체감한 백발 노인의 보수적 신념은 자신의 영토를 어떤 방식으로 발전시켜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혜안과 우직한 결심으로 발전된다. 외부인의 유입을 막을 수 없는 현실을 위한 새로운 고민을 모색한다. 차별과 편견을 통한 억제가 아닌 선별과 교화를 통한 육성을 제시한다.
50년 전 한국전에 참전했던 월트는 전장에서 짊어지고 온 살육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는 명예로운 훈장의 치욕적 진실을 잊지 못한다. 그의 현실적 고독도 대부분 그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사별한 부인이 자신과 친분이 있던 신부 (크리스토퍼 칼리)에게 남편의 고해 성사를 부탁한 것도 그런 상흔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월트는 그것을 부정하거나 회피하지 않는 방식으로서 자신의 죄책감에 맞선다. 그에게 지난 비극은 당면해야 할 현실이었을 따름이다. 그는 그 죄를 사해달라 요청하지 않음으로써 이를 온전히 자신의 책무로 짊어지며 살아간다. 그의 결심도 그 지점에서 비롯된다. 비극을 잉태한 자신의 행위를 스스로 책임지려는 태도는 고집만큼이나 비장한 것이다. 시대의 변화에 눈살을 찌푸리지만 그건 자신의 기득권이 쇠퇴하고 있다는 위기에 젖어 염치없는 망발을 일삼는 어느 보신주의자들의 얄팍한 보수주의 퍼포먼스와 차원이 다른 것이다. 정의가 무너지고 인간의 예의가 망가지는 사회에 대한 염려가 그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자신의 신념을 부정하지 않는 방식으로서 자신의 육체를 공익적 방도로 삼아 사회에 환원한다. 스스로 용서받지 못한 자가 될지라도 소신이 향하는 방향으로 과감히 돌진한다. 자신의 노쇠한 육체가 새롭게 거듭나는 사회의 비료가 되길 희망한다. 자신이 점지한 대안 세대에게 폭력의 책무를 물려주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의로서 그는 복수가 아닌 징벌을 택한다.
<그랜 토리노>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와 이란성 쌍둥이 같은 작품이다. 아들과의 괴리감 속에서 고독을 느끼는 월트는 딸을 그리는 복싱 트레이너 프랭키와 비슷한 실루엣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프랭키와 달리 월트는 자신이 응원하는 후세대의 좌절을 짊어지고 퇴장하지 않는다. 반대로 후세대의 발목을 잡는 모든 제반 조건을 제거하기 위해 자신의 마지막 삶을 건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라스트 씬이 쓸쓸하게 퇴장하는 노장의 뒷모습이었던 것과 달리 <그랜 토리노>는 새로운 전통의 주인이 된 타오가 그랜 토리노를 운전하고 사라지는 저편을 롱테이크로 비춘다. 그 풍경은 새로운 세대의 존립을 위해 삶의 마지막을 태운 어느 노장의 깊은 철학이 이룬 성과다. 롱테이크로 비추는 그 풍경에서 변하는 건 비단 인간을 통해 움직이는 차량 뿐이다.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단지 인간이 변한다. 인간이 변할 때 세상도 변한다. 결국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변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도 그 지점에서 발효된다.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는가, 라는 고민과 함께 어떤 식으로 죽음을 맞이하는가, 라는 고민이 대칭을 이룬다. <그랜 토리노>는 그 삶과 죽음에 대한 물음에 묵직한 답변을 남긴다.
팔순을 앞둔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어느 보수주의자의 냉철한 시각에 담긴 따뜻한 혜안을 그린다. 자신의 신념을 고수하되 그 신념이 나아가야 할 철학적 공정함을 간과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올바른 신념이다. 기득권의 보신을 위해 보수주의의 문패를 내거는 알량한 거짓 연기와 다른 진짜 보수주의자의 덕목을 숭고한 방식으로 구현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렇게 거장의 철학을 또 한번 설득시킨다. 언젠가 노장은 죽는다. 다만 사라지지 않을 뿐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도 언젠가 죽을 것이다. 하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랜 토리노>는 그에게 영원을 약속하는 이름이나 다름없는 걸작이다. 마치 누구나 탐내는 1972년산 '그랜 토리노'처럼.
2009년 3월 5일 목요일 | 글: 민용준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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