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바람의 화원’을 필두로 시작된 한국 사회의 신윤복 열풍은 간송미술관에서 한정 기간이나마 일반에게 공개된 ‘미인도’ 감상에 입추의 여지가 없을 만큼의 인파가 몰리게 만들었고, 동명의 드라마가 시청자들에게 호평을 받더니 그 기세를 몰아 11월에는 영화 개봉을 통해 그 열기가 가히 화룡점정(畵龍點睛)에 다다른다. 당시 조선 미술계에서 김홍도와 자웅을 겨루던 천재화가 신윤복의 여러 작품 가운데 ‘미인도’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얇은 저고리 밑. 가슴 속 가득한 정을 붓끝으로 전하노라." 섬세한 필체가 가능케 되었던 연유는 어쩌면 그 자신이 여성이었기에 가능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팩션적 발상에 착안하여 이 영화는 신윤복을 여성으로 설정하고 조망한다.
드라마 <황진이>가 공존의 히트를 기록 후 드라마의 후광을 빌어 재해석된 동명의 영화가 지루한 전개와 평면적인 캐릭터로 평단과 관객의 외면을 받은 전철을 의식해서인지 <미인도>는 먼저 나온 소설과 드라마 <바람의 화원>과는 다른 트렌드로 관객에게 다가선다. 기존의 소설과 드라마가 두 천재 화가의 그림을 향한 열정, 대결 구도라는 전개 방식을 택한다면 <미인도>는 신윤복(김민선)과 가공인물 강무(김남길)와의 로맨스를 두각 시키고 이들 연인을 중심으로 김홍도(김영호)와 기녀 설화(추자현)의 애증과 집착을 주요 관점으로 바라본다. 무엇보다도 이들 남녀 간의 로맨스는 올해 개봉한 한국 영화들 가운데 노출 수위가 가장 높다.
하늘은 신한평(신윤복의 아버지)의 오누이에게 천재적 미술의 재능을 공평하게 나눠 부여하지 않았다. 조선시대 솔거의 환생은 오라비가 아니라 누이 윤복의 몫이었으니 화가로 대성하기 원하는 부친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아들은 어린 나이에 자살이라는 비극적 선택을 한다. 이로 말미암아 “(신윤복) 너의 죄과를 씻는 길은 김홍도의 골수를 다 파먹고 조선 최고의 화원으로 크는 것”이라는 신한평의 끔찍한 대사에서 나타나듯, 가문의 입신양명을 꿈꾸던 부친의 야망에 부합하고자 윤복은 성(性) 정체성을 자의가 아닌 타의인 남성으로 가장하고 당대 최고의 화가 김홍도의 문하생으로 들어간다.
남장 신윤복이 기존의 복장에서 벗어나 가채를 올리고 여자 한복으로 갈아입은 뒷모습의 실루엣은 이 영화 제목 <미인도>의 그림 속 인물이 화가 본인의 자아를 반영함을 보여주는 시퀀스다. 타의적으로 성 정체성이 고정되었던 주인공이 본래의 성 정체성인 여성을 강무를 통해 확인 받음은 자아에 대한 신윤복 스스로의 고뇌의 반영이라기보다는 연인이라는 타자(他者)를 통해 정체성을 확립 받는다는 타아의존적 자아구축의 면을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 제목이 왜 미인도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영화 속에서의 치밀한 고민은 영화 속에서 등한시하는 한계를 보여준다. 또다른 약점은 신윤복과 연인의 로맨스, 그녀 주위의 김홍도와 설화 간의 집착 등이 살색 육담(肉談) 이상의 진전을 보이지 못한다는 점이다. 각 인물에 대한 감정선을 염두에 두고 씨줄날줄을 오가는 치밀한 연출이 필요하면 필요했지 색주가에서 청나라체위(體位) 따위나 제시하는 자극적 발상은, 이 영화가 필요한 요소는 빼버리고 정작 불필요한 부분에 집착하는 악수(惡手)를 두었음을 보여준다.
보다 심각한 점은, 영화 속 네 남녀의 구도는 굳이 신윤복이나 김홍도라는 역사적 인물 설정을 빌리지 않았더라도 가능하다는 점이다. 통속적인 사랑과 애증이라는 구도 위에 조선 당대 최고의 두 천재 화가라는 소재가 덧입혀졌다면 사랑과 애증이라는 시각과는 별도로 신윤복과 김홍도의 아이덴티티인, 미술에 대한 예술인으로서의 고뇌 혹은 치열한 고민의 흔적이 있어야 하겠건만 아쉽게도 이 부분에 대한 연출은 많은 부분이 휘발(揮發)되고 만다. 마지막 시퀀스 하나로 이 영화 제목<미인도>의 핵심을 관통하겠다는 의도 역시 관객들을 납득시키기엔 어려움이 있다. 부친의 야망에 의해 덧입혀진 성 정체성에 대한 진지한 해석과 조선시대 두 천재 화가의 시대상이 살색 에로티시즘에 압도되고 마는 이 영화를 관객들은 어떻게 받아들일는지.
2008년 11월 6일 목요일 | 글_박정환 객원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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