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누구에게나 평등한 인간의 기본 권리다. 하지만 세상은 때때로 자의, 혹은 타의의 이유로 자유의 기본성을 억압하고 가두어 버린다. 만약 이것이 도덕적이지 못한 자신의 과오가 아니라 타인에 의한 강제적 억압이라면, 그 억압의 구속력이 강해지는 만큼 자유에 대한 간절함은 강해진다. 그리고 이러한 간절함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하기도 하고, 때때로 그것의 결과는 죽음을 통한 완벽한 자유의 형태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데스 레이스>는 목숨을 담보로 하는 죽음의 레이스다. 그것은 규칙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규칙이 없는 경기는 과정의 성실성을 묻지 않는다. 자아의 도덕성과 인성에 대한 일말의 감정도 필요치 않고, 그저 내가 살아남기 위해 상대를 죽여야 하는 말초적 감각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자유가 억압된 자들의 몸 안에서 더 거칠고 잔인하게 분출된다.
젠슨(제이슨 스테이섬)이 원하는 것은 자유였다. 아내를 죽였다는 오명을 벗기 위해서가 아니라 평생 다른 이를 아버지라고 부르게 될 딸을 되찾기 위해 자유라는 이름이 필요했다. 그는 헤네시(조안 앨런) 교도소장의 이욕이 넘쳐나는 죽음과 자유의 갈림길 <데스 레이스>를 받아들인다. 조건도 나쁘지 않다. 5승을 해야만 석방이지만 그는 4승을 하고 죽은 프랑켄슈타인의 대역이므로, 남은 한 번의 승리만 있으면 출소증명서를 들고 유유히 딸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에 비화가 숨어 있듯 젠슨에게 누명을 씌우면서 까지 그를 원했던 ‘터미널’의 교도소장은 그에게 자유로 향하는 공정한 잣대를 제시하지 않는다.
<데스 레이스>는 죽음이라는 장치 위에 스피드라는 쾌감을 얻는다. 영화 초반부터 마지막까지 쉼 없이 이어지는 1,2,3차전의 레이스는 최대한의 CG를 배제한 실감나는 리얼 액션이 되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틈을 주지 않는다. 마치 게임을 보는 듯 한 레이서들의 인물 소개나 자동차 매니아들이 열광하는 머스탱, 닷지, 포르쉐, 재규어, BMW 등의 자동차를 개조하여 온갖 무기들로 치장한 괴물 같은 차량을 보는 재미도 관심을 끌 만한 요소가 된다. 그리고 이런 오락적인 요소들은 잔인하고 거친 스피드와 맞물려 <데스 레이스>라는 제목에 충실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하지만 딸을 찾고자 하는 아버지로서의 고뇌, 아내를 죽인 자들에 대한 복수심 등 인물 내면 갈등에 대한 심도 있음의 결여나, 너무 간단히 풀려버리는 인과관계의 상황은 부족함으로 남는다. 그렇지만 이러한 스피디한 액션영화에서 집약적이고 촘촘한 밀도를 가진 드라마적 요소나 황홀한 연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면, 애써 그러한 부족함에 신경을 쏟을 이유는 없다고 본다. 보고나서 여운이 남는 감동 대신, 보는 내내 짜릿함에 충실할 수 있는 것도 다양한 영화의 변주에 한 부분일 것이다.
‘폴 WS 앤더슨’ 감독은 <모탈 컴뱃> <레지던트 이블>등 게임을 영화화한 전작들에서 보여줬던 미래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데스 레이스>에서도 선보인다. 죄수들을 내몰아 충돌하고 부서져 나가는 죽음의 상황을 즐기며 이윤추구만을 일삼는 민영 교도소의 모습이나, 돈을 내고 인터넷으로 생중계되는 잔인한 모습을 즐기는 사람들. 죄수라는 이유로 보조석에 타 위험천만한 인간 내비게이션의 역할을 담당하는 여성파트너들의 모습은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된 미래 사회의 슬픈 단면이 된다. 그리고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얻기 위해 다른 이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 그들의 모습은 미래가 아닌 현실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2008년 10월 16일 목요일 | 글_김선영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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