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점이 많은 세 나라 중국, 한국, 일본을 관통하는 확실한 공통점 한 가지. 중국 고전 〈삼국지연의〉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으며, 이를 이용한 컨텐츠가 활발히 생산되는 국가라는 점이다. 세 나라에서 태어나 살고 있는 사람 중에서,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삼국지연의〉에 영향에서 자유로웠던 사람이 얼마나 될까.
후한 말기 황건적의 난을 기점으로 한 제국이 흔들리고, 중국이 뿔뿔이 나뉘었다가 진(晉) 나라로 통일되는 과정을 다룬 대하소설로 유명한 〈삼국지연의〉는, 특히 후한 말에 나타난 영웅들이 각각 위, 촉, 오 세 나라를 세우고 천하를 정립하는 과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 사이 벌어지는 파란만장하고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가 널리 독자를 사로잡았던 것.
소설을 중심으로 소화한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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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삼국지연의〉가 널리 퍼지게 된 시기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찍부터 즐겨왔던 〈삼국지연의〉는 한국에서 소설을 중심으로 한 작가 별 판본의 형태로 만들어졌다. 원작 자체가 중국에서 구전되던 이야기를 정리하며 성립된 소설인 관계로 중국에서조차도 편역자 나관중의 작품을 그대로 읽기보다 당대의 지식인들이나 소설가들이 적절히 손질하고 평을 덧붙인 판본이 많은 작품이다보니 한국에서 역시 번역과 평을 덧붙인 여러 판본이 인기를 끌었다. 평역본 중에는 고전으로 꼽히는 김구용 판이나 드라마 〈용의 눈물〉의 원작자로 일간신문 연재 대하소설 전성기를 대표하는 소설가 박종화 판이 유명하고, 근래에는 소설가 이문열 평역이나 황석영 평역이 서점에서 꾸준히 팔리고 있다. 유명 소설가의 평역본이 고교생과 대학생의 필수 도서로 꼽히는 분위기가 지속되는 한 〈삼국지연의〉의 인기는 지금처럼 꾸준히 계속될 듯 싶다.
소설을 벗어나면 조금 더 흥미로워진다. 일년에 〈삼국지연의〉를 소재로 쏟아지는 처세술이나 경영학 관련도서나 〈삼국지연의〉를 각색한 만화까지 다채로운 형태로 해석한 작품이 많은 까닭이다. 코미디로 〈삼국지연의〉를 해석한 정훈이의 〈트러블 삼국지〉나 박수용의 〈삼국장군전〉 등도 널리 알려져 있지만, 역시 이 부류에서 가장 이름값이 높은 작품은 해학적인 그림체와 탁월한 유머로 유명했던 고우영 화백의 〈삼국지〉가 아닐까. 이미 한국 만화의 고전 반열에 오른 작품이니. 좀 더 나이가 있는 독자라면 신동우 화백이 그린 〈삼국지〉를 기억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다채로운 해석과 활용이 인상적인 일본
소설 뿐 아니라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을 비롯한 다종 문화가 발달한 일본은 〈삼국지연의〉를 활용하는 방법이 훨씬 다채롭다. 소설이 성인 층과 책을 읽으려는 청소년 층을 끌어들인다면, 다른 문화 매체는 소설이 놓치는 〈삼국지연의〉 소비층을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농구만화 〈슬램덩크〉의 작가 다케히꼬 이노우에가 그린 〈베가본드〉의 원작자이기도 한) 역사소설가 요시가와 에이지 평역본은 일본 뿐 아니라 한국에도 많은 영향을 준 작품으로, 김동리 등의 소설가가 〈삼국지연의〉 번역본을 낼 때 활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작품을 무려 60권에 이르는 만화로 옮긴 요꼬야마 미쓰떼루의 〈전략삼국지〉는 한국에도 번역되어 전통에 가까운 〈삼국지연의〉를 만화로 보려는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작품.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져 〈삼국지연의〉를 중심으로 한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큰 줄기를 차지하고 있는 이른 바 ‘본류’에 가까운 작품이다.
워낙 만화 시장이 넓은 일본답게 〈삼국지연의〉를 소재로 만든 만화 역시 무척 많은 편이다. 그 중 국내에도 많은 팬을 가진 작품은 통상 두 작품이 꼽히는데, 현대 세계에서 〈삼국지연의〉 시대로 신비로운 현상에 의해 옮겨간 고교생이 겪는 모험을 그린 〈용랑전〉과, 조조를 중심으로 호쾌하게 〈삼국지연의〉를 재해석한 〈창천항로〉가 바로 그 작품. 실제 역사와 소설을 알고 있는 고교생이 〈삼국지연의〉 세계에 끼어듦으로써 원래 이야기와는 다르게 발전하는 〈용랑전〉이 〈삼국지연의〉의 평행세계라면, 원작 〈삼국지연의〉에 뿌리 깊게 남아있는 ‘촉한정통론’과 ‘제갈량 + 관우 제일주의’를 벗겨낸 〈창천항로〉는 일부는 사료를 참고하고 일부는 별나게 재해석하며 조조를 중심으로 한 영웅시대를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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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식 〈삼국지연의〉 컨텐츠의 정점은 역시 게임. 세계를 주름잡는 게임 제작사가 몰려있는 일본에서 〈삼국지연의〉를 소재로 하는 게임이 나오지 않는 것은 역시 이상하다. 그 중에는 최근 작품 〈연희몽상〉처럼 〈삼국지연의〉 등장인물을 모조리 미소녀로 대체한 괴작이 있는가 하면, 실제 〈삼국지연의〉의 영웅 중 하나가 된 것처럼 군대를 부리고 인재를 모으는 게임 〈삼국지〉는 1980년대에 첫번째 편이 나온 이후로 11편까지 시리즈가 계속되며 〈삼국지연의〉를 즐기는 나라 전역에서 꾸준한 인기를 모으고 있다. 제작사 코에이는 일기당천의 〈삼국지연의〉 영웅들을 조종해 호쾌한 싸움을 벌이는 액션 게임 〈삼국무쌍〉 시리즈 역시 성공시키며 〈삼국지연의〉 게임을 대표하는 제작사가 되었다.
본 고장에서 즐기는 방법
지역과 역사에서 〈삼국지연의〉의 본고장인 중국은 다른 나라에서는 시도하지 않는 영상물이 있는 점이 특별하다. 소설에서 묘사한 지역과 비슷한 사람들이 있는 덕분에 한국과 일본에서는 직접적으로 묘사할 수 없는 〈삼국지연의〉의 장면이 중국이라면 가능해진다. 어지간히 큰 비디오 대여점에는 하나 정도 꼭 있던 드라마판 〈삼국지〉 전집이나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진 〈삼국지〉는, 소설이 묘사한 장소를 실제로 보려는 관광객과 어울려 본 고장의 카리스마를 쌓았다.
그리스 고전을 헐리웃 영화로 각색한 〈트로이〉를 보고 오우삼 감독이 〈삼국지연의〉를 떠올린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으리라. 미국인이 신과 영웅이 어우러져 벌이는 거대한 전쟁 〈일리아드〉를 영화로 옮길 생각을 했다면, 중국인인 자신이 중국을 대표하는 서사극 〈삼국지연의〉를 스크린으로 옮기고 싶어한 오우삼의 욕망을 이해 못하는 바 아니다. 더 거대하고 더 다채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는 〈삼국지연의〉의 문제점을 극복하는 것만이 남았을 뿐.
거대한 규모에 비해 핵심인물이 적고 적절히 극화한 〈일리아드〉에 비해 〈삼국지연의〉는 엄청나게 많은 등장인물과 드라마를 담고 있다. 이미 과거에 시도한 대로 드라마 시리즈로 만들 수는 있어도, 러닝타임이 정해진 극장용 영화로 만들기는 힘들다. 그렇다고 드라마 시리즈로 처리하기에는 원작이 담고 있는 스케일과 박력을 충분히 표현하기 힘들다는 난점이 있다. 만일 피터 잭슨이 〈반지의 제왕〉 영화화를 성공하지 못했다면 이 프로젝트는 여전히 ‘영화화 불가능’으로 분류되어 잠자고 있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나, 거대한 규모의 이야기를 연작으로 나누어 장시간의 러닝타임으로 편성해도 충분히 관객을 끌 수 있음을 증명한 마당에 도전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일까. 이야기가 충분히 매력적이라면 불가능할 이유가 없다.
가장 극적인 장면을 골라야 했다. 다채로운 캐릭터가 숨쉬는 가장 극적인 순간을 〈삼국지연의〉에서 꼽는다면 누구나 〈적벽대전〉을 꼽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원소의 최후 관도대전이나 유관장 삼형제가 전투에서 데뷔하고 여포와 맞붙는 사수관 전투, 조운과 장비의 영웅담이 돋보이는 장판파 전투를 꼽을 수 있을 것이나 역시 대세는 〈적벽대전〉일게다. 오우삼의 선택 또한 그렇다.
하나로 선택을 줄였지만 거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까닭에, 영화는 여름과 겨울에 걸쳐 두 편으로 나누어 개봉한다. 첫 작품이 여름에 개봉하는 〈적벽대전: 거대한 전쟁의 시작〉이다. 원작에서는 제갈 량을 돋보이게 하는 조연에 가까운 주유 역에 양조위를, 스타성에서 그보다는 함량이 다소 쳐지는 금성무에게 제갈 량 역을 맡긴 캐스팅을 볼 때 〈적벽대전〉의 〈삼국지연의〉 해석 또한 원작과는 거리가 있을 듯 싶다. 그러나 역사는 바꿀 수 없는 법, 거대한 전쟁은 이제 시작이다. 중국인이 만드는 〈삼국지연의〉의 한 장면, 소설과 만화, 게임을 통해 즐겼던 한국 관객에게도 매력적인 모습으로 다가올 것을 기대한다.
2008년 7월 14일 월요일 | 글_유지이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