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억 달러와 약 160만 관객. <아이언맨>의 개봉 첫 주말 미국과 국내 스코어란다. 뚜껑을 열자마자 순제작비 1억 4천만 달러를 뽑고 이제 이익만 남기면 된다. 이 정도면 지난달 16일, 주연배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내한이 남부끄럽지 않을 수준이다. 바야흐로 할리우드 블록터스터의 시즌, 여름 시장의 막이 올랐다.
국내 스코어는 어느 정도 예상했다. 맞붙은 한국 영화 <가루지기>와 <비스티 보이즈> 모두 청소년 관람불가였다. 또한 두 작품 모두 상업 영화다운 흡입력도 약했다. 2, 3일엔 촛불집회에 참석한 서울 관객들의 일탈(?)도 별 도움이 안 됐단 얘기다. 한쪽에서는 '쇠고기 재협상'을 외쳤지만 한쪽에서는 영화관으로 향했단 뜻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할리우드 영화들의 여름스케줄은 화려하다. 비가 조연으로 활약한 <매트릭스> 시리즈 워쇼스키 형제의 <스피드 레이스>가 다음주, <나니아 연대기> 속편이 셋째주, 22일엔 무려 <인디아나 존스> 4편이 버티고 서 있다. 그런데 속편도 아니고, 톱스타가 출연하지도 않은 <아이언맨>이 이렇게 장사가 될 물건 이냐고? <아이언맨>은 매끄럽고 재미있다. 볼거리도 <트랜스포머>의 '떼거리' 로봇에 비하면 수적으로야 달리지만 집중도와 질적인 면에서 뒤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영악하다. 정치적 중립을 내세운 채, 미국적인 물신주의와 테크놀로지를 만방에 과시하는 매력적인 수퍼히어로 시리즈가 탄생했다. 점점 더 똑똑해지고 있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 그 중에서도 올 해 스타트를 끊은 <아이언맨>의 전략을 거들떠보도록 해보자.
고민 없는 자본주의형 수퍼 히어로, 토니 스타크
주인공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는 전세계를 통틀어도 남부러울 게 없는 남자다. 최고의 갑부고 최대 군수업체 CEO에다 '초딩'때 MIT를 수석 졸업한 천재 과학자다. 재능과 부는 물론이요, 얼굴도 잘생겼고 유머감각까지 겸비했다. 날씬한 기자를 필두로 할리우드 배우 뺨치는 여자들이 줄을 서고 비서는 재색을 겸비한 버지니아(기네스 팰트로우)다. 이만하면 역대 최강이다.
<배트맨>의 브루스 웨인도 갑부지만 가상공간인 고담시티에 처박혀 있으니 현실감이 떨어진다. <수퍼맨>의 클라크는 신문기자, <스파이더맨>은 가난한 고학생, <엑스맨>은 천대받는 돌연변이들이었다. 21세기 미국에 발을 딛고 선 <아이언맨>은 시작부터 현실감으로는 역대 최고다. 초반부 그의 화려한 이력을 훑고 지나가는 연결 화면과 단 몇 신을 위해 마이애미의 절벽에 지어진 저택이 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어쨌건 무기 홍보차 아프가니스탄으로 당도했다가 게릴라 조직에 납치되는 스타크. 신무기를 만들어내라는 주문을 살짝 무시한 뒤 게릴라 군의 미사일을 조합, 가공할 무기인 철갑 수트를 발명한 뒤 가뿐히 탈출에 성공한다. 심각한 부상은 인공심장으로 대신 한 채.
다음은 일사천리다. 납치 사건으로 무기의 해악을 깨달은 스타크는 군수 산업을 접겠다고 선언하고 마니아다운 기질을 살려 스스로 철갑 수트의 업그레이드에 착수한다. 말 그대로 자기 손에서 탄생한 수퍼히어로 되겠다. 그 후 새롭게 나타난 악당과의 대결에서 승리하고 비서 버지니아와의 사랑을 확인하는 건 정해진 수순이다.
<아이언맨>의 강점은 무엇보다 토니 스타크라는 캐릭터의 새로운 면모다. 만인이, 그 중에서도 특히 틴에이저들 남성들이 부러워할 이 모든 걸 가진 남자는 물론 어떠한 고민도 없다. 자본주의 사회의 총아답게 마음먹은 걸 실행하기만 하면 만사 오케이다.
<배트맨>의 선과 악에 대한 존재론적인 고민도 없다. <스파이더맨>의 영웅의 책임론도 간단히 무시한다. '돌연변이' <엑스맨>처럼 마이너리티적인 시선은 더더욱 없다. <수퍼맨>처럼 외계인은 더더욱 아니다. 초인적인 능력이 아니라 최첨단 기술과 무지막지한 자본으로 스스로의 재능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케이스다. 게다가 이 친구는 회개까지 한다. 전쟁과 무기의 해악을 스스로 깨닫고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몸소 실천하며 군수산업에서 손을 떼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피랍으로 인한 심경의 변화가 온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사업을 자기 스스로 해체하는 수준은 아니다. 더욱이 군수산업체가 '스타크 기업' 하나만은 아니지 않는가. 회개치고는 단순명료한데 자신이 만든 무기는 미국만이 쓸 수 있다는 논리 정도랄까.
적에 대한 선긋기도 명징하다. 공격은 아프가니스탄에 본거지를 둔 게릴라들. 삽시간에 날아가 난민들을 괴롭히는, 바로 자신을 납치했던 그들을 간단히 제압한다. 구소련의 아프간 침공시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반군을 지원하며 탈레반을 키워냈던 역사를 곱씹어 본다면 "하필 또 아프가니스탄이냐"란 푸념이 들리는 듯하다. 진짜 적은 액션영화의 관습과도 같은 내부의 적이다. 아버지 세대부터 회사를 떠받쳐 왔던 간부가 그의 뒷통수를 친다는 전개인데, 이게 또 군수산업의 백전노장과 맞서는 궤적을 그리는 셈이다.
여기에 그를 돕는 친구는 미 공군의 엘리트 장교. 이쯤 되면 스타크는 군대의 조력과 군수산업체 그리고 과학기술을 겸비한 가장 세속적인 파워를 자랑하는 수퍼히어로가 아닐 수 없다. 초능력도 없는 군수 산업체 회장이 회개하여 악을 물리친다는 무겁지 않을 만큼의 현실성과 과시하는 듯한 정치적 중립성의 영웅 말이다.
똑똑해진, 성인 취향의 <트랜스포머>
이 영화를 보고 <트랜스포머>를 떠올렸다면, 그건 스타크의 철갑 수트 변신 능력이 로봇의 그것을 닮아서만은 아니다. 주인공 스타크의 지적 수준이 아닌 사고 수준이 딱 <트랜스포머>의 고딩 샘(샤이아 라보프)를 닮았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다면 샘이 안드로메다에서 도착한 로봇들과 짝패를 이룬다면, 스타크는 손수 제작한 초강력 무기를 장난감으로 사용한다는 차이만 있을 뿐. 예전의 수퍼히어로들에서 고민을 걷어낸 <아이언맨>은 로우틴(10대 초중반) 남자 아이들이 환호한 변신 로봇에 대한 감흥을 화려한 CG 화면으로 구현하는데 공을 들인다. 초능력에도, 안드로메다에서 찾아온 로봇의 도움도 받지 않고 우주까지 홀로 비행하고, F-16 전투기와 전투를 벌이는 판타지적 쾌감 말이다.
<아이언맨>은 분명 좀 더 성인 취향의 <트랜스포머>다. 게다가 내용 전개의 허술함으로 인해 빈축을 사야했던 <트랜스포머>보다 전통적인 영웅의 탄생 구조와 스피티한 전개를 취함으로써 앞으로 2, 3편이 나올 근간을 이미 마련했다. 연기파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캐스팅은 그래서 더더욱 탁월하다. 가벼울 수 있는 캐릭터에 신뢰감을 부여한달까.
원작은 <스파이더맨> <엑스맨> <헐크> 등의 캐릭터를 보유하고 있는 미국 수퍼히어로물의 양대 산맥 마블코믹스. <아이언맨>은 마블코믹스가 제작사를 차리고 직접 제작한 첫 번째 영화다. 1963년 처음 선보인 이 만화 캐릭터가 마블코믹스 영화사의 효자 종목이 될성싶다. 벌써 미국 영화 사이트에서는 속편이 결정됐다는 소문이 들려오는 중이다.
60년대의 만화를 현실적으로 치환하면서 정치적 중립성을 어기지 않는 영민함. 그리고 무엇보다 SF 액션의 기본에 충실하며 가벼움과 볼거리, 유머를 황금비율로 조율하는 대중적인 세공술. <아이언맨>은 코엔형제를 비롯한 미국 독립영화 진영의 세력들 못지않게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들도 똑똑해졌다는 자신감 넘치는 증명서처럼 보인다.
2008년 5월 14일 수요일 | 글_하성태 기자(무비스트)